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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현 Nov 15. 2024

코로나가 한창인데, 다시 중국으로

그렇게 한국에서 잘 지내나 했더니, 우리는 결국 다시 중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학교 때문이었다. 학교가 돌연히 '개학'을 한다고 해서, 안 갈 수는 없기에 코로나가 한창 창궐 중인 선전 시로 향하게 되었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서 선전 시에서도 확진자가 많아졌다. 뉴스에서는 사망자 역시 폭증하고 있다고 하여 매우 긴장하였으나 집과 학교, 여러 문제가 겹쳐 결국 중국으로 향했다.


원래 중국 국경이 봉쇄되어 이론적으로는 갈 수 없었다. 하나 우리는 '거류민증'이 있어서 중국인과 똑같이 귀국할 수 있었다. 거류민증을 받은 외국인은 여러 수속을 할 때 중국인들과 같은 절차를 밟아 입국하고, 70% 정도는 중국인처럼 살 수 있다. 비행기 안을 보니 귀국하는 중국인들과 우리 같은 교민들이 대부분이었다. 


비행기 타기를 4시간,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공항에 도착했으나 바로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격리 시설'에 들어가야 한다는 통보가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차례로 금색 버스에 탑승해서 공항 근처에 한 호텔로 이동하였다. 작고 남루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선에서 끝난 것이 다행히었다. 홍콩에서 들어온 애들은 피검사도 하고 호텔이 아닌 진짜 시설로 보내졌다고 했기 때문이다.  


호텔 창문 밖으로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대부분 관리 인력이었는데, 중국 경찰부터 세관 직원들, 중국 한인회 관계자들이 뒤섞여 장관이었다. 달리 할 것도 없어서 나는 창 밖을 구경했다. 열심히 무언가를 작성하는 사람들, 사진을 찍는 기자들, 그리고 상자를 들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차량들이 주차장에 한가득이었다. 


이때쯤 내가 그전까지 살았던 일상은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원래라면 학교에서 한창 조별과제를 해야 했지만, 지금은 낯선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선생님한테 격리되어 과제를 하지 못한다는 메일도 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식사가 나왔다. 중국식 닭찜과 신라면이었다. 그렇구나, 아무리 세상이 혼란해도 밥은 먹어야지. 그 상황과 안 어울리게도 밥은 상당히 맛있었다. 간장이 적절하게 스며든 쫄깃한 닭발과 매콤한 라면... 생수로 백산수가 제공되었다. 나는 그 병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도 물맛은 좋았다. 


다음 날이 우리는 각자 집으로 보내졌다. 먼저 복전(福田), 나호(羅湖)에 사는 사람들이 집으로 가고, 맨 마지막으로 남산(南山)에 사는 우리가 집으로 갔다. 재난상황 같았고 실제로도 재난상황이었지만, 버스의 쾌활하신 안내원 덕분에 그나마 수월하게 갈 수 있었던 같다. 버스에서 내리니 관리소 직원들과 동네 경찰들이 기다라고 있었는데, 간단한 PCR검사를 하고 집까지 안내했다. 정말 꿈같았다. 원래라면 학교에 가서 한창 수업을 해야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중국에서 격리되는 동안 직원과 동사무소 직원들이 먹으라고 귤 박스와 사과 박스를 주었다. 이걸로만 버티라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해탈했다고 해야 할까. 사람들은 자잘한 인간관계나 사랑에 신경 쓰곤 한다. 그러나 순식간에 집에 갇혀서 귤을 까먹는 신세가 된 마당에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흔히 사춘기에는 친구 관계가 중요하고, 첫사랑을 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난 그 반대였다. 여기저기 떠돌며 격리되고 이사하는 동안 인간관계가 바람 앞 등불처럼 쓸려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초연해지기도 했다. 사람이 사라지자 자연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초목과 귀여운 새들, 사람이 아니더라도 좋아할 것은 얼마든지 널렸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그 뒤로는 혼자만의 시간이 더욱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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