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가득한 술집, 달빛주점

숨겨진 언덕 위의 술집

by 하늘나루

본 글은 소설 '낭만술집 달빛주점'의 일부입니다.



'서경아? 도대체 어떻게 여기서...'


몇 분 정도가 흐르자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녀는 교복 차림이었는데, '하나고등학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변형된 모습이 아니라 진짜 교복이었습니다. 전 그녀가 몇 년 전 실종되었던 저희 반 회장 서경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요?


저는 같은 학교 출신을 만나 그야말로 빛을 본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제복으로 갈아입고 주문을 외웠지요. 그러자 그녀의 모습이 곧 하얀 여우로 변했습니다. 그녀는 제가 갇힌 방으로 와서 조용히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나고 시절에는 그렇게 깐깐하더니 여기서는 그런 모습은 온 데 간데없었지요.


'서둘러요. 까치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이걸 입으세요.'


'갑자기 무슨 존댓말이야? 우린 친구 아니었어? 부담스럽게 왜 이래?'


'쉿.'


저는 그녀가 준 망토를 입고 금테가 있는 모자를 썼습니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니 까치들이 잠그고 간 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저는 그녀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도중에 까마귀 직원을 마주쳤지만, 그녀가 경례를 하자 그도 경례하며 그냥 지나갔습니다. 방에 도착하자 그녀는 문을 잠그고 책상 위의 구식 전화기에 외쳤습니다.


'잠시 외출하겠습니다. 돌아오는 대로 다시 업무에 임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절 잡아끌고 작은 비행선에 태웠죠. 그녀의 하얀 털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습니다. 솔직히 이런 곳에서 마주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지만, 저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서경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30분 정도를 날아 '달빛주점'이라는 굴뚝이 가득한 건물에 도착했습니다. 사방에 톱니바퀴와 커다란 시계탑이 있어서 건물만큼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굴뚝에서 나오는 안개가 건물을 덮어 신비로운 데다 온갖 현란한 차림을 한 동물들이 앞다투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그녀가 속삭였습니다.


KakaoTalk_20250118_182128594.jpg 높다란 달빛주점이 반짝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누가 말을 걸면 이 훈장을 보여주세요.'


'진짜 존댓말 쓰지 말라고 했는데도. 왜 드라마 주인공처럼 굴고 그러냐.'


서경은 제 말을 상큼하게 씹으며 날개 달린 강남구 로고를 보여주었지요. 그건 금빛으로 반짝였습니다. 조금 멋있기는 했습니다. 밋밋한 강남 로고보다 훨씬 고풍스러웠죠.


저는 그녀를 따라 홀로 나아갔습니다. 서경은 가게 입구에서 잔을 두 개 주문한 뒤에 하나를 저에게도 주었습니다. 하나 잔은 비어있었지요. 김이 그걸 창문에 가져다 대자 달빛이 모여 은하수 같은 액체가 만들어졌습니다. 안에는 반짝이는 젤리가 가득하고 살얼음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게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습니다. 마침 옆에 있던 퓨마 하나가 말을 걸었습니다.


'좋은 밤이야 친구. 그건 이 주점 최고의 베스트셀러, 루나지. 평생 물 입에 한번 안 댄 사람도 그걸 마시면 애주가로 변한다더군. 자, 건배'


그는 혼자서 건배한 뒤 한잔을 쭉 들이켰습니다. 아,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입에 잔을 대려고 하자 서경이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구석에 만취한 주머니쥐들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쥐들은 좀 한심해 보였습니다.


'마시는 척만 하고 취하지는 마세요. 여기서 취하면 답이 없어요'


KakaoTalk_20250118_143027157.jpg 샹들리에가 주점 입구는 마치 고급호텔처럼 화려했다.


서경은 주방 뒤 창고를 저를 데려갔습니다. 가기 직전에 독수리 한 마리가 저를 유심히 쳐다보아 죽는 줄 알았죠. 그 독수리는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유유히 뒷문으로 사라졌습니다. 다행히 그녀가 저를 잡아 끄느라 오래 마주치지는 않았습니다. 서경이 유리병 몇 개를 옮기자 벽이 사라지면서 출입구가 나타났는데 들어가자마자 그 입구가 사리지고, 저와 그녀도 다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이제 한숨 놓았다는 듯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도착이야! 많이 놀랐지?'


'오랜만이노! 나도 여기로 끌려왔다'


제임스가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습니다. 제임스 역시 여우의 모습이었습니다.


'넌 어떻게 여기로 온 거야?'


'원할머니 보쌈 먹고 집에 가고 있응께 갑자기 맨홀에 빠졌다잉. 정신 차리고 보니 이 주점인지 뭔지로 왔다'


제임스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오랜만이야! 너희들도 여기로 올 줄 몰랐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너처럼 예상치 못하기 여기로 오게 된 거야. 우리가 사는 곳이랑 이름만 같지, 전혀 다른 세상이거든'


'아, 설명 그만하고 빨리 돌려보내달라'


서경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에게 안경을 쓴 한 중년의 남성을 소개했습니다.


'점장님이야. 현실 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여기로 데려오시고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 주시지. 네가 처음 여기로 왔을 때 여우로 변장시켜 준 것도 점장님이야.'


그랬군요. 이곳에서 힘을 쓴 덕분에 여우로 변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아니었으면 공무원들에게 얄짤 없이 바로 체포되었을 겁니다. 결국 체포되기는 했지만.


'환영하네, 친구. 나도 한때는 현실에서 일했던 공무원이었지. 그런데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이 세계로 오게 되었네. 여기는 모든 게 우리 세계와 같지만 조금 달라. 자네도 보았지?'


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밖에 있는 사람들도 - 물론 몇몇은 변장을 하고 있지만 - 사실 우리 세계에서 넘어온 걸세. 한데 점차 동화되어 원래 누구인지, 원래 세계에서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네.'


전 그에게 여기 모인 사람들은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달을 가리켰습니다.


'이 달빛으로 만든 술을 마시면 예전 세계의 기억을 유지할 수 있지. 하지만 조심해야 해. 만약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바로 기억을 제거당할 테니까'.


'누가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하노?'


제임스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시황실에서. 우리 세계에서 살 곳을 찾아 도망친 동물들과 이곳에 살던 둥물들이 합하여 다스리고 있지. 그들은 늘 인간 세계를 경계하고 있어. 언제 이곳마저 황폐화될지 모르니까 항상 경계하는 거야. 적어도 그들이 말하는 바로는 그래.'


'돌아갈 방법은 있나요?'


'없어. 아직까지는. 매년 달이 가장 어두운 날에 인간 세계로 가는 기차가 한 편 있기는 하네만 그건 시정부 직속이 아니면 탈 수 없어. 우리 중 아무도 타 본 사람이 없지'


'거 진짜 무서워 죽겠노'


그는 낙심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지요. 저는 이곳에서 일을 찾을 때까지 서경과 당분간 같이 지내기로 했습니다. 점장님이 유리병에 담긴 걸 마시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제복 입은 호랑이로 변했습니다. 달빛주점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사자, 독수리, 까치 등 각자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직업도 다양했습니다. 구 사무소 공무원, 경찰, 심지어 변호사도 있었습니다. 달빛주점의 점장님 역시 이런 변장한 동물이었지요. 저는 조용히 서경을 따라나섰습니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말이 많더니 이곳에서는 조용했습니다.


'우리 이제 우짜노. 오스트리아 사는 우리 할머니한테도 연락도 못했는데 난 이제 끝장이다.'


'우리가 사라진 걸 그 까치가 알면 잡으러 오지 않을까?'


제가 물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달빛으로 가짜를 만들어 두었다고 답했습니다. 우리는 한참을 걸어 그녀의 집에 도착했지요. 별빛 페인트를 발라 아름다웠던 2층 집이었습니다. 변장을 잘 한 모양인지 이미 이 다른 세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2층 방으로 올려 보내며 내일 할 일이 있으니 어서 자라고 했습니다. 저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태산이었지만, 몸 무리한 탓인지 금방 잠이 들었습니다. 잠들기 전에 이 모든 일이 꿈이라고, 일어나면 집으로 돌아가 다현과 카페에 갈 거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다현이 보고 싶었는지, 다현이 아무리 이상한 친구여도 이런 상황에 놓이니 괜히 그리워졌습니다.


'제발.. 꿈이어라!'


-다음 화의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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