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가 말해주는 태도의 힘
보이지 않는 뿌리의 힘
울창한 숲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나무가 튼튼하게 자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던 곳이었습니다. 그 숲에는 늙은 정원사가 살았습니다. 그는 눈에 띄는 화려한 꽃을 심기보다 병든 가지를 쳐내고, 땅속 깊은 뿌리에 물을 주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발소리를 죽여가며 일했기에 사람들은 정원사의 존재를 잊고 지냈습니다.
어느 겨울, 정원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숲에 기이한 변화가 닥쳤습니다. 봄이 와도 꽃잎은 빛깔을 잃었고, 윤기 흐르던 나뭇잎은 메말라 바스러졌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숲이 저절로 아름다웠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노인의 거친 손이 이 풍경을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정원이 잃어버린 것은 노동력 그 이상인 ‘애정’이었습니다. 마음이 빠져나간 자리는 결국 스스로 허물어지는 법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자리도 매한가지입니다. 누군가 자리를 비웠을 때 휑한 냉기가 도는 곳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며 주변 공기가 밝아지는 곳이 있습니다.
고백건대, 저 역시 젊은 날에는 무대 중앙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습니다. 배경이 되는 조연은 마다하고, 오직 조명 아래서 박수를 받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알겠습니다. 꽃은 언젠가 지지만, 그 꽃을 피워낸 흙은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신이라는 대지는 타인에게 어떤 공간입니까. 생명이 깊게 뿌리내릴 수 있는 비옥한 밭인지, 혹여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로 남아 있지는 않은지 조용히 마음을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실체를 마주하려면 사회적 지위라는 두꺼운 포장을 걷어내야 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곁에 머물 때보다 그가 떠난 뒤의 빈자리에서 더욱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겉모습이 화려한 시대입니다. 값비싼 옷차림, 유려한 말솜씨, 번듯한 직함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곤 합니다. 서점에는 호감을 사는 기술을 다룬 책들이 넘쳐납니다. 허나 포장지가 아무리 고와도 내용물이 상했다면, 뜯는 순간 본질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언젠가 평판이 좋기로 유명한 기업 대표와 동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늘 정돈된 옷차림에, 상대를 배려하는 화법을 구사했습니다. 낮은 목소리와 정제된 어휘는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어른이다." 저는 속으로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호텔 로비를 나서는 순간, 그 믿음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대리 주차를 맡긴 차가 예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하고 그는 돌변했습니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주차 요원을 향해 삿대질하며 거친 말을 쏟아냈습니다.
"일 처리를 왜 이따위로 해!"
상대는 그보다 연배가 높아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주차 요원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데도, 그는 차 문을 거칠게 닫으며 짧게 혀를 찼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운전석에 앉은 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 다시 온화함을 띠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여기 서비스가 영 엉망이군요."
그 이중적인 태도가 그의 진짜 얼굴이었습니다. 자신보다 힘이 약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그 사람의 바닥입니다.
평온한 날에는 누구나 신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격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튀어나옵니다. 타인은 당신의 유창한 논리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곤란한 상황에서 보여준 눈빛, 아랫사람을 대하는 사소한 순간을 기억합니다.
품격은 가장 편안한 순간보다 가장 불편한 순간에 비로소 그 윤곽을 드러냅니다.
폭력은 주먹을 휘둘러야만 성립하지 않습니다. 점잖은 척하며 상대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행위가 더 잔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존재를 지우는 시선’입니다.
부끄러운 과거 하나를 꺼내봅니다. 팀장으로 일하던 시절, 유독 마음에 차지 않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소리치거나 화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더 교묘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회의 때 그가 의견을 내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3초간 빤히 응시했습니다. 그러고는 못 들은 척 다른 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한 셈입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차가운 정적이 고함보다 더 깊고 서늘하게 그 친구의 마음을 할퀴고 있었다는 것을요. "너는 대꾸할 가치조차 없어." 이 무언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비참해집니다. 훗날 그가 회사를 떠나며 저를 바라보던 공허한 눈빛이 아직도 가슴에 가시처럼 박혀 있습니다.
약자를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닥을 닦는 분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 걸레질 위를 구두 굽으로 밟고 지나가는 일. 배달 기사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고 퉁명스럽게 소리치는 목소리.
본인은 "바빠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 변명하겠지만, 상대의 눈에는 그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으로 보일 따름입니다. 혹시 나의 안락함을 위해 누군가의 존엄을 짓밟고 있지는 않은지, 매일 거울을 보듯 마음을 닦아봐야 합니다.
무례함은 강함을 드러내는 방식이 되지 못합니다. 마음속 여유가 사라졌다는 조용한 신호일 뿐입니다.
말실수는 진심 어린 사과로 씻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행동으로 굳어진 앙금은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귀로 듣는 말과 달리, 태도는 온몸의 감각으로 각인되기 때문입니다.
오랜 인연이 갈라지는 풍경을 봅니다. 결정적인 사건 하나 때문인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어긋남이 겹겹이 쌓여 무너지는 경우가 훨씬 흔합니다. 아내가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하는데 남편이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며 시선을 딴 곳에 둘 때. 남편이 고단함을 토로하는데 아내가 한숨을 쉬며 등을 돌릴 때.
이런 짧은 장면들이 상대방의 기억 속에 사진처럼 인화되어 차곡차곡 저장됩니다.
한 번의 무시는 입김에 날아가는 먼지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매일 반복되면 딱딱한 돌덩이가 됩니다. 한번 굳어버린 감정은 웬만한 호의로는 녹지 않습니다. 이미 신뢰의 지반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면, 그 위에서 관계라는 탑이 다시 세워지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상대의 노력을 가볍게 여기는 시선은 위험합니다. 밤새 쓴 글을 툭 던지거나, 정성껏 차린 식사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는 것. 이는 상대가 쏟은 시간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내가 무심코 낸 짜증, 거칠게 닫은 방문 소리가 집안의 공기를 오염시킵니다. 그 날카로운 파편에 맞은 마음에는 지워지지 않는 멍이 듭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타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무심코 먼지를 쌓기도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먼지를 닦아내는 용기’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과를 패배라고 여깁니다. 먼저 고개를 숙이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허나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내면이 단단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입니다.
굳어버린 관계를 다시 흐르게 만드는 힘은 변명이 아닌, “미안합니다”라는 담백한 한마디에서 시작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오늘 당신이 건네는 진심 어린 사과가, 시들어가는 관계의 뿌리를 다시 살리는 물길이 될 것입니다.
"저 사람은 천성이 착해", "난 원래 성격이 이래". 흔히들 하는 이 말은 변명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천사의 얼굴을 하기도 하고, 냉혹한 얼굴을 하기도 합니다. 훌륭한 인품은 결점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나쁜 쪽으로 흐르려는 자신을 끊임없이 '붙잡아 세우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고귀함은 특별한 능력이 아닙니다. 매 순간 마주하는 선택의 결과입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때, 잠시 숨을 고르고 말할까 아니면 감정을 쏟아낼까. 실수를 저질렀을 때, 정중히 고개를 숙일까 아니면 남 탓할 구실을 찾을까. 타인의 성취 앞에서 질투할까 아니면 진심으로 손뼉 칠까.
이 작은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발을 내디디느냐가 내 인격의 지도를 그립니다.
배려 없는 언행은 대개 게으름에서 비롯됩니다. 내 기분대로 행동하는 것이 가장 편하니까요. 타인을 살피는 일은 번거롭고 때로는 버겁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단련하는 과정은 근력 운동처럼 꾸준함을 요구합니다. 가만히 두면 자꾸만 중력을 따라 밑으로 처지기에, 의지라는 힘으로 부단히 끌어올려야 합니다.
오늘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어떠셨나요? 뒤따라오는 이를 위해 '열림' 버튼을 눌러주셨나요, 아니면 모른 척 '닫힘' 버튼을 눌렀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그 사소한 손짓 하나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줍니다.
태도는 결국 내가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나의 윤곽입니다.
장례식장은 고인을 떠나보내는 자리지만, 동시에 남은 이들이 모여 한 사람의 생애를 결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영정 사진 앞에서는 모두가 고개를 숙이지만, 식사를 하며 나누는 대화 속에 '숨겨진 성적표'가 드러납니다.
어떤 빈소는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가득합니다. "그 형님 덕분에 내가 견뎠어.", "참 다정한 분이었는데 너무 일찍 가셨어." 붉어진 눈시울로 술잔을 기울이는 이가 많습니다. 반면 어떤 곳은 화환만 요란하고 공기는 차갑습니다. 조문객들은 고인의 삶을 이야기하기보다 주식이나 골프 이야기를 나눕니다. 심지어 냉소적인 말들이 오가기도 합니다.
남는 유산은 통장의 숫자보다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나의 다정함’입니다. 생전에는 지위나 권력이 고개를 숙이게 만들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힘은 금세 사라집니다. 결국 남는 것은 그 사람이 품었던 마음의 깊이입니다.
진실은 언제나 뒤늦게 도착합니다. 생전에는 보이지 않던 인격의 실체가 죽음이라는 거울 앞에서 투명하게 비칩니다. 연락처 목록에서 내 번호를 차마 지우지 못하고 망설이게 만드는 힘. 그것이야말로 내가 잘 살았다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가지만, 누군가에게 건넨 따뜻함만은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겨둡니다.
견고해 보이는 다리도 거대한 충격 한 방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콘크리트 사이 미세한 틈으로 빗물이 스며듭니다. 그 물은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조용히 균열을 벌려놓습니다. 결국 다리는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고 맙니다. 공학에서는 이를 '피로 파괴'라고 부릅니다.
사람 사이도 이 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배신 같은 큰 사건보다 '사소한 실망'이 누적되어 무너집니다.
약속 시간을 매번 조금씩 늦는 것. 빌린 돈을 갚는 날짜를 하루 이틀 미루는 것. "우리끼리 얘긴데"라며 타인의 비밀을 가볍게 옮기는 입.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어갑니다. 하지만 이해심이라는 그릇도 바닥이 있습니다. 그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 인연은 돌이킬 수 없이 끝납니다.
특히 '작은 약속'을 어기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말로는 무엇이든 해줄 것처럼 하면서 정작 사소한 실천도 하지 않는 사람. 우리는 그런 이에게서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믿음이 싹틀 자리는 없습니다.
깨진 그릇은 붙여도 금이 남습니다. 신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너뜨리는 건 한순간이지만, 쌓는 건 평생입니다. 이를 잊는 순간, 우리는 고립된 섬이 됩니다.
능력은 유행을 탑니다. 젊은 날의 패기, 번뜩이는 아이디어, 최신 기술... 시간이 흐르면 빛바래거나 새로운 것으로 대체됩니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절대 낡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삶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성실함, 겸손함,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 끝까지 책임을 지는 끈기. 이러한 덕목은 시대를 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더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조직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존경받는 리더가 되는 이를 보면, 머리가 가장 비상한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즉 곁에 두고 싶은 사람입니다.
저도 사람을 볼 때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말을 유려하게 하는 사람을 뽑았다가 후회한 적이 있습니다. 반면 면접장을 나설 때 의자를 조용히 밀어 넣고 정리하는 사람, 동료가 칭찬받을 때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진국이었습니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문제를 잘 푸는 사람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사람입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궁금하신가요? 확인하는 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후배들이 나를 어려워합니까, 아니면 존중합니까? 내 주변에는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만 있는지, 아니면 쓴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사람들이 아쉬워하는지 확인해 볼 일입니다. 그 반응이 지금 내가 어떤 사람으로 서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기술은 사람을 유능하게 만들지만, 삶의 방식은 사람을 진정한 어른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영화처럼 길게 기억하지 않습니다. 딱 한 장면, 사진 한 장처럼 기억합니다. 강렬했던 순간의 표정 하나로 말이죠.
정말 힘들 때 어깨를 두드리며 웃어주던 선배의 담백한 미소. 큰 실수를 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괜찮다"며 눈을 맞춰주던 스승님의 인자한 주름. 반대로 도움이 절실할 때 차갑게 외면하던 친구의 무표정. 이 장면 하나가 그 사람의 전부로 각인됩니다.
우리는 관계를 개선하겠다며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곤 합니다. 하지만 감동은 물질보다 일상의 틈새에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건네는 눈인사, 내 말을 들어줄 때 끄덕이는 고개, 헤어질 때 흔들어주는 손.
지금 거울을 한번 보십시오. 미간을 찌푸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입꼬리가 처져 불만 가득해 보이지는 않은지 확인해 볼 일입니다. 그 표정이 바로 내면을 비추는 '창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창문을 통해 내 안으로 들어올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오늘 내가 지은 표정 하나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평생 남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표정은 당신의 마음이 밖으로 걸어 나온 얼굴입니다.
저녁이 내려앉으면 세상 모든 사물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웁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집니다. 우리는 인생의 낮 시간 동안 빛을 쫓느라 바빴습니다. 더 높은 곳, 더 환한 곳으로 달리느라 정작 내 등 뒤에 어떤 그림자가 생기는지 볼 틈이 없었습니다.
이제 잠시 멈춰서 발밑을 봅니다. 나의 그림자는 타인이 잠시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입니까, 아니면 햇볕을 가리고 성장을 방해하는 칙칙한 어둠입니까. 혹시 내가 지나온 길에 여린 풀꽃들이 밟혀 신음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게 됩니다.
언젠가 저도 제 삶이라는 정원에서 조용히 물러날 것입니다. 그때 남겨질 것은 제가 피웠던 화려한 꽃보다, 누군가 쉬어갈 수 있도록 내어준 그늘의 깊이일 테지요. 첫 장에 등장했던 그 조용한 정원사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무대에서 내려옵니다. 배우가 퇴장하고 나면 관객들은 그 배우의 연기보다 그가 남긴 '여운'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흔적을 남기지만, 모두가 그리운 기억을 남기진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것은 현란한 언변보다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뒷모습입니다.
차가운 비석에 새겨질 이름 석 자보다 중요한 건, 누군가의 심장에 새겨질 기억입니다. 부디 나의 그림자가 남을 덮치는 어둠이 되지 않고, 뜨거운 뙤약볕을 가려주는 넉넉한 나무 그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남겨진 넉넉한 그늘이 있다면, 그 자체가 내가 이 세상을 지나갔다는 가장 분명한 기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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