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박복한 년, 내 엄마

평화의 문턱에서

by 서강


새 집에 들어온 날, 엄마의 표정에는 오랜만에 안도라는 것이 스쳤다. 흙바닥 대신 나무 마루가 있었고, 비가 와도 처마 밑에서 웃으며 빨래를 널 수 있었다.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덜 매캐했고, 새벽마다 얼음장 같은 물을 긷지 않아도 되었다.


그 집에서의 하루는 오래된 꿈처럼 고요했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엄마는 저녁이면 된장국 냄새로 집안을 채웠다. 잠시나마 삶은 평탄해 보였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소식은 마치 천둥처럼 집안을 때렸고, 모두가 얼어붙었다. 남편을 잃은 엄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장례를 치르고, 남겨진 우리를 챙겼다.


아버지의 죽음은 할머니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이미 기력이 쇠해 있던 할머니는, 장례가 끝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병석에 눕더니 눈을 감았다.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상실감이 그 생을 무너뜨린 듯했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두 사람이 연달아 사라지자, 집 안 공기는 한순간에 무거워졌다. 마당에서 뛰놀던 발소리는 사라지고, 부엌의 밥 짓는 소리만이 적막을 깼다. 어쩌면 한편으로 엄마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는 마음도 든다. 외도하는 남편 대신, 남편의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삶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엄마는 이제 홀로 우리를 지켜야 했다. 어쩌면 그 순간, 엄마의 마음속 평화라는 단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를, 이겨내는 듯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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