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흰>을 읽고
(2021년 겨울의 기록)
눈이 많이 왔다.
나는 요즘, 말보다 고요가 많은 날을 살고 있다.
이 책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흰 것들’을 건넨다.
배냇저고리, 뼈, 파도, 백발, 수의...
작가는 하나의 색을 매만지듯, 흰색이라는 감각 위에 생과 죽음, 상실과 치유의 결을 겹쳐놓는다.
흰색은 흔히 순수함이나 평화의 이미지로 소비된다.
하지만 <흰>에서의 흰색은 무겁다.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읊조리는 작가의 언어는 가볍지만 절제되어 있고, 아름답지만 서늘하다.
각 장은 짧고 단정하다.
작가의 문장은 설명이 아닌 감각으로 남아, 독자가 자신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한 문장이 지나갈 때마다, 나는 어딘가 꿰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조용한 꿰맴 속에서 나를 읽고, 나를 덧붙였다.
책을 읽을 때는 단편 같았고, 덮고 나면 하나의 긴 문장처럼 남았다.
그 긴 문장은 말하지 못한 감정의 여백으로 이어지고, 그 여백은 다시 나를 향한다.
어쩌면 흰 여백이야말로 가장 많은 말을 담은 공간일지도 모른다.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내 마음의 하얀 여백 위에 적어보기로 했다.
그 여백은 결코 비어 있지 않았다.
내 안의 서늘한 고요, 말이 되지 않았던 감정들, 모두 이미 그 여백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흰색이 순수만을 뜻하지 않듯, 내 삶도 언제나 밝고 온전하지만은 않다.
때로는 내 마음의 ‘흰 여백’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여백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면,
그제야 비로소 다음 문장이, 다음 계절이 조용히 열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