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을 활짝 열고
게스트하우스의 마당에 들어서니 야단스런 바람이 요란하게 풍경을 흔들어대고 그 소리가 마당 가득 흩뿌려져 있다. 열쇠 없는 연두색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를 처음 맞이한 이는 호스트가 아니라 아리(갈냥)와 두리(검냥), 두 고양이다.
TV앞 작은 마루에서 나른하게 자다가 연두색 미닫이를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는 네 개의 눈동자가 끔뻑끔뻑하더니 '이제 왔니?' 하는 표정이다. 짐을 들여놓기 위해 내 방, 제주평강의 문을 열자, 두리가 쪼르르 따라 들어와 내 다리에 옆구리를 문지른다. 나는 침대에 앉아 잠시 두리의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그러자 새로운 손님을 독차지하게 둘 수 없다는 듯 아리가 날렵하게 침대 위로 튀어올라 내 옆에 착 붙어 앉는다. 이번엔 아리의 긴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다. 초면에 바로 몸을 맡기는 이 놀랍고도 빠른 관계의 진전. 여하튼 친화력이 남다른 이 두 고양이가 왠지 현지인 친구처럼 든든하다.
짐을 대충 들여놓고 접이식 우산만을 꺼내 들고서 오후 4시쯤 집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씨이싱~ 씨이싱~ 분다. 빗방울 한두 방울쯤은 맞을만하여 우산을 펴지 않은 채 집 뒤편 애월해안길을 걸었다.
활짝 열려있는 바다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의 촉감을 느껴본다. 해안길 오른편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왼편에는 돌무더기들이 어설픈 돌담마냥 굽이굽이 뻗어있다. 표지판이 하나 보이기에 읽어보니 성벽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쌓아 올린 것으로 조선시대에 왜구와 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지면서 환해장성을 지속적으로 보수하고 증축한 결과, 현제 제주도 해안마을에 19개의 환해장성이 있으며 애월 환해장성은 350m 정도 길이로 쌓은 현무암 성벽이 남아있다고 한다.
수많은 과거의 손들이 저 돌들을 옮겨와 쌓아 올렸을 테지. 지금은 한가롭고 평화로운 이곳이 한때는 전쟁터가 되었던 때가 있었겠지. 성벽 앞 비죽비죽 자라난 백년초 선인장의 뾰족한 가시에는 누구의 한이 서려있는 걸까. 돌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죽은 자들의 살았을 적 고되고 지난한 온기를 느껴본다.
20분쯤 걸었을까? 빗방울들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속도가 빨라진다. 비가 더 내릴 모양이다. 아! 태풍은 기어코 오는 건가? 1주일간의 휴가는 아리와 두리와 함께 나른하게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집으로 방향을 돌린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호스트, 아벨이 고양이를 품에 안고서 '오셨어요?'하고 인사를 한다.
사진에서 보이는 입구를 중심으로 큰 여행가방이 놓여있는 왼편 방의 이름은 인디고 췰드런(Indigo Children), 오른편은 제주평강이다. 서로 다른 맥락이 읽히는 방 이름의 어원이 신기하게 궁금하지 않았다. 평소 나 같았으면 무척 궁금해했을 텐데. 헐렁한 여행자를 작심한 나는 그저 뭐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인디고 췰드런 입구에 놓인 거대한 캐리어는 오늘 체크아웃한 게스트가 나중에 찾으러 올 거라고 한다. 오른편 제주평강의 문은 창호지가 너덜너덜 다 찢어져있는데 그 진짜 이유는 한밤중에 밝혀질 것이다.
아벨은 집의 이모저모를 소개했다. 100년이 넘은 한옥을 목수이기도 한 아벨이 손수 다 수리하고 개조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전기스위치는 선을 굳이 아래로 끌어내릴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모두 천정 가까이에 달아놓았다고 한다. 허나 오래된 집이라 천정이 낮아서 손이 쉽게 닿았다.
"쌀이랑 라면은 여기 있고, 냉장고에 김치도 있어요. 근처 마트에서 필요한 거 장 봐다가 해 드시면 돼요."
"저는 음식은 안 해 먹을 거라서요. 저 혼자니까 밖에서 사 먹을래요. 에어비앤비에 호스트님께서 소개해주신 음식점들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아, 네. 가보신 분들이 다 좋아하신 곳들이에요. 만족하실 거예요. 장기투숙객이시니까 빨래는 사용하신 수건이랑 바구니에 담아 놓으시면 세탁, 건조해서 갖다 드릴게요. 샤워하실 때, 온풍기 켜놓고 하시면 따뜻할 거예요. 더 궁금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편히 쉬세요."
"네."
"참, 태풍 소식 때문에 옆방 투숙객들이 내일부터 5일간 모두 예약을 취소했어요. 은영님이 가시기 하루 전날 예약이 있네요. 그러니까 진짜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내시면 돼요."
아벨은 내 속도 모르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집을 나섰다. 잠금장치 하나 없는 이 숙소에 6일간 나 혼자 지내야 한다니까, 낡은 한옥과 풍경소리는 더 이상 고풍스럽지 않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갑자기 허기가 진다. 든든한 밥을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