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어떤 목적 없이 홀로 여행을 떠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깝든 멀든 거주지를 벗어나 어딘가를 갈 때는 항상 목적이 있었다. 누구를 만난다든가, 뭘 본다든가, 일이 있다든가, 가족휴가라든가.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그런 목적이 없었다. 굳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오로지 하나, 나만 배려할 것! 나만 배려하려면 나 홀로 여행이어야 하는 거고. 그러면 누구랑 의논할 것 없이, 그저 나 하고 싶은 대로 다 결정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나는 네 명의 자녀가 있는 유부녀이므로 남편의 동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 내 빈자리를 남편이 다 채워야 하니 말이다.
"여보, 나 여행 가고 싶어."
"어디로?"
"아직 정하진 않았는데, 혼자 가고 싶어."
"얼마나?"
"1주일 정도?"
"그래. 다녀와."
남편은 선선히 다녀오라고 했다. 당연히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그때가 8월 중순이었는데, 10월 달력을 넘기자1일, 3일, 9일이 빨간 날!딱 좋았다. 그 즉시 일정을 10월 1일부터 8일까지 정했다. 매주 화요일 일정을 비워둔 나는 단 3일만 휴가를 내면 되었다. 처음에는 가까운 외국을 검색하다가 이동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낯선 현지를 익히는데 시간과 에너지를허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국내로 눈길을 돌렸다. 익숙지 않으면서 동시에 낯설지도 않은, 어쩌면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은 어디일까? 내게는 제주였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시작으로 이제껏 8번, 총 4개월여의 시간을 보낸 곳이지만 제주는 갈 때마다 새롭고 신비로웠다. 그래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이다. 목적지를 정한 후, 바로 왕복 비행 편을 예약했다.
이제 남은 건, 숙소였다. 에어비앤비를 통해서 게스트하우스를 알아보았다. 깔끔한 1인실에 비용이 저렴한 숙소들이 많았다. 다들 비슷한 구조였는데 그중 유독 개성이 강한 애월읍 숙소가 하나 있었다. <제주평강>이라는 이름도 마음에 쏙 들었다. 이것저것 서로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것 같은 소품들이 여기저기 다소 어지럽게 배치된 숙소였는데 뭔가 묘한 끌림이 있었다. 무엇보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호스트와 숙소에 대해 남긴 일관성 있는 후기와 평점이 신뢰를 더해주었다. 7박을 모두 예약했다. 이번 여행은 관광이 아닌 나만 배려하는 쉼이므로 이동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 숙소에는 어떤 잠금장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문을 잠글 수 없는 집이 안전할까? 나는 한 번도 문을 잠그지 않은 채 잠든 적이 없는데... 하루하루 여행을 기다리면서 몇 번이고 숙소를 바꾸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중에는 젊은 여성들도 많았고 그들 가운데 누구도 잠금장치가 없는 것에 대해 문제가 된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막연한 두려움을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며칠 후면 떠나는 날이 다가왔을 때, 태풍 소식이 들려왔다. 날씨앱을 보니 제주도 여행기간 내내 비가 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태풍으로 제주도 결항을 몇 번 경험했던 나는, 결항에 대한 염려도 있었지만, 1주일 내내 비가 오면 힐링은커녕 우울에 허덕일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나! 나는 어딜 가나 여행지에서 날씨운이 따랐으므로 그 운빨을 마냥 믿어보기로 했다. 제발 결항만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드디어 여행 당일, 남편과 막내딸이 광주공항까지 배웅을 해줬다. 공항에 도착하자,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고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어대서 나뭇잎들이 허공을 빙빙 돌았다. 마음이 심란했지만 결항문자는 없었으니 출발하겠지... 바람대로 비행기는 출발했고 제주에 도착했다. 제주는 10월인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후덥지근했다.
아! 짙은 회색 하늘이 곧 올 비바람을 예견하는구나. 그래. 아직 비가 내리지 않은 게 다행이지. 제발 숙소까지만 기다려다오.
나는 102번 버스를 타고 40분 만에 애월환승정류장에서 내려 숙소까지 5분을 걸었다. 열쇠 없는 숙소에 문을 열고 들어오니 비가 한두 방울 내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