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밥을 먹을지 정하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바람이 들이치는 방향 따라 우산이 뒤집히지 않도록 우산 손잡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휘청휘청 걷는다. 100미터쯤 걸어 나오니 찻길이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좌우를 살피는 찰나 우산이 홱 뒤집힌다. 재빨리 우산을 바람의 역방향으로 돌려 다시 뒤집어놓고 횡단보도 건너편 바로 앞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날씨 때문인지 손님이 없다. 잔나비의 <가을밤에 든 생각>이 들려온다. 나는 입구 왼편 창가에 바짝 붙은 2인용 테이블에 앉아 낙지 덮밥을 시켰다.
"에어컨 켜드릴까요?"
주인 언니가 물었다. 10월 첫날인데도 태풍의 영향으로 가게 안은 습하고 약간 후덥지근했다.
"아니, 괜찮아요."
잔나비의 다른 곡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하여>가 뒤를 잇는다. 최유리의 <숲>도 나오고 그 뒤로도 잔나비의 다른 곡들이 흘러나온다. 이건 완전 나의 플레이 리스트다. 밥을 기다리면서 격자무늬 유리창을 내다보았다. 투명한 빗방울 구슬들이 올망졸망 맺혀있다. 그 위로 글과 그림들이 보인다.
내가 사랑한 제주, 지금 여기서 행복하자
나처럼 제주를 참 사랑하는 분인가 보다. 딱 내 마음이다. 바다로 뛰어든 잠수부 그림 옆에는 '물꾸럭'이란 글자가 있는데 검색해 보니 '문어'라는 뜻의 제주방언이다. 문어를 잡으러 가는 해녀구나. 밥을 내오는 언니에게 물었다.
"잔나비 좋아하시나 봐요. 저도 잔나비 좋아해요."
"아! 그래요? 저 진짜 좋아해요. 요즘엔 <Pony>를 제일 좋아해요."
하이톤의 상냥한 부산 사투리다. 그리고는 <Pony>를 틀어준다.
"저도 그 노래 들어봤어요. 저는 <가을밤에 든 생각>을 제일 좋아해요. 잔나비는 노래가 시적이라 사실 다 좋아요."
잔나비를 시작으로 우리는 유리창에 그려진 그림부터 제주도에 오게 된 사연까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가게 맞은편 파란 돌담집
흰 펜으로 그려진 아기자기한 돌담집은 격자무늬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지붕 돌담집을 주인언니가 그린 것이다. 가계 여는 날, 파란 지붕 돌담집 할머니가 손수 들고 오신 늙은 호박 두 덩이가 달덩이처럼 지붕 위에 떠있다. 이 가게에 호박이 넝쿨째 들어오길 바라는 할머니의 복을 비는 마음이 담긴 선물이다. 늙은 호박 두 덩이에 복을 비는 마음과 그것을 짐짝처럼 취급하지 않고 소중히 대하는 마음이 참 따스하다. 그림 옆 작은 나무판에 쓰인 가게 이름 '애월 소랑 '은 개업을 축하하는 친구의 선물이다. 제주 바다로 떠밀려온 손바닥만 한 구름 모양의 유목에 친구가 동백꽃과 함께 그려 넣은 것이다.
소랑은 '사랑'이라는 말이다. 제주방언에는 아래아(ㆍ) 모음소리가 남아있어서 딸은 '똘', 사랑은 '소랑'이라고 발음한단다. 제주시 애월리 '애월 소랑'에는 제주를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 부산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3년간 제주를 만끽하다가 제주를 진짜 즐기려면 제주에서의 수입원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1년 전부터 시작한 애월 소랑. 둘 중 누구라도 '이제 제주를 뜰까?' 운을 떼면 '응'할 준비가 되었건만 그런 날이 언제 오긴 할지 모르겠단다.
'애월 소랑'은 제주 애월을 사랑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작은 사랑의 공간이다. 제주를 사랑하는 나는 애월에 도착한 첫날, 태풍의 영향권이라는 아쉬움을 잠시 달랠 사랑을 느낀다. 따뜻한 밥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