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숙소 인근 내 구역, 애월읍내를 돌았으니 오후에는 영역을 살짝 넓히기로 했다. 동네 한 바퀴를 돌며 가까이에 보였던 낮은 봉우리, 고내봉에 가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오전 일정의 동행이었던 여행자에게 점심을 사주고 사려니 숲길로 간다기에 가는 길에 고내봉 주변에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고내봉이 잘 보이는 대로변에 내려서 오르막길에 놓여진 포장도로를 올라갔다. 오른편 좁고 얕은 천으로 뻗은 바싹 마른 가지 위에 내려앉은 고추잠자리가 말린 태양초처럼 새빨갏다. 왼편에 작은 산길 입구가 보인다. 안내자가 없는 작은 봉우리라 그런지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시야가 가려지는 좁은 입구가 괜시리 꺼려진다.
'갈까 말까...' 초입부터 망설여지는 이 마음. 올라가다가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나. 동네 뒷산을 가다가 변을 당한 여성들의 수많은 뉴스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번도 혼자 산행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진정한 고민에 빠졌다. 결국.
'이렇게 화창하고 밝은 대낮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게 말이 되겠어? 일단 왔으니 가보자.'
좁은 입구를 지나자마자 하늘이 활짝 열리고 나무계단이 맑은 날씨처럼 경쾌하게 뻗어있다. 5분이 채 되지 않아 나무 울타리 너머로 바다와 도시의 일부가 보인다.
고내봉 초입에서 보이는 애월읍
'아름답다.'
멈춰선 자리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 찰나, 한 50대 남성이 성큼성큼 나를 가로지르며 올라갔다. 그런데 그 남성이 가다 말고 전방 20여미터 앞에 멈추지 않는가. 그 남성 입장에서는 몹시 불쾌하겠지만 내 걱정은 더 구체화되었고 만약의 상황에 대피하기 위한 연락책을 물색했다. 남편을 시작으로 엄마, 동생, 친구들 여러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다들 바쁜 용무가 있었다. 고내봉 정상까지 같이 통화를 해줄 사람이 없었다. 남자는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계속 올라갔고 나는 끝내 내려가는 길을 선택했다.
이렇게 화창한 날, 나는 머릿속 범죄 스릴러물에 잠식된 것이다. 일종의 패배감을 느끼며 터덜터덜 내려와 대로를 건너고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저 멀리 파란 하늘을 만난 바다가 청록색으로 출렁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방금 전 패배감을 어느 정도 날려주었다.
그 순간 왼편으로 보이는 이름모를 아름다운 2층 건물이 내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만한 공간이었다. 벽면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 사이로 넓은 창처럼 열려있는 1층 공간에 나무 한 그루가 지붕을 뚫고 위로 솟아나와 있었다. 멀리서보면 건물을 뒤덮고 있는 초록이 나무인지 담쟁이인지 알 수가 없을만큼 초록으로 무성했다. 처마처럼 덧대어진 1층 지붕을 견고하게 받치기 위해 나무 기둥을 세워두었는데 마치 캣타워처럼 보였다. 지붕 위에 노니는 노랑무늬 고양이 한 마리를 보니 다른 시공간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당을 쓸고 있는 여자분이 집주인인가 싶어 말을 걸었다.
"집이 정말 아름답네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아요."
"아, 고맙습니다. 근데 가게예요."
"무슨 가계예요?"
가게라면 내부의 접근성이 더 용이하므로 반가운 마음에 물었다.
"LP바예요."
"지금 들어가볼 수 있어요?"
"아니요, 6시부터 영업이에요."
"아, 오늘은 어렵겠네요."
"다음에 꼭 오세요."
주인에게 부탁해서 가게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이 아름다운 배경의 일부분이 되고 싶은 욕심이 났으므로. 이 가게는 훗날 집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친구들과 함께 다시 찾았다. 그때 더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가게를 지나 해안길로 나왔고 지도앱을 켜니 왼쪽으로 2킬로미터를 쭉 걸으면 내 숙소였다. 애월해안길을 쭉 따라 걸으면서 정자에 앉아 한참파도를 바라보았다. 얼마전에 쓴 <파란 접시>라는 시를 연상하며 애틋한 마음을 갖기도 했다. 그 시는 브런치스토리에 처음 올린 시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옆에 커다란 바위 위에 해파랑길이라는 작은 돌멩이 이정표를 만났다. 큰 바위 위에 누워있는 작고 납작한 돌멩이어서 차로 지나가면 절대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걷는 여행에는 이런 작은 묘미가 있다. 나태주시인의 풀꽃시처럼 자세히, 오래 응시하고 예쁨을 발견한다. 더 깊이 더 낮은 곳까지 속속들이 볼 수 있다.
이제 40대 후반의 끄트머리에 도달하니 다른 사람들의 속도에 영향받지 않는다. 내 호흡을 유지해줄 속도를 지킬 수 있으며 소유보다 사유의 힘을 더 믿게 되었다. 30여분이면 올 거리를 여기저기 한참 멈추어 보다 보니 몇 배의 시간이 더 걸렸다. 하지만 상관없다. 무작정의 발견이 이 여행의 목적이므로.
저녁에 한담해변의 노을을 보기 위해 잠깐 휴식을 취하러 집에 들렀다. 아리와 두리는 그들만의 화평을 이루고 있다. 나는 간밤의 미운 마음은 뒤로 하고 잠시 그 화평의 일원이 되었다. 내가 좁은 마루에 자리를 잡자, 두리는 무릎으로 올라오고 아리는 옆에 착 자리를 잡았다. 언제나 두리가 더 적극적으로 자리를 선점하고 아리는 빈 자리로 가곤 한다. 나는 지금 초고속충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