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은 내 평생 몇 안 되는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바람이 흔들어대는 풍경소리가 한몫했지만 그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아군으로 믿었던 아리와 두리 떄문이었다.
잠들기 전, 내 방문을 살펴보니 나무격자무늬 문 위에 미닫이형 작은 잠금장치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문틀 위에 손이 들어올 정도로 넓은 틈이 있어서 문밖에서도 열 수 있는 구조였고 문이 워낙 헐렁해서 그저 무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심리적 안정을 위해 일단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웠다.
거실 불은 켜놓은 채 잠을 청하는데 얼마지 않아 두리가 '야옹, 야옹'하면서 격자문 창호지를 박박 긁어댔다. '에이, 모른 척하면 가겠지.'하고 아무 대꾸도 안 했는데 두리가 뛰어오르면서 창호지 문에 매달리려 했으나 쭉 미끄러지며 할퀴었다. 처음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 그래서 문 창호지가 너덜너덜했던 거구나.' 두리가 더 사납게 굴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문을 열어주었다. 그 순간 매복하고 있던 아리도 같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침대 위로 튀어 올라왔다.
예상밖의 그림이 연출되었다. 어쩌면 생명이 주는 안도감이 있겠지 하는 마음도 생겼다. 그런데... 고영이들이 야행성이지 않은가. 얘들이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악질을 하기도 하고 누워있는 날 뛰어넘어 다니는 바람에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새벽빛이 어슴푸레 밝아지는 때, 너무 피곤해서 한두시간 곯아떨어졌다가 잠이 깼다.
오늘은 일정이 있는데 이렇게 피곤한 몸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사실 제주에 오기 전에 에어비앤비를 통해 딱 1가지 예약해놓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마을 해설사와 산책하며 마을의 이곳저곳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내가 찍은 사진을 엽서에 수채화로 그려보는 체험이었다. 원래는 3일로 예약했다가 어제 제주에 도착했을 때 날씨앱을 확인하니 2일 오전에는 비가 안 오는 것으로 되어 있기에 호스트에게 연락해서 오늘 오전으로 바꾼 것이다.
아침은 챙겨온 선식으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일단 약속 장소인 애월 버스승강장으로 갔다. 나와 다른 참여자가 1명 더 있었다. 우리는 마을 해설사인 수연님의 설명을 들으며 애월 골목 이곳저곳을 돌았다. 신기하게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도리어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연을 둘러보니 내 몸에 맑은 에너지가 채워졌다
내 수채화의 주인공 팽나무
제주의 밭담
제주의 밭담은 제주에 많고 많은 돌들을 밭에서 골라내어 처리하는 방법으로 밭 둘레를 빙 둘러 담을 쌓았는데, 막상 세워놓고 보니, 제주의 드센 바람을 막아주고 밭의 경계를 구분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애월 초등학교 정문 옆 애월진성
애월초 정문 오른편에 애월진성의 일부가 보인다. 학교가 파하면 신이 나서 경사면을 마구 뛰어내려오는 아이들이 종종 사고가 발생해 사고를 막기 위해 만들어놓은 돌담이 중앙에 위치해 있다. 일종의 방지턱인 셈이다.^^
애월진성
어제 애월해안길에도 애월 환해장성이 있었는데 여기도 성벽이 있다. 수많은 침략에 대비해야 했을 애환이 느껴진다.
하물
장공물(장군물)
하물과 장공물은 애월리의 용천수이다. 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여름철 마을 주민들의 목욕탕이자 아이들의 물놀이터이기도 하였다. 장공물은 남성들이 하물은 여성들이 사용하도록 구분하였다.
뱃사람들의 무사안녕을 빌었던 해신당
애월항
수연님의 공방에 가서 엽서에 그림 그리기, 왜 나는 제주도에 가서 바다가 아니라 팽나무를 그렸을까...
애월 바다
애월(涯月)은 물가 '애(涯)' 달 '월(月)'이라는 뜻으로 해안선이 애월초등학교를 둘러싸고 바닷물이 초승달 형상으로 들어와 감싸는 모양이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름다웠던 해안가는 매립공사와 LNG항 건설 등으로 원형이 훼손되어 애월(涯月)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애월(涯月)이라는 이름은 내게 상당히 관념적으로 느껴졌다. 도무지 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애월(涯月)이라는 이름의 형상은 찾을 수 없어도 애월 해안과 바다는 보는 곳마다 절경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뭔가 애잔함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