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내게 분수령이 되는 해로 스스로 정했다. 그러다 보니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그려보며,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의도적인 고립과 육체적 도전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평온한 상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스치길 기대하며…
그래서 12화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 그 여정의 시작이었고 어쩌다 보니 혼자서, 둘이서, 셋이서 설산을 오르게 되었다.
한라산 윗세오름을 혼자 올랐다. 오백장군과 까마귀 휴게소 앞 윗세오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동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 장면 있지 않은가? 멋진 배경 속에 주인공의 눈은 왕방울만 해지고, 입은 벌어지며, 카메라 앵글이 빙글 돌며 주인공을 중심으로 세상이 회전하는 듯한 장면, 그와 함께 흐르는 감미로운 OST.
내가 그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와…”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는,
감탄사 하나로 모든 감정이 표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다. 혼자였으니까...
사진과 영상을 찍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공유해 보았지만 내가 느낀 감동은 데이터를 타고 제주도에서 서울로, 울산으로, 부산으로 가는 사이 휘발될 것 같았다.
실제로 보고, 직접 느낀 감동을 고스란히 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냥 오롯이 나 혼자 실컷 만끽하기로 했다. 너무 좋은 순간도, 숨이 차서 힘든 순간도 오롯이 내 템포대로 즐겼다. 더 오래 머물고 싶은 풍경에서는 뒷사람들이 지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충분히 즐겼다. 사진을 찍고, 눈으로 담고, 마음으로 새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내 안의 나와 대화하게 되었다. 평소 잊고 지내던 지인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들과의 추억, 나의 영광스러웠던 순간, 힘들었던 순간들이 스쳐 갔다.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
혼자였기 때문이었다.
설 연휴, 고향에 내려갔다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즉흥적으로 간월재 등산을 결정했다.
아버지와 단둘이 하는 등산이라니. 내 기억 속 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등산은 중학교 1~2학년 무렵이었으니 정말 오랜만이다. (그 당시 살던 아파트 뒷산에 오른 것이 마지막인 듯하다.)
보통 부자지간이라고 하면 말의 꼬리를 물어가며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것이 어렵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간월재를 향하는 차 안에서, 등산하는 내내, 4~5시간 동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나의 직장 이야기,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이야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들..
그러자 아버지도 본인의 젊은 시절, 고민과 선택들을 하나둘 꺼내셨다. 예전처럼 삶의 방향을 제시하며 설득하는 대화가 아니라 50:50으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대화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도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고, 아버지도 그만큼 나이가 드셨구나.
정상에 올라서서 보이는 눈 덮인 산봉우리들을 함께 바라보며 이 멋진 풍경을 아버지와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했다. 혼자 느낄 때보다 더 큰 감동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멋진 설산의 풍경 속에 있는 서로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멋진 풍경의 감동과 특별한 순간의 여운을 사진으로 잡아두는 행위는 서로를 강하게 지지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가장 예쁜 길 위에 가장 예쁜 구도로 상대를 놓고 사진을 여러 번 찍어주는 것은 그런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우연한 시간으로 즉흥적으로 떠난 아버지와 단둘이한 등산에서 평생 잊지 못할 추억과 사진을 남겼다.
설 연휴가 끝나고 가족들과 태국 여행을 다녀온 뒤 20년 지기 고향 친구 두 명과 함께 설악산을 오르기로 했다. 한 친구가 숙소를 예약했고, 한 차에 짐을 모두 싣고 강원도로 향했다. 차 안에서 새삼 이 순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다른 표현으로는 감회가 새로웠다.
중학생 때 만난 친구들이다.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다니던 우리가 이제는 각자의 차가 있고, 자기가 번 돈으로 숙소를 예약하고, 밥을 사 먹고, 운전해서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저 동네에서 만나 밥 한 끼 하며 소주 한잔할 때는 이 새삼스러운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강원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설악산 입구로 출발했다. 이렇게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체력 회복하는데 1-2일이 걸릴걸 알지만 당장은 도파민이 분비되어서 그런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지만 피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악산의 초입에 들어서서 칼바람을 맞자마자 친구들이 맘에도 없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10년 전 군 생활도 이렇게는 안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려가서 막걸리나 한잔하자."
"먼저 갔다 와라, 나는 밑에 있겠다."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웃겼다. 그 웃음의 힘으로 한 발 한 발 올라갔다.
워낙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들이라 서로 묵은 사연도 많고, 현재의 고민들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반대편 산봉우리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치 천하를 발아래 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멋진 풍경을 함께 바라보며 친구들의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길 진심으로 바랐다.
작년 여름, 이 친구들과 펜션에서 바비큐를 해 먹으며 놀았을 때, 펜션 사장님이 우리에게 와서 소주 한 잔을 청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젊음이 너~~~ 무 부럽다.”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을 경험하신 사장님의 속마음이 담겨 있었다.
언젠가 우리도 더 바빠지고, 더 소중한 인연들이 생기며 서로에게 소홀해질 수도 있겠지만 이날의 칼바람과 맞선 설악산 등반은 오래도록 기억될 또 하나의 소중한 안줏거리가 될 것이다.
우연히 즉흥적으로 시작된 등산이었지만 혼자서, 둘이서, 셋이서 경험한 각각의 순간들이 너무도 소중했다.
나 자신, 가족, 친구. 나를 둘러싼 거의 모든 관계 속에서 그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꼭 등산이 아니어도 좋다. 익숙한 관계의 사람과 조금은 특별한 공간에서 낯선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소중함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다.
지금 가장 머릿속에 강하게 떠오르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