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본가의 책장

by om maum

본가를 떠난 지 어느덧 15년이 지났다. 대학생, 군인, 임용고시생, 교사로서 다양한 신분으로 집을 떠나 있었다.

잠시잠시 방문했을 때는 부모님과 근황을 이야기하기 바빴고, 평소 먹지 못하던 정성스러운 집밥을 먹고 쉬기만 했다. 이번 긴 연휴 동안 여유롭게 집에 머물며 부모님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고 지난날을 추억하다가 방에 들어왔더니 침대 옆 책장이 나를 불러 세웠다. 질서 없이 꽂혀 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생 때 썼던 일기장, 즉흥적으로 샀던 책들, 누군가가 읽어보라고 추천해 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아, 이런 책도 내가 읽었었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꽤 많은 명작이 눈에 띄었다. 이 책들은 오랫동안 계속 책장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왜 이제야 눈에 들어왔을까? 책장 속 책들 중 나를 특별하게 추억하게 하는 책들을 소개하려 한다.


임용고시 공부할 때 봤던 책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임용고시 공부할 때 봤던 책들이었다. 책을 보니 노량진에서 고생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 입고 다녔던 편한 츄리닝, 먹었던 음식, 함께 공부했던 수험생들...

불확실한 미래와 힘든 하루하루였지만 그 속에서도 소소한 재미와 스릴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공부하다가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밥 먹으러 가는 길이 여행 가는 기분이었고, 제본하러 가는 길이 공부를 잠깐 쉴 수 있는 핑곗거리였다. 그리고 매주 모의고사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등수를 보며 매주 합격과 불합격의 기분을 간접적으로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생각하면 열정적으로 뭔가에 몰두하여 보낸 그 젊은 날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돌아가라고 하면 절대 안 갈 테지만!) 그리고 책 겉표지만 봐도 어렵게 이해하고 외웠던 개념들, 자신 있던 과목과 어려워했던 과목 등 간절하게 공부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열심히 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버린다는 것은 내가 했던 노력들을 같이 버리는듯한 기분이 들어서 한참을 망설였지만 앞으로도 참고할 수 있는 자료만 남겨두고 이제는 정리하려 한다. 또 다른 책으로 나를 채워갈 시기가 온 것이다.


책장이 증명하는 나의 길


지금의 내가 존재하기까지 기여한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철학, 인문학 등 문과적 성향의 책들이 주를 이루었다. 책을 읽으며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그러한 경험이 또 다른 책을 찾게 하고 새로운 탐색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읽었던 책 리스트를 보며 지금의 내가 존재하기까지 작은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고 서울집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이 미래의 나를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최근에 정말 감명 깊게 읽은 책에는 메모를 하거나 밑줄을 긋는 습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몇 번을 돌려본 후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생각을 따뜻하게 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감정을 그 사람도 각자의 방식으로 느끼기를 바라며…


악필로 남겨진 나의 성장 기록


삐뚤삐뚤한 나의 글씨. 정말 악필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악필을 고치기 위해 글씨 교정본을 사서 연습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때 일기장을 읽어보니, 그때의 내가 그대로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다. 일기장 속 초등학생의 나는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생 치고 꽤 낭만적이었고, 즉흥적인 면도 있었으며, 제법 반성적 사고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멋지고 따뜻한 생각을 했었구나 싶어 스스로 감탄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역시 어린아이다운 유치한 생각도 많았다.

그리고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일기가 모두 보관되어 있어서 내 사고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저학년 때의 일기는 단순히 하루의 기록이었다. 주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같은 사실들만 나열했다. 하지만 6학년 때의 일기에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물론 수준 높은 사고는 아니었지만 저학년 때와 비교했을 때 사고의 변화가 뚜렷하게 보였다. 악필로 남겨진 나의 일기장은 잊고 지내던 내 유년시절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



글이 주는 기억의 힘


사진을 남기는 것도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만 글로 남겨진 기억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글은 사진이나 영상처럼 뚜렷하게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할 수는 없지만 지나온 세월이 밀물과 썰물이 되어 기억이라는 큰 바위의 모양을 조금씩 바꾸는 듯하다. 글로 기억되는 우리의 기억은 살짝은 미화되기도 하고 흐릿해지기도 하며 그 순간을 더 낭만적으로 추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영상으로 정보를 흡수하는 것이 익숙해지고 그에 따라 문해력이 점점 낮아지는 시대에 활자로 나를 채우고 기록을 남기며 추억하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다.



keyword
이전 12화나에게로 떠나는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