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이야.
대한민국에서 신체 건강한 남성이라면 병역의 의무가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적정한 시기가 되면 반드시 가야만 한다.
20대의 나 역시 그 시기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입대를 앞두고 많은 고민이 들었다. 관악기를 전공한 나는 비교적 쉽게 군악대에 지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대학 캠퍼스에서 한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ROTC 학군장교 모집!"
장교. 어딘가 멋있어 보였다. 그 이후로 ROTC가 무엇인지 찾아보기 시작했고, 캠퍼스 내에서 제복을 입고 다니는 선배들의 모습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저거다!"
어차피 군대는 가야 할 곳.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었다.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배움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학군 53기로 지원하였다.
대학교 3, 4학년 동안 후보생 생활을 거쳐 2015년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광주 상무대에서 OBC 교육을 받았다. 같은 소위들과 함께 전투기술, 전략, 체력, 사격, 정신전력 등 육군 장교로서 갖춰야 할 자질을 배우고 익혔다. 교관님들께선 수시로 강조하셨다.
"오만 촉광에 빛나는 계급장을 단 여러분이 야전에 나가 창 끝 전투력 향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 말처럼 우리는 장교가 된 자부심을 가슴에 품고 야전에 투입되었다.
OBC 교육을 마치고 내가 배속된 부대로 첫 전입을 갔다. 대대장님과 중대장님들이 직접 나를 맞이해 주셨고 병사들의 경례 속에 부대에 들어섰다.
'첫인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기억하며, 너무 물렁하지도 지나치게 딱딱하지도 않은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무리 속에 녹아들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나는 소총 중대에서 소대장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는데, 실제 발령받은 곳은 81mm 박격포 중대였다.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박격포 중대에 부중대장이라는 보직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곳엔 중대장님과 나를 제외한 모든 간부가 베테랑 부사관들이었다. 실질적인 군 경험이 없는 젊은 초임 장교와, 계급은 낮지만 경력 많고 연륜 있는 부사관들 간에는 어색함과 미묘한 긴장감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계급장을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박격포 제원, 화기 조작법, 지휘통제에 이르기까지 병사와 다름없이 부사관들에게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함께 훈련을 하고, 찐한 회식의 횟수가 늘어가면서 점차 전우애가 생기고 관계가 돈독해졌다.
100명이 넘는 병사들을 통솔하면서 느낀 것도 많았다. 군대는 특정 기준 없이 건강한 20대라면 누구든 함께 동고동락하며 통제된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 그 다양한 배경의 병사들을 이끌고 무사히 전역시키는 과정을통해 사람에 대한 이해와 리더십이 자연스럽게 길러졌다. 전역한지 곧 10년이 다되어가지만 그 시절을 함께한 사람들과 아직까지 간혹 안부를 주고 받는 소중한 인연으로 남아있다.
OBC 시절 동복 유격장에서의 훈련은 정말 힘들었다. 우리나라 모든 장교가 거쳐가는 그 유격장은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시험하는 곳이다. 나 역시 훈련 도중 시야가 어두워지며 쓰러져 의무대로 실려간 적도 있다.
하지만 자대에 와서 병사들을 이끌고 유격장에 갔을 때는 그때의 경험 덕분에 자신감 있게 앞장서서 시범을 보일 수 있었고 특히, 산악 레펠을 병사들 앞에서 멋지게 내려올 수 있었던 순간은 지금도 자랑스러운 기억이다.
가장 큰 고비는 군단전투지휘검열이었다. 3성 장군이 부대의 전투준비 상태를 직접 평가하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훈련 중 하나였다. 그런데 훈련을 앞두고 중대장님이 부상을 입어 입원을 하게 되신 것이다...
그 순간부터 내가 4박 5일간 야외훈련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간부와 병사들 100여 명의 훈련준비, 전투 지휘, 식사 계획, 취침 등 하나하나를 내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실수 하나가 곧 중대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었기에 극도로 긴장한 나날이었다.
다행히 무사히 훈련을 마쳤다. 이후 간부들과 함께한 찐한 회식은 그 무엇보다 값진 보상이었고 내가 해내었다는 성공의 경험이 쌓인 순간이었다.
후보생 기간까지 포함해 30개월의 복무가 끝났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전역일.
당연히 후련하고 기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전역 신고를 하던 그날, 마음이 이상했다. 동고동락했던 간부들과 병사들을 떠나려니 아쉬움이 쓰나미처럼 일렁거리며 북받쳐 올랐다.
중대장님께 마지막 경례를 드리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병사들과 간부들이 위병소 앞까지 나와 배웅해 주었다. 훈련의 고통, 즐거웠던 에피소드, 수많은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김중위는 민간인으로 돌아왔다.
학군장교로서의 군 생활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다양한 배경의 병사들과 소통하며 이해와 공감의 폭이 넓어졌다. 지휘관 회의에서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려는지를 배웠고, 회의 내용을 부하 간부들이나 병사들에게 전달할 때 그들이 받아들이는 온도차가 확 다르다는 것도 느꼈다. 똑같은 현상도 어느 지위에서 바라보냐에 따라 그 사실에 대한 온도가 달라졌다. 그걸 적절히 잘 조절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순간들이었다.
신체적으로도 극한의 훈련을 통해 단련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잘 해냈다는 자부심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어떤 어려움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힘이 되었다.
ROTC 장교지원 할 당시 군대를 먼저 다녀온 대학 선배들이나 친구들이 '그걸 왜 하냐', '그냥 병사로 빨리 갔다 와라', '장교라 해도 일반 병사들이나 부사관에게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다‘ 등등 부정적인 말들이 많았지만 나는 꼭 경험해보고 싶었고, 그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 선택하라고 해도, 나는 주저 없이 ROTC 장교의 길을 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인생의 좌우명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수처작주입처개진'
'결자해지'
앞으로의 선택도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서 선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