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단과 횡단의 서막 (2)
천백 리 길 묵주기도 -
천백 리 길 묵주기도
시원찮은 다리로 먼길을 떠났다. 내 두 무릎에는 네 개의 흠집이 있다. 십여 년 전 연골이 파열되어 무릎에 구멍을 뚫고 내시경 시술을 한 자국이다. 발가락 뿌리 부위도 뼈가 튀어나와 이 또한 걸을 때 무척 아프다. 무지외반증으로 엄지발가락이 휘어졌다. 이런 시원찮은 다리로 목포에서 서울까지 천백 리 넘는 길을 걸었다.
국토종단 몇 년 전 일요일이었다. 장조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할머니가 이상해요.”
순간적으로 좋지 않은 느낌이 스쳤다.
“왜? 어떠시니?”
“빨리 내려오세요. 아버지 어머니도 오시는 중이에요.”
“돌아가셨니?”
“모르겠어요. 119도 불렀어요.”
아내와 함께 어머니가 계신 여주로 급히 차를 몰았다. 가는 도중 무거운 침묵 속에 자동차 소음만 크게 들렸다. 어제 오후에도 어머니와 통화했었다. 일곱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병약한 어머니를 내가 모시지 않은 게 늘 마음에 걸렸다. 제발 살아계시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대로 가신다면 모시지 않은 내 탓이라는 죄책감에 내 몸이 망가지더라고 저 멀리 아랫녘까지 터덜거리며 떠다니리라. 삼십 분쯤 달렸을까, 장조카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그랬구나. 차를 세웠다. 아내의 위로는 내 들썩이는 어깨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어머니 가시고 여러 해 동안 아랫녘까지 걷는 걸 잊지는 않았다. 부담을 안고 다니다 몇 년이 지나 국도 1호선을 따라 목포에서 서울로 오르기로 했다. 아내는 나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지니고 다니던 천주교 묵주를 건네주었다.
출발지인 국도 1호선 기점 목포문화원 앞에서 걷기 시작했다. 짐을 최대한 줄였어도 식수를 얹으니 배낭 무게가 10kg을 넘었다. 첫날 걸을 거리는 전남 무안까지 27km. 4월 초 아침이지만 등에 땀이 배어 나와 두 시간마다 휴식을 취했다. 15km가 넘어가며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배낭은 내 어깨를 계속 짓눌렀다.
그때 묵주가 생각났다. 전에는 성당도 다녔으나 미사 참례도 자주 건너뛰며 신의 존재만 겨우 인정할 정도로 나의 믿음은 미약했다. 천주교 신자에게 익숙한 묵주기도도 언제 했는지 가물거렸다. 이런 내가 묵주를 꺼내어 내 나름의 방식으로 기도를 올렸다. 힘들어 죽겠으니 나에게 힘을 달라고.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내 두 다리와 내 몸뚱어리뿐이지만, 나는 첫날부터 그 믿음에 묵주기도를 더했다. 기도 덕분인지 첫날은 무사히 마쳤다. 무안에서 나주까지 둘째 날에는 맞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왕복 2차선 좁은 도로에서 대형차들이 내는 바람은 맞바람과 함께 내 길을 가로막았다. 또다시 묵주를 꺼내 들었다. 입으로 먼지와 바람이 들어와도 멈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다음 날 광주 입성할 때도 묵주기도를 바쳤다.
나흘째, 광주에서 담양까지 가는 동안에는 몸도 조금씩 길에 적응되어 어제보다 걸음이 빨라졌다. 힘이 덜 들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지 않았다. 5‧18 국립묘지에 들러 참배하고 나오다가 며칠 잊고 있었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랬다. 난 완주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저세상에 계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자. 어려서 당신의 생모를 여의어 모정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어머니. 하나밖에 없는 오빠를 육이오가 앗아가 그나마 동기간의 정도 모르던 어머니. 당신의 아버지가 무남독녀인 당신을 육이오 때 북에서 월남한 열네 살 많은 남자에게 시집보내며 사랑 많이 받으라 했지만, 평생 남편과의 갈등 속에 살아온 어머니. 자식에게 헌신적이지도, 현명하지도, 잘나지도, 자기주장이 강하지도 않은 어머니. 그러고 살다 종국엔 아무도 없는 집에서 조막만 한 몸을 이 세상에 놓아두고 쫓겨 가듯 저세상으로 떠난 어머니를 향한 기도는 차라리 고백성사였다.
며칠 지나며 기도 속에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화장한 아버지 골분을 굽지 않은 항아리에 넣어 묘지에 묻었다. 몇 달 지나 항아리가 녹아 골분은 흙이 되었을 것이다. 7개월 후 아버지 곁에 어머니를 묻었으니, 두 항아리가 녹아 두 분은 땅에서 하나가 되었다.
매일 아침 길을 나서며 어머니를 위한 묵주기도로 하루의 일정을 시작했다. 입안으로 흙먼지와 바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천백 리 길을 나 홀로 걸었다. 나의 도보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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