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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현 Dec 25. 2024

한을 품은 너릿재

전남 화순

한을 품은 너릿재 화순     

5일 차(4월 6)

보성군 복내면~화순탄광~화순군 남면(사평면) 26km / 누계 144km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지난 5일 동안 비가 오지 않은 날은 하루뿐이지만 공기는 깨끗해서 숨쉬기 편하다. 마른날에는 걷기 편하지만 자동차가 일으키는 흙먼지가 힘들게 한다. 저녁에 코를 풀면 까만 콧물이 나온다. 하나가 좋으면 하나가 나쁘다. 신을 제외하고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을 듯싶다.


“비가 오면 공기가 맑아 좋고, 해가 나면 걷기에 좋으니 모두 다 나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주는구나.” 아전인수인가?



한을 품은 너릿재


화순에서 사평면으로 가는 도중에 남도의 유일한 탄광인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 즉 화순탄광 앞을 지났다. 국토 어디나 일제강점기 수탈과 육이오전쟁의 상흔이 없는 곳이 없다. 


1905년 채탄을 시작한 이곳 화순탄광은 미군의 학살로 다수의 노동자가 죽어간 참사와 연관이 깊다. 일본이 패망하며 화순탄광의 사주는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멈춰 선 탄광에서 노동자들은 자치위원회를 결성하여 생산시설을 가동하였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점령군으로 이 땅에 진주한 미군은 한반도 남쪽을 통치하였고, 미군정청은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敵産)을 미군정에 귀속시켰다. 화순탄광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에서 친일 부역 이력이 있는 자를 광업소 소장에 앉히고 모든 노동조합 활동을 금지하였다.


1946년 8월 15일, 광주에서 열리는 해방 1주년 기념식에 화순탄광 노동자와 주민 천여 명이 참석하고자 화순에서 광주로 이어지는 너릿재를 넘어가던 중이었다. 미군은 노동자들에게 광주 기념식이 좌익이 주도한 행사이므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다. 


누가 누구에게 명령한단 말인가. 미군정청은 남의 나라 해방 1주년 기념행사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참석을 막을 아무런 권한이 없다. 이에 불응한 노동자들을 미군은 장갑차와 총칼로 무차별 공격하며 해산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다. 해방 후 미군에 의한 최초의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후 미군의 만행은 노근리 사건 등 현대사에서 다수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미군정은 일제하 친일 관리와 경찰 등을 그대로 기용하여 그들이 다시금 이 땅의 민중들을 탄압하게 하였고, 친일 청산을 가로막아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이 비록 북한의 침략에서 한국을 구해주었다고 하여 미국을 절대선(絶對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미국은 어떤 존재일까. 너릿재를 빼고 화순탄광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다.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희생된 너릿재야말로 부패한 조선 말기의 지배층 수탈과 일제의 탄압, 미군의 학살, 1980년 5.18 군부 세력에 의한 민초들의 죽음을 목도한 비극의 길이다. 


조선 말기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과 관군에 패퇴한 수많은 농민군이 이곳 너릿재에서 처형당했다. 너릿재 명칭 유래는 여러 가지다. 처형당한 농민군들의 관(널)을 메고 이 고개를 넘었다 하여 널재라 하였고, 너릿재로 변하였다는 설이 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너릿재 초입 주남마을에서 매복 중이던 공수부대가 지나가던 마을버스에 총격을 가해 할머니 포함 다수의 민간인을 살해하였다. 


지금은 화순과 광주를 잇는 4차선 도로가 두 개나 생겨 너릿재는 차량 통행이 금지되었다. 걷기 좋은 옛길로 다시 태어났지만, 비극의 역사는 잊히지 않는다. 5.18 희생자 위령비가 주남마을에 세워져 있지만, 근현대사에서 억울하게 죽은 수많은 원혼을 달래줄 ‘너릿재 위령비’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이다.


화순광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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