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오던 날
남편의 심부름으로 노트북 청소를 하려 택시를 타고 컴퓨터 A/S센터로 가는 길이다. 첫눈이 오는 설렘도 잠시 눈이 그쳐 뭔가 서운하고 하늘은 좀 우중충하였다. 내가 ○○으로 이사 온 지 2년째, 어딜 가나 처음 가보는 곳은 어색하고 낯설다. 그렇게 택시는 내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후미진 곳을 지나 도로변을 빠져나왔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휘청이더니, 순백의 안개꽃송이들이 흩날리는 듯 다시 눈이 내렸다. 컴퓨터 A/S센터에 도착할 때쯤에는 눈이 그쳤고, 반가운 햇살도 약간은 내리쬐는 듯했다.
노트북 청소를 마치고, 점심으로 뜨끈한 순댓국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은 저마다 털잠바 위에
모자를 눌러쓰고, 휘청거리는 우산을 쓰고 있었다.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택시가 잡힐 만한 맞은편에 있는 한 편의점 앞으로 갔다. 평상이 있어서 짐을 내려놓고 택시를
부르려 하는데, 편의점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왔다. 제법 강한 바람에 편의점 앞에 세워둔 플라스틱 빈 박스들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이게 뭔 난리야?" 하며 정신없이 부산스럽게 박스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내 앞에 플라스틱 빈 박스 하나를 아주머니께 건네주었다.
밖에서 잠깐 기다리는 나를 보았는지, 아주머니는 바람도 불고 추운데 안에서 기다리라며 편의점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아이들 줄 과자를 하나를 골라 계산대에 올렸다. 계산대에서 아주머니는 '점장' 이름표를 달고 계셨다. 그러더니, 아주머니는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일부러 과자를 살 필요 없다며, 한사코 거절하였다. 처음 보는 나를 밖에서 추위에 떨지 않게 해 준 아주머니의 그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물건 값을 치르지 않으려 하는 그 선량한 마음이 되려 미안하기도 했다. 아주머니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이 동네에 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말에 아주머니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는 콜택시를 부르고 아주머니의 따뜻한 배려 덕분에 편의점 안에서 편하게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지나서
"네? 저는 연하게 먹어요. 감사합니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아주머니께서 타주셨던 커피는 그 어떤 커피향보다 감미롭고 따듯했으며
감동 한 스푼을 추가 한 듯 쓰디쓴 커피도 달짝지근하게 느껴졌다.
이 동네에 살지도 않고, 또다시 그 편의점에 들르게 될지도 모르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참 친절한 분이셨다.
이것이 한국인의 '정' 인가? 얼마 전 티브이에서 한 이탈리아 요리사가 나왔는데, 자신의 나라에서 명성을 날렸던 꽤 유명한 요리사였다. 한국음식이 좋고 한국이 좋아서 자신의 모든 커리어를 버리고 한국에 정착했던 그 요리사가 생각이 났다. 그때는 우리나라보다 더 살기 좋은 이탈리아에서 왜 굳이? 한국에서 정착하려는 걸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었지만 오늘 내가 받은 호의가 그런 나의 의구심을 거두었다.
그 요리사는 내가 느낀 것처럼 선량하고 따듯한 한국인들의 깊은 정을 느꼈을 것이다.
택시가 도착한 듯 클락션 소리가 나고, 아주머니께 거듭 감사함을 전하고 밖으로 나왔다.
올해 겨울엔 어쩌면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작은 기적을 꿈꾸며 첫눈이 내리던 오늘, 왠지 모를 설레임이 가득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