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 파도처럼 일어나 거품처럼 사라지다

주역 에세이

by 고시린


주역의 메시지들이 탄생하던 시절, 대륙의 상황은 어땠을까.


광활한 중국 땅은 춘추와 전국의 시대를 지나면서 황폐했다. 수백 년에 걸쳐,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도 건조한 진술로 거친 시대의 격랑을 체감할 수 없다. 시대를 느껴야, 버려졌건 추앙됐건 한 시대를 떠돌던 사유와 메시지를 이해한다. 그러나 어떻게 느끼고 이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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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망하던 차에 문화재 분야에서 일하던 선배 한 분이 연락을 해왔다.

“혹시 J 교수를 알아요?”

“중문학 하시는? 신문에 한자 이야기 쓰셨던 분이죠?”

“같이 뵐까?”


서울 모처에서 회동을 약속하고, 핸드폰에 단체 대화창을 만들어 송구한 첫인사를 드렸다. 며칠 후 회동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노 교수가 홀연히 ‘삼국지 서사’란 짧은 한시를 대화창에 올리신다.

“내일 이걸 안주 삼아 탁배기(막걸리) 한잔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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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난 자리에서 듣고 감탄했지만, 노 교수는 대학 은퇴 후 《논어》와 《금강경》을 파격적일 만큼 쉬운 우리말로 번역했으며, 요즘은 《삼국지》 완역에 도전 중이다. 오전 9시면 자택 지하의 서실(書室)에 자신을 가두고, 밤 10시 30분까지 일을 멈추지 않는다니, 노학자의 에너지가 가히 폭발적이다.

그가 자신의 번역으로 알려준 삼국지 시작 부분, 짧은 한시의 전반부가 이렇다.

장강은 꿀렁꿀렁 동쪽으로 흐르고

영웅은 물결처럼 일어났다 사라진다.

시비와 성패가 물거품이 되는 듯……

청산은 옛날같이 변함이 없으나

석양은 몇 번이나 붉어졌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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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소한 술자리에서 머릿속의 황망함이 단숨에 해소됐다. 궁하면 통하기 마련이다(이 말도 주역이 원전이다!). 삼국지의 시대와 춘추전국의 시대는 멀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간절하고 필사적인 바람을 품었던 메시지들이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지고 또 버려지는지 짐작하게 해 줬다.


수많은 영웅이 물결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던 시절, 시비와 성패가 하룻밤 새 뒤바뀌던 시절, 푸른 산하 위로 핏빛 석양이 붉던 시절에 그 메시지들은 생성되고 또 풍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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