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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바시와 고카이도

에도시대 이야기 두 번째

by 늘 담담하게

*도쿄 이야기는 도쿄의 여행관련 이야기나 정보를 쓰는 것뿐만 아니라 도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에도를 새롭게 개발할 때 막부는 성하 마을(城下町)에 거주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무사의 거주지, 절과 신사지, 쵸닌(町人,일본에서 에도 시대인 16세기에 등장하여 빠르게 성장한 도시(町)의 상공업자.)의 거주지, 이렇게 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계획했다.


무사의 거주지에는 미카와(현대의 아이치현), 도토미(현재의 시즈오카현)등, 이에야스 가문의 옛 영지에서 옮겨온 가신들이 무가 저택을 에도성 오테몬(정문) 앞의 히라카와 하안을 비롯한 성 아래 각지에 살게 했다. 특히 성의 북쪽(기타노우치)에서부터 성의 서쪽(고지마치)의 고지대에는 다이칸 등 막부 관리의 저택과 하급무사 나가야(長屋 일본식 공동주택)가 들어서고, 다이칸쵸라든가 반초라고 불렀다.



*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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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kagawa_Edo_Museum_on_the_30th_of_october_2010_-_89.jpg?type=w1 나가야 내부

나가야는 여러 세대가 나란히 이어져 있으면서 외벽을 공유하는 건물, 또는 긴 하나의 건물을 수평으로 구분하여 각각에 출입문을 만든 형식의 주택을 말한다. 출입문이 하나밖에 없어 여러 세대가 공유하는 경우는 나가야가 아니며, 이 경우는 아파트(일본식), 기숙사, 하숙등이 해당한다.


일본에서 나가야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시타마치(서민거주지역)의 좁은 골목에 죽 늘어선 목조주택이다. 일본역사에서 전통적으로 도시주택의 대표적인 형태의 하나였다. 성곽도시의 경우는 다몬 망루(多門櫓)라는 방위목적의 나가야를 지어 방어건물로 사용함과 동시에 주거지로도 사용하였다. 에도 시대에 중류층 이상의 상인들은 대로에 자기 소유의 독립가옥을 갖고 있었지만, 영세 상인들은 뒷골목의 나가야를 집주인으로부터 빌려 사용해야 했다. 또한 다이묘 소유의 대지 안에도 나가야를 지어 주요 가신들을 살도록 하였다. 이러한 서민과 밀접한 나가야는 에도 시대 라쿠고나 센류 등 예술과 문학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에도 시대의 나가야는 거의 평지에 있으면서 출입구를 열면 바로 부엌이 나오고, 화장실은 건물 안이 아니라, 골목길에 별도로 있었으며, 욕실도 별도의 욕실이 없었다.(목욕이 필요할 때는 센토라고 부르는 대중목욕탕에 갔다) 현대 일본어에서는 건물의 소유주를 오오야(大家)라고 부르지만, 에도 시대의 오오야는 나가야의 입주자들로부터 집세를 대리로 받아 집주인에게 전달하거나, 집의 수리, 입주자 트러블 해결등을 맡는 부동산업자와 같은 개념이었다. 이들 에도의 오오야들은 같은 나가야안에 거주하기도 했는데, 세입자들의 상담을 맡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세입자들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다. 또한 좁은 나가야 안에 여러 살림살이를 들이기는 어려웠으므로, 여러 주요 생활용품, 비품등을 대여해 주는 손료야(損料屋)라는 직업도 있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로 나가야는 여전히 도시주거의 주요 형태였으나, 도시가 조밀화되면서 1층 대신 2층이상의 건물이 다수 지어졌다. 옛 1층 나가야는 도쿄에서는 쓰키시마에 많고, 오사카, 교토등에도 다수 남아 있다.


절과 신사는 조카마치 주변부의 교통 요지에 위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히라가와무라와 쓰보네자와에 있었던 절과 신사는 모두 간다다이와 야노구라 근처로 이전했다.


쵸닌의 거주지는 오테몬이 있는 도산보리 근처와 도칸 시대부터 번창했던 다카하시 다리를 도키와바시로 이름을 바꾸고 동쪽에 배치했다. 이 쵸닌의 거주는 죠카마치 번영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특별히 혼쵸本町라고 이름 붙였다.


혼죠 부근의 도시구획 사업은 헤이안쿄를 모델로 삼았다. 헤이안쿄처럼 1 쵸를 사방 40장(400자= 약 121.2m)으로 나눴다. 그 안쪽을 정井 자로 나누어 도로를 면한 곳에는 상가를 만들었고, 건물 중앙의 네모진 공터를 가이소치라고 하고 여기에 공동변소와 쓰레기 수거장을 만들었다.



도로폭도 혼마치도리와 그와 직각으로 만나는 도리쵸스지(니혼바시도리)를 6장(약 18m), 그 밖의 요코초(뒷골목)를 4장(약 12.1m) 3장 (약 9.1m), 2장(약 6.1m)으로 정했다. 이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상당히 넓은 거리였다.



에도의 도쿄에 의하면 에도의 거리 중에서 가장 번화한 곳은 도산보리 주변이었다. 양쪽에 자이모쿠쵸, 후네 초, 욧카이치쵸가 생겨났다. 자이모쿠쵸에는 전국에서 목재를 실은 배가 에도항구에서 니혼바시가와, 도산보리로 들여와 쌓였고 이곳에 목재 가게가 모여 있었다. 후네쵸는 이런 배를 소유한 해운업을 경영하는 해상운송 중개업자가 모여 있던 장소이다. 욧카이 쵸에서는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다양한 생활용품을 들여와 시장이 형성되었다. 1598년에는 스미다가와 강 상류 센쥬오하시千住大橋를 , 1600년에는 다마카와에 로쿠고바시 다리六郷橋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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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센쥬오하시 그림


최초로 센쥬오하시가 들어선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594년 11월의 일로, 스미다 강 최초의 다리이다. 당초의 다리는 현재보다 상류 200m 정도 되는 곳으로 당시 스미다가와노와타시 隅田川の渡し라고 불리는 나룻배의 도선장이 있던 곳으로 추측된다.


다리 공사를 한 사람은 칸토다이칸시라(関東代官頭 에도막부의 관직명)의 이나 타다츠구로 길이 66칸(120m), 폭 4칸(7m)의 다리를 놓기에는 토목공사의 대가였던 그 자신도 매우 힘든 난공사여서 구마노 곤겐(구마노 3 신)에게 무사 완공을 기도하여 겨우 완성되었다고 한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에도를 중심으로 오슈도츄, 도카이도의 교통망을 정비하여, 에도는 이제 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난 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전투, 바로 1600년 9월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군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새로운 막부를 자신이 개발하기 시작한 에도에 두기로 하고, 에도의 중심지인 혼쵸와 교차하는 도리쵸에 니혼바시를 새로 설치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다섯 가도(도카이도, 나카센도, 고슈도, 닛코 도츄, 오슈도츄)의 간선도를 닦고 예부터 교토를 중심으로 한 교통만을 지선도로로 편입시켜 각 지방과 연결하게 만들었다.



*니혼바시


광역 지명으로서의 니혼바시는, 도쿄도 주오구 북부로, 구니혼바시구 전역을 가리킨다. 에도시대부터 무가의 저택이 들어선 야마노테에 에 비해 쵸닌 문화의 중심지인 시타마치를 대표하는 지역이었다. 도쿄는 신주쿠나 시부야 등의 비교적 역사가 짧은 거리가 많은 가운데, 니혼바시는 에도시대 초기부터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는 몇 안 되는 지역이다.




%EB%8B%88%ED%98%BC%EB%B0%94%EC%8B%9C1.jpg?type=w1 에도시대 니혼바시를 그린 우키요에


근대 이후에도 중요한 땅이었던 니혼바시(日本橋)에는 일본은행 본점 본관을 비롯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건축물이 집중되어 있다. 에도시대에는 니혼바시는 5개 가도의 기점으로서 에도에 있어서의 교통·물류의 요충지였다. 현재의 니혼바시 혼쵸를 포함한 일부 지역은 「에도혼마치」라고 불리고 있어 에도에서 최초로 마을 할당이 정비된 오슈 가도 가의 거리이다(현재의 「혼마치도리」 「오오덴마혼마치도리」가 해당된다). 니혼바시혼초는 에도시대부터 약 도매상이 많이 입주해 현재도 「약의 거리」로서 타케다 약품공업, 아스텔라스 제약, 다이이치산쿄 등의 대기업 제약회사의 본사 및 도쿄 본사가 다수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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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니혼바시


에도시대 당시부터 환전상 등 금융기관이 이 땅에 집적되어, 금융·상업의 중심지였다. 1873년에 최초의 은행인 제일국립은행이 설립된 은행 발상지인 니혼바시 가부토초, 니혼은행 본점 등이 소재하는 니혼바시 모토이시초와 니혼바시무로초, 오슈 가도변 금융가로서 지금도 여러 대형 은행의 지점이 있는 니혼바시 다이덴마초와 니혼바시 요코야마초 등 니혼바시 지역 전체가 도쿄 도심을 대표하는 금융가로서 발전하고 있다.


일본 최고(最古)의 백화점인 니혼바시 미쓰코시(日本橋) 본점을 포함한 전통 있는 상업시설도 많고 니혼바시(日本橋) 지역 북동부에 위치하여 옛 오슈(御州) 가도변 거리인 히가시니혼바시(東日本橋)와 니혼바시 요코야마(日本橋橫山) 마을, 니혼바시 바쿠로(日本橋) 마을에는 일본 최대의 도매상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관동 대지진으로 붕괴해 그 후 츠키지에 츠키지 시장으로서 이전할 때까지 이 지역에는 우오가시(魚河岸 어시장)가 놓여 있어 에도시대부터 도쿄의 식품 유통을 담당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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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니혼바시 어시장


오늘날의 니혼바시의 글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쓴 것이다.


*다섯 가도 五街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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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카이도( 五街道)는 에도 시대에 에도(현재의 도쿄)를 기점으로 한 다섯 주요 도로(가도)를 말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에도와 교토를 연결하는 도카이도였다. 1601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로 제도의 개혁과 정비에 나서고 주인장(朱印状, 도장이 찍힌 일종의 공문서)에 의해 각 숙소에 전마伝馬 의 상비를 의무화했다.


또한 도로의 폭을 넓히면서 슈쿠바를 정비해, 이치사카즈카 一里塚(4km마다 이정표나 나무를 심은 것)를 마련하는 등의 가도의 정비를 차분히 진행해, 자갈이나 모래를 깔아 노면을 굳히거나, 소나무 가로수를 심었다.


고카이도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2대 쇼군 히데타다 때의 일로 1604년 니혼바시를 고카이도의 기점으로 삼고, 막부체제를 유지하고 에도를 방어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도의 주요 지점마다 초소를 두고 통행인을 단속했다. 또한 히데타다는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이 다섯 갈래의 길을 막부 직할로 하고, 약 4km마다 가도를 따라 가로수를 심을 것은 명령했다.



Tokaido1825.jpg?type=w1 1825년의 도카이도의 모습, 길 양쪽에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모든 가도들은 에도의 니혼바시부터 시작된다. 이곳에서부터 가도들은 일본 각지로 뻗어나가 에도와 지방을 연결했다.


도카이도(東海道) - 53개의 슈쿠바가 있으며 교토와 연결된다. 오사카 가도(大坂街道)를 포함하기도 한다.


나카센도(中山道) - 69개의 슈쿠바가 있으며 혼슈 중앙을 통과해 교토와 연결된다.


고슈 가도(甲州街道) - 44개의 슈쿠바가 있으며 가이 국(야마나시현)과 연결된다.


오슈 가도(奥州街道) - 27개의 슈쿠바가 있으며 무쓰 국(후쿠시마현)과 연결된다.


닛코 가도(日光街道) - 21개의 슈쿠바가 있으며 오늘날의 도치기현에 위치한 닛코 동조궁까지 연결된다.



*역참(슈쿠바)


이들 슈쿠바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첫 역참은 도카이도를 따라 개발되었으며 이후 나카센도와 다른 가도를 따라 세워졌다. 에도의 시나가와주쿠부터 오미 국의 오쓰주쿠에 이르는 도카이도 53 역참의 첫 역참이 1601년에 설립되었다. 모든 역참이 동시에 세워진 것은 아니며 1624년에 마지막 역참이 세워졌다.


슈쿠바의 숙박 시설은 관리들이 사용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역참의 돈야바, 혼진은 모두 관리들이 묵는 곳이었다. 역참의 소유주들이 역참으로 이윤을 얻기는 어려웠지만 쇼군은 쌀 보관과 간단한 자금 대출을 허가하는 등 다양한 혜택을 주어 이들이 그것을 계속 유지케 하였다. 하타고, 소매점, 찻집 등이 일반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이윤을 얻기 위해 설계되었다. 아이노슈쿠는 비공식 역참으로 이들과 같은 시설을 갖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메이지 시대 이후 철도 수송이 보급되면서 이들 역참을 방문하는 여행객 수는 감소하였고 점차 쇠퇴해 갔다.


*슈쿠바의 시설들

돈야바(問屋場) : 역참을 관리를 위한 관청이자 언제나 부릴 수 있는 심부름 꾼과 말을 갖추어 놓은 곳이었다.

혼진(本陣) : 사무라이와 귀족들이 사용하는 숙박 시설이었다.

와키혼진(脇本陣) : 이들 역시 사무라이와 귀족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나 만약에 비어 있을 경우 일반 여행객들도 사용할 수 있었다.


하타고(旅籠) : 일반 여행객들을 위한 숙박 시설과 음식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기친야도(木賃宿) : 역시 일반 여행객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었으나 음식은 제공하지 않았다.


자야(茶屋) : 여행객들에게 차와 음식, 술을 판매하던 곳이었다.


고사츠(高札) : 쇼군의 포고령을 걸어놓은 게시판이었다.



역참의 경우 도카이도는 시나가와, 나카센도는 이타바시, 고슈가도는 나이토 신주쿠, 닛코가도, 오슈가도는 센쥬가 각각 첫 번째 역참이었다. 역참에는 앞서 말한 대로 덴마伝馬 라는 제도가 정비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각 역마다 인부와 말을 준비하여, 다음 역참까지 짐을 운반하는 제도로 역참 잇기라고 불렀다. 에도의 니혼바시에서 도카이도를 이용해서 가려면 교토의 산죠오바시까지 53개의 역참 잇기가 있었다. 에도시내에는 덴마의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 오덴마쵸, 미나미 덴마 쵸, 고덴마쵸였다. 오덴마쵸, 미나미 덴마쵸는 다섯 개의 가도의 역참 잇기를 취급했고 고덴마쵸에서는 에도 근교로 오가는 짐을 취급했다.



그리고 파발이 있었는데 막부가 운영하는 것, 여러 다이묘가 이용하는 것, 민간인이 운영하는 세 종류가 있었다. 각각 편지나 돈 그리고 작은 짐을 운반했는데 교토까지는 90시간이 걸렸고 빠른 것은 60시간 만에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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