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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초기 에도성,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개척

by 늘 담담하게

*도쿄이야기는 도쿄에 대한 역사, 지리, 풍물, 그리고 현재의 여행지에 대한 글입니다. 향후, 도쿄에 대한 모든 글은 도쿄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일단 초반부는 도쿄의 옛 이름 에도라는 곳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사이 사이에 도쿄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쓸 것입니다.


159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로 왔을 때, 에도에는 1457년에 세워진 중세 이래의 낡고 허물어져 가는 에도성과 전란으로 황폐된 성하 마을, 항구를 둘러싼 취락과 주변의 마을이 있는 정도로, 이에야스와 많은 가신단이 거주하기에는 너무 좁은 곳이었다.


에도江戸 라는 지명의 에는 바닷물이 육지 쪽으로 들어온 곳, 도는 입구라는 의미이다. 이는 스미다가와강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저습지를 뜻하는 것이다. 에도라는 지명이 등장한 것은 사료를 보면 대체적으로 헤이안 시대 후기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가신단이 에도에 들어왔을 때 지도를 보면 에도관(에도성)이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고, 히비야만이 그 앞에 펼쳐져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도쿄 중심부 그러니까 유라쿠초나 히비야 지역이 당시에는 그냥 바다였다. 당시의 에도성은 완전히 황폐화되어 있었다. 성이라고는 하지만 석축은 한 군데도 없이 잡초로 덮인 흙담에 불과했고 성안의 건물은 판자로 지붕을 이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이에야스는 이런 에도성에 만족하고 우선 비가 새는 곳을 간단히 수리하고 나서 새로운 성과 도시를 세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히비야만의 히비야日比谷 라는 지명은 당시 히비야만에서 김이 생산되고 있었는데 그 김을 채취하기 위해 바닷속에 꽂아두던 대나무와 관련이 있다. 히비야 만 앞에는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모래섬이 있었는데 그 섬을 에도마에지마(江戸前島, 현재의 도쿄역이 있는 지역)라고 불렀다. 에도 입성 이후 다음 해인 1591년 이에야스는 오나기가와강 小名木川을 파게 하는 명령을 내린다. 오나기가와강은 오늘날의 고토구의 북부 지역을 동서로 횡단하여 스미다가와강과 구나카가와강을 연결하는 인공수로이다. 전체 길이는 약 5km

1920px-Onagi_River_Aerial_photograph_1984.jpg?type=w1 오늘날의 오나기가와 강의 항공사진

사진 가운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직선으로 연결된 것이 오나기가와 강이다.


이에야스는 소금 확보를 위해 군사적인 목적으로 교토쿠염전 (현재의 치바현 교토쿠)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교토쿠로부터 에도 미나토(당시는 히비야 후미에 부근)까지의 에도만(도쿄만) 북부는 당시, 사주와 같은 장애물이 많아 배가 자주 좌초되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크게 앞바다를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또, 앞바다를 우회했을 경우에서도, 풍향에 따라서 히비야 만내의 강한 풍파를 받아 배가 가라앉는 일도 일어나,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오나키 시로베에게 교토쿠까지의 운하를 만들라고 한 것이다. 교토쿠는 위 사진상의 오나기가와강의 오른쪽 끝부분이 아라카와 강이고 그 우측 지역에 있었다. 이 운하가 만들어지면서 안전하게 소금을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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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오나기가와 강, 구나가카와강, 그리고 아라카와강 주변을 캡처 한 것이다. 지도 아랫부분 강동재활병원이라고 표기된 부분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파란색으로 연결된 것이 오나기가와강, 그리고 오른쪽에 완만한 곡선으로 표기된 부분이 구 나카가와강, 그 오른쪽 큰 강이 아라카와강이다. 그러니까 소금을 실은 배가 구 나카가와 강을 따라 들어와서 다시 왼편으로 직선화된 오나기가와강의 수로를 따라 스미다강을 거쳐 에도에 도착한 것이다.


100_views_edo_060.jpg?type=w1 에도시대 그려진 나카가와강의 입구

비슷한 시기에 히라카와강 하구에서 에도성의 오테몬 근처까지 도산보리道三堀 라고 지칭되는 수로를 팠다.



%EB%8F%84%EC%82%B0%EB%B3%B4%EB%A6%AC.gif?type=w1 도산보리

도산보리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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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들어왔던 초창기의 해안선과 지금의 해안선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나중에 지도 왼편 위에 간다산을 깎아 그 흙들을 왼쪽과 오른쪽 바다를 쏟아부어 메웠다.



이에야스는 1590년 7월 에도에 입성한 후 먼저 가신들이 거처할 주거를 정비한 뒤 8월 에도성 공사를 위한 물자 운반을 위해 도산보리를 판 것이다. 이 수로를 파면서 나온 토사는 매립에 이용되었다. 다음 달인 9월에는 구획 정리에 착수해, 우선 도산보리 북쪽에 「혼초」(현재의 니혼바시혼마치의 일부, 니혼바시혼고쿠쵸, 니혼바시무로마치)를 만들었다. 도산보리 양쪽에는 욧카이치쵸, 자이모쿠쵸, 후나마치, 야나기쵸(유곽)등이 생겼다. 히비야 후미에가 매립된 후에도 에도성으로의 물자운반로로서 활용되었다



성 주위로는 가신단의 저택을 배치했다. 그리고 도키와바시몬 성문 밖에서 동쪽의 아사쿠사 방면으로 향하는 가도를 따라 혼초의 마을 구획 정리를 실시했다. 혼초란 ‘에도의 근본이 되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도로는 폭을 약 12m로 만들고 도로의 남북 양측으로는 가로세로 약 120m의 넓은 시가지를 조성하여 이 마을에 상인을 거주시켰다. 금화를 만들던 관청인 긴자나 시정을 담당하던 마치도시요리 등의 저택도 이 혼초에 배치되었다.


이때 해안 근처의 도시 건설이기 때문에 우물을 파면 짠 바닷물이 나와 도저히 음용수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이시카와누마에서 물을 끌어와 수돗물로 사용했다. 이것이 간다 상수의 시작이다. 우리가 흔히 먹을 물을 상수도라 하고 사용하고 난 뒤의 물을 하수도라고 하는 용어가 바로 이때에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떻게 해서 에도(지금의 도쿄)로 오게 되었을까?


수많은 지역 세력들이 싸우던 이른바 전국 시대를 끝낸 사람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이다. 일본 전국을 통일한 이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교토에서 최대한 떨어뜨리기 위해 오다와라성에서 이에야스에게 선약했던 대로 도카이도의 5개 국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간핫슈 지역과 이즈(伊豆)를 내렸다. 쉽게 설명하면 고생고생하면서 터전을 일군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들판뿐인 간토지방으로 터전을 옮기라고 한 것이다. 정말 치욕적인 조치였다. 그리하여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의 결과를 받아들인 이에야스는, 오다와라나 가마쿠라가 아닌, 간토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던 호조의 일개 출장소 에도(江戸)로, 명절인 핫사쿠(八朔)였던 1590년 8월 1일 입성하였다. 에도로 입성하면서 이에야스는 불안감을 느끼던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겠다며 에도 성에 입성할 때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히토에(単衣)를 입게 하였다.


*히토에

히토에란 기모노의 안감(안감이나 야카케)을 붙이지 않고 만든 기모노를 말한다. 주로 6월과 9월경 간절기에 착용한다.


입성 닷새 후 주민 모두에게 쌀을 무상으로 배급하였다. 입성 이후, 이에야스는 녹봉 배치를 제일 먼저 시작하였다. 우선 아직 자신에게 적대적인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최측근인 도쿠가와 사천왕(사카이 타다츠구, 혼다 타다카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이이 나오마사)에게 외곽 지역의 10만여석 이상의 땅을 주었고, 그 내부에도 미카와 시절부터 가신으로 일해 온 후다이 다이묘를 배치하여 이중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또한 호조와 다케다의 유신(遺臣), 지역 토호들에게는 무리한 압력을 피하고 일정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해주었고 자신의 직할지 1백여만석에는 호조, 다케다, 이마가와의 유신들에게 다이칸(代官)이란 지방관직을 주어 행정을 관리하도록 하여 불만을 무마시켰다. 그리고 이 다이칸들을 지휘하는 다이칸카시라(代官頭)에는 이나 다다쓰구, 오쿠보 나가야스 등의 기술·행정 전문가들이 등용되었다. 이러한 효율적 제도와 다른 지역과 산으로 격리된 간토의 지리적 특성이 맞물려 간토를 지배하던 이에야스는 큰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이를 두고 나중에 "이에야스는 후퇴하여 제국을 건설했다"는 속담이나 "모든 길은 에도로 통한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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