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 초기 이야기
에도에 막부가 설치되면서 에도는 본격적으로 도시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새롭게 고안해 낸 것이 달팽이 (の ) 모양의 확장계획이었다. 에도성을 중심으로 마치 달팽이를 그리듯이 오른쪽으로 소용돌이치는 모양의 수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수로에 방사상으로 다섯 갈래의 큰길을 만들었다.
여기서 에도의 도쿄라는 책을 쓴 나이토 아키라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17세기의 에도의 도시지도를 복원해 보면, 에도는 43.9 km²로 거대했으며, 당시 서구 제일의 도시 로마의 14.6 km² , 런던 9.2 km² 를 훨씬 능가하는 대도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에도가 거대해진 이유는, 언덕과 계곡, 하천 등의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해 시계방향의 수로가 오른쪽 방향으로 끊임없이 이어진 도시계획에 있다. 토목기술만으로 에도는 무한대로 규모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도성(江戶城)와 에도의 마을이 발전하는 과정을 고찰하면, 다음과 같이 4기에 걸친 역사가 있다.
발전의 원점인 에도성은 159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입성하면서 에도막부의 중심성으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오오타 도칸(太田道灌, 1432~86)이 쌓은 성으로 유명했던 이 성은, 당시 이에야스가 입성할 때 이미 황폐해져 있었다. 성 주변의 돌 축대는 없어지고 잔디로 덮인 제방만으로 둘러싸인 성 안쪽에는 허름한 저택이 있을 뿐이었다. 보기에도 너무 빈약했기에, 다시 대대적인 보수확충계획이 세워졌다.
제1기(1590~1602): 이에야스에 의한 동일본의 중심지로서의 건설기. 성에는 오타 도칸 때부터 3개의 유곽이 있었으나, 이에야스는 이 중 하나를 성의 중심부인 혼마루(本丸)로 만들고, 나머지를 니노마루(二丸)로 삼았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를 기본으로 빈 수로를 메우고 유곽 내부를 확충함과 동시에, 바깥쪽 수로를 만들어 성곽을 넓혀 니시마루(西丸)가 증설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전국을 통치하던 오사카성(大坂城)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가 후시미성(伏見城)의 건설을 명령하면서 에도성의 건설은 중단되었다.
제2기(1603~1616년): 이에야스가 장군이 되고 사망할 때까지 전국통합의 수도로서 에도는 비약적인 발전이 시도되었다. 에도성의 물자운반의 중요한 수로가 되는 도산보리(道三堀)가 정비되고 대대적인 에도성 축성계획이 일반에 공표되었다.
이 때문에 에도에서 100km나 떨어진 곳에서 석재와 목재를 배로 운반하는 등, 대규모 자재조달이 이루어졌다. 자재가 모이는 도산보리 주변은 해운업자와 재목상 등이 모이고 시장도 생기면서 번성하고 신도시 건설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도성은 본성의 전당과 망루가 지어지고,니시마루(西丸)의 축성이 이어졌다. 망루의 높이는 44.3m에 외관은 5층, 내부는 7층 구조로 평화로웠던 시대에 건설된 성과 비교해 보면 전략적인 구조로 만들어졌다.
제3기(1619~1632): 이에야스가 죽고, 2대 장군 히데타다(秀忠 1581-1632)에 의해 에도성을 중심으로 소용돌이 모양의 수로가 시계방향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도시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를테면 간다다이(神田台)를 깎아 히라카와(平川)의 수로를 바꿔, 스미다가와(隅田川)와 연결해 에도성의 북동부가 정비됐다. 간다다이로부터 파낸 흙은 에도성 앞까지 다가온 후미를 메우는데 쓰였고, 에도는 성의 남동쪽으로 넓혀졌다. 에도성에 가까운 매립지에는 다이묘에게 주어지는 택지, 다이묘야시키(大名屋敷, 지방의 번주가 에도에 살기 위해 마련한 저택) 등이 놓이고, 좀 더 떨어진 곳에는 서민들의 거주지구가 되었다. 또 에도성의 북쪽에서 성의 정면인 동쪽에 이르기까지 돌 축대가 완성됐다. 이때 성의 망루가 오늘날의 위치에 옮겨졌다. 망루의 외관은 전혀 새로운 디자인으로 만들어져 외관은 흑 옻칠을 한 5층 구조로, 내부는 돌 축대 위에 5층으로 지어져, 안과 밖의 층이 일치하는 구조가 되었다. 돌 축대 위의 높이는 44.8m로, 2기 때보다 조금 높아졌다. 니노마루의 전당과 정원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제4기(1633~1651년): 3대 장군인 이에미츠(家光 1604-1651)에 의해 타메이케(溜池)에서 이치가야(市ヶ谷)를 거쳐 코이시카와(小石川)에 이르기까지 에도성의 서북부 수로가 완성되었다. 이에 따라 에도성의 중심에서 시작된 소용돌이 모양의 수로는 마을을 둘러싸며 스미다가와(隅田川)로 연결되어 에도의 항구(도쿄만)로 이어진다. 또 혼마루고덴(本丸御殿)과 망루대가 있는 대천수대(大天守台)가 완성됐다. 망루는 외관 5층, 내부는 지하 1층, 돌 축대 위로는 5층으로, 돌 축대부터의 높이는 3기 때와 거의 비슷해졌다. 또, 성 주변을 모두 감시할 수 있도록 지어진, 탑 모양의 하늘을 찌를듯한 망루는 에도성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에도막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1657년의 화재로 인해 망루가 소실된 후로는 재건축되지 않았다. 하늘높이 솟아있던 에도성의 상징은 없어지고 단순히 성 외곽의 소용돌이식 평면적 대형화로 도시계획이 추진되어 갔다. 이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거쳐, 오늘날의 도쿄가 시작되면서 도심은 다시 거듭하여 규모가 커져가게 된다.
자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로 돌아가자.
앞에서 설명한 에도성과 에도의 발달 과정에서 2기에 해당되는 때인 1603년 에도성의 확장 공사를 위해 전국의 다이묘에게 내린 명령이 천하토목공사(천하보청 天下普請)이다. 이 대공사를 위해 1603년 에도항의 해안선을 정비하고 선착장을 만들었다. 이는 전국에서 실어온 건축자재를 옮기기 위해서였다.
먼저 간다산을 허물어 그 흙으로 당시 얕은 바다였던 히비야만을 매립했다. 동시에 동쪽스사키 = 에도마에지마에 수로를 파내어 도산 보리와 연결하고 이것을 히라카와 강과 이어 호리카와라고 이름 붙였다. 그곳에 니혼바시 다리를 놓고 다섯 갈래 도로의 기점으로 삼았다. ( 도쿄 이야기 1편 참조)
각각의 공사는 막부의 명령을 받은 다이묘가 맡았다. 고쿠다카(다이묘가 지배하는 영지에서 수확한 쌀의 양) 1000석 당 10명의 인부를 각지의 다이묘들이 보냈다. 니혼바시 하마초부근부터 신바시 부근까지 매립하여 새로 생긴 동네는 그 지역공사를 담당한 다이묘 영지의 이름을 따와서 각각 오와리초, 가가초, 이즈모초라고 이름 붙였다.
1604년 막부는 에도성 건설을 위해 석축 쌓는 공사를 담당할 다이묘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1565-1613 히메지번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1561-1624 초기 히로시마 번주), 구로다 나가마사, 가토 기요마사 등 일찍이 도요토미 가문을 섬겼던 도자마 다이묘들이었다. (모두 합쳐 28명의 다이묘들이었다.)
다이묘들은 돌을 운반하기 위한 석재 운반선을 2년 만에 300-400척씩 준비하여 1606년에 에도로 와서 토목공사를 지휘하였다. 성을 쌓는 석재는 이즈 반도에서 캐어 옮겨왔다. 석공들이 돌을 캐내면 인부들이 슈라라고 하는 나무 썰매에 실어 해안까지 운반했고 그곳에서 석재 운반선에 실었다. 도르래를 갖춘 몬구루마부네 라는 배를 이용하게 되는데 보통 1척에 200명이 옮겨야 하는 큰 돌 2개를 실어 한 달에 두 번 정도 에도를 왕복했다. 이때 동원된 석재 운반선은 3000척이나 되었다.
건축공사에 필요한 목재는 도네가와 상류의 간토 북부 산악지대와 후지카와 상류, 기소가와 상류에서 실어왔다. 에도항구의 선착장에서 뭍으로 옮겨진 돌과 목재는 에도성의 건설 현장까지 운반되었다.
(이처럼 에도성의 공사는 도자마 다이묘들의 막대한 비용 지출을 바탕으로 시작되어, 3대 쇼군인 이에미쓰가 집권하던 시기인 1636년까지 20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러한 부역 부담을 통해 이에야스는 다이묘를 손쉽게 통제하였으며, 에도 성은 260년 간 도쿠가와 쇼군의 거성으로 자리 잡았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에도막부는 이런 공사의 비용을 도자마 다이묘들에게 부담시켜 그들이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것과 함께 다이묘들이 교대로 도쿄에 와서 거주하게 참근제도 역시,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것이라서 이 역시 다이묘들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이렇게 에도성 공사가 본격화될 1605년 4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넘기고 은거했다. 2대 쇼군 히데타다는 토목 공사 부교에 나이토 타다키요, 간다 마사토시, 쓰즈키 다메마사, 이시카와 시게쓰구를 임명하고 당시 축성술의 대가라고 불렸던 도도 다카도라에게 에도성의 기본 설계를 맡겼다.
다카도라는 이미 고리야마성, 와카야마성, 고쿠라성을 계획한 경험이 있었고 니조성과 후시미성을 설계했었다. 그의 밑에는 도요토미 가문의 성 쌓기에 활약했던 기술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단단한 암반 위에 돌을 쌓은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에도성의 해자는 히비야만을 매립한 갯벌 위에 쌓는 것이기 때문에 무거운 석축은 그냥 가라앉았다. 그래서 진흙 속에 소나무를 나란히 깔고 뗏목을 짜 넣고 긴 말뚝을 박아 고정시킨 다음 돌을 쌓았다. 이런 난공사가 계속 이어지면서 때로 석축이 그대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석축 쌓기가 끝난 뒤에 본격적인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나라 호류지 목수 출신인 나카이 마사키요가 간사이 지방의 솜씨 좋은 목수들을 데리고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는 이미 니조성과 후시미성의 건축 공사에도 참여한 바 있었다.
다카도라가 계획한 에도성은 에도의 도시계획인 달팽이 모양에 따라 외곽식 구조였다. 이것은 혼마루의 주변에 니노마루, 산노마루, 기타노마루의 외곽을 소용돌이 모양으로 배치해 가는 구조로 축성계획으로는 가장 복잡하여 적이 공격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에도성은 혼마루 중앙에 솟아 있는 대천수의 동북서쪽에 소천수를 에워싸듯 짓는 마치 고리처럼 연결하는 환립식 천수였다. 혼마루의 중앙에 대소 4개의 천수로 둘러싸인 덴슈마루라는 방어구역을 만들어 설령 혼마루가 공격당해도 이 덴슈마루만으로도 방어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1607년 9월에 혼마루가 완성되어 당시 쇼군 히데타다가 거주하고 있었다. 그 서북쪽에 이다 마사무네(센다이), 우에스기 가게카츠(요네자와), 가모 히데유키(아이즈) 등 간토와 도호쿠 지방의 여러 다이묘가 높이 18.8m의 덴슈마루의 석축을 쌓았다. 그리고 1607년에 또 대천수대 석축으로 3.9m를 추가로 쌓았다.
이 때문에 대천수대는 혼마루보다 높게 지어졌고 약 19.7m의 석축 위에 높이 44.3m의 외관 5층 대천수가 세워졌다. 내부는 지하창고가 있는 지하 1층, 지상 6층 전체 7층으로 평면의 크기는 동서 약 33.9m, 남북 약 38.2m, 최상층은 동서 약 13.1m, 남북 약 16,4m였다. 혼마루는 에도성보다 20m 정도 높은 곳에 있었고 천수대는 19.7m 5층 건축 44.3m의 높이를 더하면 지상 84m의 대천수가 있었으니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건물이었다. 지붕은 비바람을 견뎌낼 수 있도록 튼튼하게 만든 납기와를 얹었다.
이것이 에도성의 첫 번째 천수였고 이를 게이쵸도 천수 慶長度天守라고 부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망 후, 2대 쇼군 히데타다는 1622년 혼마루 어전 나카오쿠 서쪽에 위치한 게이초 천수를 파각했다. 히데타다는 위대한 아버지에게 충실한 후계자였지만 존재감이 미약했고 그래서 천수만은 자신의 의도대로 세우려고 했다. 1623년에 오오쿠의 서쪽과 인접한 기타하네바시앞에 혼마루 확장을 명목으로 새로운 천수각으로 중창하였다. 위치는 현재의 천수대가 있는 곳이다.
이 천수를 겐나도 천수元和度天守라고 하는데 게이쵸도 천수에 비해 규모는 1/3로, 높이도 7칸으로 축소되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1633년 3대 쇼군 이에미츠는 아버지 히데타다가 세운 겐나 천수를 파괴했다. 이에미츠는 아버지보다 할아버지 이에야스를 더 아끼고 사랑했으며, 아버지의 유산을 파각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천수대 돌담은 구로다 다다유키(黑田忠之), 아사노 미쓰나리(浅野光成), 천수의 1층 미쓰노 가츠나리水野勝成, 2층은 나가이 나오마사(永井尙政), 3층은 마츠다이라 야스시게 松井康重, 4층은 마쓰이다이라 다다쿠니(松平忠國), 5층은 나가이 나오키요(永井直清) 등 7명의 다이묘에게 건축을 명령했다.
이 세 번째 천수는 겐나천수를 웃도는 목조건물로, 세계 최대라는 장대한 천수를 쌓았다. 간에이 천수라고 불렸던 이 천수는 안타깝게도 1657년 메이레쿠의 대화재로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
당시 천수에 화재가 난 것은 닫혀 있어야 할 2층의 구리창 열려 있어서 이 사이로 화재의 불씨가 파고들어 천수는 물론 에도성의 상당 부분이 불에 타버렸다.
당시 화재로 불타버린 천수는 다시 복원되지 않았고, 현재는 천수대만 남아 있게 되었다.
다음 글에는 에도(도쿄)가 성과 도시의 모습을 갖춘 초기와 오늘날의 모습을 비교해 가면서 어떻게 에도가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글들이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