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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지 시장의 어제와 오늘

by 늘 담담하게


2018년 츠키지 시장이 토요스 시장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도쿄를 여행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들렀던 곳이 도쿄 주오구에 있는 츠키지 시장築地市場이다. 츠키지 시장에 대해서 일본에서 설명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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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지 시장( 築地市場)은 일본 도쿄도 주오구 츠키지에 위치한 공설의 수산물 전문 도매시장이다. 일본의 에도 시대부터 도쿄지역의 식품이 거래되는 시장이었으며, 원래는 1923년부터 니혼바시 어시장으로 이름으로 개업하였으나 간토 대지진의 여파로 파괴된 뒤 193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다시 개설하게 되었다. 이 시장의 규모는 약 23헥타르의 면적에 8개소의 도매업자와 약 1,000여 곳의 구매 중개인 업자들이 수산물을 경매 처분한다. 2005년 기준으로 하루에 약 2,167톤의 수산물과 1,170톤의 청과물이 거래되며 매출 수익을 얻은 금액으로는 약 5,657억 엔(약 6조 원 내외)에 다다른다. 그리고, 수산물 말고도 과일이나 채소 등과 같은 청과물, 닭고기와 계란, 채소절임과 각종 가공 식품군 등이 거래되고 있다."



도요스로 이전하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수산시장으로 일식의 핵심재료 중 하나인 수산물을 공급하는 대표적인 곳이었다. 긴자나 롯폰기 등의 도심가에 위치한 일식, 일본요릿집, 스시 가게 등에 납품하며, 시장에 위치해서 바로바로 신선한 생선을 공급받아 비교적 가성비가 넘사벽인 스시 가게들도 유명한 맛집이 많았다. 츠키지시장의 시세에 따라 일본 수산물의 시세가 변동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워낙 수산시장으로서는 일본의 대표적인 곳이라 미스터 초밥왕, 어시장 삼대째 등의 만화부터 드라마에 여행채널 등 수많은 미디어작품들에도 수차례 등장하여 한국인들이나 외국인들에게도 익숙한 경우가 많다.


1935년 관동대지진 이후 현 위치로 이전한 뒤 거의 90년간 사용해 왔다가 토요스시장 개장을 앞둔 2018년 10월 6일을 마지막으로 장내시장은 폐점했으며 토요스시장이 개장한 2018년 10월 11일부터 재개발을 위한 해체 공사에 들어갔다. 장외시장은 이후로도 현 위치에 계속 남아 있다.


사실 많은 여행자들이 츠키지 시장 자체보다는 지금도 남아 있는 츠키지 장외시장의 맛집을 찾는 정도일 뿐, 츠키지 시장이 어떤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앞으로 츠키지 장외시장과 토요스 시장의 맛집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할 예정이므로 이번에는 츠키지 시장의 역사를 한번 되돌아보기로 하자.


*츠키지 시장의 전신, 니혼바시 어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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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스 시장으로 옮긴 츠키지 시장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일단 츠키지 시장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니혼바시 어시장日本橋魚河岸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최초로 어시장을 연 것은 1590년 8월,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오사카에서 에도로 이주한 모리 마고에몬 일가와 부하 어민들이었다. 그들은 막부나 다이묘에게 도미 등의 생선을 우선적으로 헌상하는 대신, 나머지 어패류를 시중에 거래할 수 있도록 허가를 얻었다. 모리 일가에 이어 후에 어시장에서 개업한 야마토야 스케고로는 슨슈(駿州시즈오카현) 어민들에게 자본금을 대출해 주고 바닷속에 그물을 쳐서 활어장을 설치하게 함으로, 막부와 다이묘에게 올리는 헌상용 생선을 대량 수주하였고 그 결과 유력한 어상이 되었다. 이때 정착한 사람들은 모리 마고에몬을 따라온 어부 33명과 스미요시 신사의 신관이 니혼바시 혼오다와라 정에 거주했다. 이들이 에도 막부에서 어업권을 얻은 곳은 에도 미나토의 텟포즈였고, 이 땅을 매립하여 츠키시마로 삼고 1645년, 그들의 고향인 츠쿠다무라의 이름을 따서 츠쿠다지마라고 이름 짓고 다음 해에 스미요시 신사를 창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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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바시 어시장은 칸에이 연간(寛永年間 1624-1644) 무렵 앞서 설명한 대로, 츠쿠다지마의 어부에게 도미를 포함한 35종의 어패류를 에도 미나토·니혼바시 강·도산보리·다쓰노구치·와다쿠라문 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따라 에도성 내로 들여와서 헌상했다. 그리고 남은 물고기를 니혼바시혼오다와라초에서 판매를 했다. 이에 따라 물고기를 잡는 사람과 장사하는 사람이 분리되어 본격적인 어시장으로 발전해 갔다. 뒤 이어 여러 지방의 어업인들이 뭉쳐 네 개의 도매상이 결성되었고 각각 혼오다와라초, 모토후네초, 혼고초, 니혼바시혼오다와라초의 어시장으로 확장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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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반, 에도의 인구는 15만 명에 이르러 어패류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에도는 인구 100만 명이 넘는 거대 도시가 되면서 어시장도 크게 발전했다. 18세기 전반의 기록에 의하면, 어패류의 도매상, 중개인, 판매업자의 수가 혼후나초 조합, 혼오다와라초 조합, 혼후나초요코다나 조합, 안진초 조합의 4개 그룹으로 총 500명까지 증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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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바시 어시장 정월 초이틀날의 모습


막부의 식탁을 책임지는 일은 어업 상인으로서는 영예로운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금이 시중 시세보다 턱없이 낮아 거래할 때마다 손실이 컸다. 큼직한 고급어 ‘도미’의 경우, 막부에 상납하는 가격은 시중 가격의 5~6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시장의 도매상들은 막부에게 손실 보상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18세기 초반에는 니혼바시, 간다, 요쓰야, 아카사카 등 11개소에 조성지를 하사 받아 그 땅의 수입으로 손실을 보충하였다.

img-025351075-th01-sq.jpg 니혼바시 어시장 발상지를 기념한 비석
니혼바시 어시장.jpg 예전 니혼바시 어시장이 있던 지역을 표시한 그림 오토히메광장乙姫広場에 발상지 기념비가 있다.

17세기 전기의 어시장의 모습은 에도시대의 지도 병풍인 ‘에도즈뵤부’에, 19세기 전반의 모습은 에도시대의 지리책인 ‘에도메이쇼즈에’에 그려져 있다. 아침저녁으로 다양한 어패류가 대량으로 포획되어 점포 앞에 진열되고 거래되었다. ‘에도 명소도회’에 그려진 생선을 진열해 놓은 가판대는 ‘이타부네’라고도 하는데, 대부분 유력 상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타부네’에는 각각의 판매권이 있어서 이를 하나 또는 몇 개 빌려 장사를 하는 소규모 상인도 많았다. 이 이타부네는 처음에는 강기슭 노천에 설치되었지만, 시장이 발전하면서 강변 길가에 생선을 저장할 헛간이 세워져 그 헛간 밑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에는 혼후나초에서 혼오다와라초의 상점 앞 길가까지 확장되었다.


어시장은 니혼바시 지역에 1656년까지 있었던 ‘요시와라유카쿠’와 1842년까지 있었던 ‘가부키고야’의 사카이초, 후키야초(현재의 니혼바시 닌교초 3초 메 근처)와 함께 ‘하루 천 냥’이라고 불린 에도의 가장 번화한 곳으로, 부지는 폭 1간(약 1.8m)* 길이 20간(약 36m)에 천 냥이라는 높은 가격이 붙었다.


어시장의 유력 도매상은 풍부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가부키, 서화, 우키요에, 하이카이 등 에도 문화의 스폰서가 되거나, 집안에서 많은 학자나 문화인을 배출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이쿠의 시인 ‘마쓰오 바쇼’의 경제적 후원자이자 바쇼의 제자인 스기야마 산푸는 막부에 상납을 담당하는 잉어 도매상인이었다. 어시장은 일본이 근대 국가가 된 후에도 계속 존속하여 도쿄인의 식탁에 전국의 어패류를 모아서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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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지도를 보면 이치코쿠바시 一石橋, 니혼바시日本橋, 에도바시江戸橋 사이의 기타가와기시北河岸 일대에는 생선 도매상·생선중개상, 도매상, 찻집 ·음식점 등이 줄지어 있었다. 맞은편 남쪽 강변의 욧카이치에는 건어물이나 소금 생선을 다루는 도매상이 있었다. 여기에 카즈사(지금의 치바현 중부)나 아와(지금의 치바현 남부)의 소보, 이즈 반도에 기이 등 간사적으로 획기적으로 발전한 망어법을 가진 어민들이 진출해 왔다.



*츠키지 시장

니혼바시 어시장이 츠키지 시장으로 이전한 계기는 1923년의 관동 대지진이었다. 쑥대밭이 된 도쿄를 새롭게 개조하기 위한 계획으로 각 시설들을 재배치하기로 결정하고 니혼바시 어시장도 츠키지로 옮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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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이전의 니혼바시 어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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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으로 파괴된 니혼바시 어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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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니혼바시 어시장.jpg 옛 니혼바시 어시장이 있던 니혼바시부근 현재의 모습


츠키지築地는 원래 ‘매립지’라는 의미로 도쿄 츠키지도 매립지이다. 에도 시대, 1657년(메이레키 3년)의 메이레키 대화재 때 소실되었던 아사쿠사의 에도 아사쿠사 고보 (현재의 츠키지혼간지)의 이전을 위해 츠쿠다지마(佃島)의 거주자에 의해 이 땅이 조성되었다. 그 후, 정토진종의 사원과 묘지가 속속 건립되었고, 주변은 테라마치처럼 되었다. 다른 지역은 무가 저택이 많이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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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는 개항지역은 아니었지만 1869년 츠키지 뎃포주(현재 도쿄 미나토에서 아카시초까지)에 외국인 거류지가 마련됐다. 오늘날 주오구 아카시초 일대의 약 10헥타르이다. 그러나 요코하마 거류지인 외국 상사들은 요코하마를 떠나지 않았고 주로 기독교 선교사들의 교회당이나 미션스쿨이 들어섰다. 이로 인해 기독교계 학교들과 재일 미국인 자녀를 위한 학교인 아메리칸 스쿨 인 재팬의 발상지가 되기도 한다.


또한 외국 공관도 많아 1875년 미국 공사관이 설치되어 1890년 현재의 아카사카로 이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츠키지에 들어선 공사관과 모두 9개국에 달했고, 전성기에는 300명 이상의 외국인이 살았다. 츠키지 거류지는 1899년 치외법권 철폐로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늘어서 있던 양관도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모두 사라졌다)


에도 시대 말기, 에도 막부는 군사력 증강을 목적으로 츠키지에 강무소를 설치한 후 해군 부문의 군함조련소를 설치하였고, 카쓰 가이슈 등이 교수로 부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영주 저택, 강무소 흔적은 메이지 정부에 접수되어 태평양 전쟁 이후 구 일본 해군이 해산될 때까지 주로 해군 용지로 사용되었다. 과거에 츠키지에 있던 구 일본 해군 관계 시설은 해군 본성, 해군 사관학교, 해군 군의관 학교, 군함조련소, 해군 경리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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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지에 있던 해군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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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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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군의관 학교


이 츠키지로 이전은 처음부터 순조로운 것이 아니었다. 1928년 8월 니혼바시 어시장 이전에 따르는 판주권의 보상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했다. 판주권은 시장에서 물고기를 사고파는 영업권의 일종으로 에도시대부터 인정받은 판주를 늘어놓을 권리였다. 이 보상문제로 인해 츠키지로의 이전 완료까지는 십수 년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이후 거의 90년간 도쿄의 중심 수산물 도매시장으로 이용되어 오다, 2001년에 도쿄도의 정비계획에 따라 도요스시장 이전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도요스시장 개장을 앞둔 2018년 10월 6일을 마지막으로 장내시장은 문을 닫았으며, 도요스시장이 개점한 2018년 10월 11일부터 재개발을 위한 해체 공사에 들어갔다. 장외시장은 이후로도 현 위치에 계속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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