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 밤의 기적소리만큼

당신은 나를 얼마만큼 사랑해?

by 늘 담담하게

"왜 여자들은 그렇게 자꾸 사랑을 확인하려 해?"


다른 부서의 입사 동기인 정팀장이 어느 날 점심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그녀에게 푸념하던 이야기였습니다. 현재 만나고 있는 그의 여자친구가 끊임없이 그에게 사랑을 확인하려 해서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오빠는 나를 얼마큼 사랑해? " 항상 그렇게 시작되는 질문..


그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하면 "오빠는 날 사랑하지 않는 거지? 내가 싫어진 거지? 말해봐 말해봐"라고 하며 그녀는 토라지고..


"저 하늘만큼 사랑해"라고 대답을 하며..


"그렇게 무성의하게 대답을 해야 해? 그런 대답 식상하지 않아?"

그렇게 꼬투리를 잡고 한없이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자기는 남편에게 그런 말 했었어? 내가 알기론 자기는 그런 질문 같은 거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설마 나도 여자인데 한 번도 그런 걸 묻지 않았으려고.."

"오호! 자기도 그런 질문을 했던 거야? 와.... 나는 세상 여자들이 다 그렇다 해도 김인혜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도도하고... 무심한 자기가 그런 걸 물었다는 거야? 놀랍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사귀는 사람에게 매달려 사랑을 확인하는 타입이 아니었습니다. 딱히 그런 것을 묻는 것도 그녀에게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며 그러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결혼 전에 그에게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딱 한번.


그녀와 달리, 그는 낯간지러운 애정 표현도 잘하는 편이라 새삼 확인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와 사귀는 기간이 길어지고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쯤 한 번쯤은 그에게 물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단골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였습니다. 서서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을 때, 그녀는 자세를 고쳐 잡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저기... 나.. 묻고 싶은 게 있어.."

"묻고 싶은 거... 어 그게 뭔데..."

"저기..."

"무슨 이야기인데 그렇게 틈을 들여..."


그녀는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습니다.


"음.... 민우 씨는 나를 얼마나 좋아해?"

그 말을 들은 그는 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와 사귀기 시작한때부터 한 번도 그런 것을 묻지 않았었던 그녀. 애정을 표현하는 것도 서툴러서, 늘 에둘러 말하거나 제대로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그녀가, 그런 질문을 하다니 그도 놀란 모양입니다.


그녀는 그의 대답이 궁금했습니다. 다른 남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할지... 아니면 왜 그런 걸 묻느냐고 할지... 잠시 동안 침묵모드였던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얼마만큼 인혜 씨를 좋아하느냐고.... 음,.... 생각지 못했던 질문인데.... 그래도 인혜 씨가 묻는 거니까 대답을 해줄게. 난 말이야.... 인혜 씨를 한 밤의 기적 소리만큼 좋아해..."


그것뿐이었습니다.......... 한 밤의 기적 소리만큼....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늦었네. 나 바래다주고 갈려면... 어서 일어나자..."


카페에서 나와 그녀의 집을 향해 걸을 때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그리고 살며시 말했습니다.


"고마워 그렇게 좋아해 줘서..."



"아니 한 밤의 기적소리만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끝이야? 대답이 고작 한 밤의 기적 소리만큼 좋아한다니.. 그 기적소리가 뭔데... 난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네... 자기는 그 말에 공감했다는 거잖아... 뭐야... 이런 시추에이션은.." 정팀장의 푸념에 그녀는 그냥 웃고만 있었습니다.


한밤의 기적 소리만큼. 정팀장이 알턱이 없겠지요. 그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으니까요. 그녀가 즐겨 읽었던 작가의 책을 그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작가의 책들을 읽어봤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작가는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작가였는데도...


그러니 그 대답은 충분하고도 넘쳐 나는 멋진 대답이었습니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한테 묻는다.

"너는 나를 얼마나 좋아해?"

소년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조용한 목소리로 "한밤의 기적소리만큼"이라고 대답한다.


소녀는 잠자코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린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밤중에 문득 잠이 깨지."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어. 아마 두시나 세시 그쯤이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몇 시인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한밤중이고 나는 완전히 외톨이이고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알겠니 상상해 봐 주위는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소리라고는 아무것도 안 들려. 시곗바늘이 시간을 새기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아. 시계가 멈춰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는 갑자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한테서,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장소로부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고 그리고 격리되어 있다고 느껴. 내가, 이 넓은 세상에서 아무한테도 사랑받지 못하고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돼. 내가 그대로 사라져 버려도 아무도 모를 거야, 그건 마치 두꺼운 철상자에 갇혀서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 같은 느낌이야. 기압 때문에 심장이 아파서 그대로 찍히고 두 조각으로 갈라져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알 수 있어?"


소녀는 끄덕인다. 아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소년은 말을 계속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가장 괴로운 일 중의 하나일 거야. 정말이지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프고 괴로운 그런 느낌이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죽고 싶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상자 안의 공기가 희박해져서 정말로 죽어버릴 거야. 이건 비유 같은 게 아니야, 진짜 일이라고 그것이 한밤중에 외톨이로 잠을 깬다는 것의 의미라고 그것도 알 수 있겠어?"


소녀는 다시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소년은 잠시 사이를 둔다.


"그렇지만 그때 저 멀리에서 기적소리가 들려. 그것은 정말로 정말로 먼 기적소리야.. 도대체 어디에 철도 선로 같은 것이 있는지, 나도 몰라 그만큼 멀리 들리거든. 들릴 듯 말 듯 하다고나 할 소리야. 그렇지만 그것이 기차의 기적소리라는 것을 나는 알아. 틀림없어.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그리고 다시 한번, 그 기적소리를 듣지. 그러고 나서 내 심장은 아파하기를 멈춰. 시곗바늘은 움직이기 시작해. 철상자는 해면을 향해서 천천히 떠올라. 그것은 모두 그 작은 기적소리 덕분이야.. 들릴 듯 말 듯한 그렇게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라고.. 나는 그 기적소리만큼 너를 사랑해"


거기에서 소년의 짧은 이야기는 끝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밤의 원숭이 중에서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