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들여다볼 때면 자주 마주치는 풍경이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갓 태어난 손주를 품에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들이다. 댓글란에는 축하와 부러움이 가득하다. 나 역시 그 사진들을 보며 미소 짓곤 했지만, 언제나 그 미소 뒤편에는 묘한 씁쓸함이 따라붙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다. 밤낮이 뒤바뀌고 울음소리에 잠을 설치며 작은 생명 하나를 지켜내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날들이다. 그 시간 속에서 노부모의 도움은 새내기 엄마 아빠에게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 된다. 누군가 아이를 안아주고, 밥을 차려주고, "괜찮다"라고 토닥여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조금은 견딜 만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그런 축복이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아이를 봐줄 친정엄마도 시어머니도 없었다. 그저 우리 둘 뿐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며 아내의 상태는 빠르게 무너져갔다. 검은 구름이 천천히 밀려오듯 아내는 조금씩 어둠의 세계 안으로 갇혀갔다. 아침이 와도 저녁이 되어도 아내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말수는 눈에 띄도록 줄어들었고 아이를 안아주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 마음도 함께 가라앉았다.
나는 또다시 육아휴직을 생각해 봤다. 아직 6개월의 육아휴직을 더 사용할 수 있었다. 아내 곁에 있어주고 아이를 돌보며 우리 가족을 지켜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회사를 쉴 수도 그만둘 수도 없었다.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병원비며 분유값이며 매달 나가는 돈들을 감당해야 했다. 더욱이 첫 번째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 후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렇다고 아내와 갓난아이를 집에 남겨두고 회사로 향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막막함이 목까지 차오르던 어느 날, 처가 형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다. 형님은 당시 부산 명지에 살고 있었다. 거제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고, 다행히 회사 통근버스 노선이 닿는 곳이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아내의 오빠였지만, 그날만큼은 그가 훨씬 더 형처럼 느껴졌다.
"최서방, 우리 집에서 당분간 지내는 게 어때? 아이랑 둘만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처가 형님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 평소에도 가족을 아끼는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유독 더 조심스럽고 단호했다. 전업주부인 아내의 올쾌 언니도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고모가 지금 혼자 있으면 안 돼요. 제가 옆에서 같이 있어볼게요."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따뜻하게 들렸는지 모른다. 고마웠지만 동시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처가 형님네도 세 살, 한 살배기 두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좁은 아파트 안에서 아이 둘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전쟁 같을 텐데, 거기에 우리 가족까지 들어가 산다는 건 너무 큰 짐이 아닐까. 특히 아내의 상태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우울증 환자는 때로 감정 기복이 심하고 일상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그것이 처가 형님 가족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밤마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밤늦게 아내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내는 처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가기 싫어. 그냥 집에 있을래."
아내의 작은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오빠네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아내를 짓눌렀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말했다.
"혼자 힘들어하지 마. 지금은 도움이 필요한 시기야. 형님이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까, 당분간이라도 그렇게 지내보자."
아내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준 그들의 마음이, 우리를 움직이게 했다.
짐을 싸던 그날 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같은 피를 나눴다고 해서 명절에 한자리에 모인다고 해서 모두가 진짜 가족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가족이란 누군가의 어두운 시간에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들이 아닐까. 말없이 곁에 서서 함께 짐을 나눠지려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 가족에게 처가 형님 가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최소한의 옷가지와 짐만 챙겨 처남에 집으로 들어갔다. 이사라고 하기엔 너무 간소한 짐이었다. 아기 용품과 며칠 치 옷가지 그게 전부였다. 마치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가벼웠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