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한 장의 달력처럼 덧없이 흘러갔다. 분홍빛 벚꽃이 흩날리던 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창가에 앉아 떨어지는 꽃잎을 세던 아내의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매미 소리로 가득했던 더운 여름은 어느새 우리 가족을 스쳐 지나갔고, 단풍으로 물들었던 시원한 가을은 바쁘게 저물었다. 그리고 진눈깨비를 동반한 차가운 겨울이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무섭게 우리 가족 곁에 찾아왔다.
한반도의 남쪽 끝 거제도의 겨울은 꽤나 추웠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은 두꺼운 외투를 뚫고 들어왔고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냉기는 방 안 구석구석을 얼어붙게 했다. 그리고 추위와 함께,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던 불청객도 다시 찾아왔다. 두 번째 우울증이 돌아온 것이었다.
아내의 모습은 조금씩, 하지만 확연하게 바뀌어갔다. 활기찼던 목소리는 추위와 함께 점점 희미해졌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작아졌고 아이를 부르는 소리에도 힘이 빠져갔다. 맑던 눈빛은 매서운 겨울밤 하늘처럼 점차 흐려졌다. 한때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입가는 다시 무거운 침묵을 머금고 있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아내는 이불속 깊숙이 몸을 숨겼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으슥한 곳으로 몸을 숨기는 작은 동물처럼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려 했다. 두꺼운 이불은 아내에게 세상과 자신 사이에 쌓아 올린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었다.
"여보..."
어느 날 아침, 아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나... 기분이 너무 이상해... 뭔가 달라..."
아내의 생기가 하루하루 말라가는 것을 나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아내의 눈동자에는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식탁 위에 쌓여가는 먹다 만 컵들, 아무렇게나 방치된 책들, 며칠째 같은 자리에 널브러진 옷들이 모두 말하고 있었다.
"감기 기운인가?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감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약이라도 며칠 먹고 나면 훌훌 털고 일어날 터였다. 하지만 우울증은 달랐다. 서서히 스며들어 영혼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병이었다. 약으로도 의지로도 쉽게 이겨낼 수 없는 긴 싸움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우울증이 돌아온다는 것은 단지 아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가족 전체의 일상이 다시 뒤엉킨다는 뜻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주말이면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가던 평범한 일상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의미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일상의 리듬이 깨어져버리는 것이었다. 함께 웃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산책을 나가던 그 평범하고 소중한 시간들이 다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아니, 이미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슬펐다.
'아직 괜찮아, 며칠만 지나면 나아질 거야.'
애써 믿고 싶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의 표정에서, 아내의 목소리에서, 아내의 모든 몸짓에서 느껴지는 그 익숙한 무거움을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었다. 겨울과 함께 우울증도 그렇게 돌아왔다.
아내의 우울증은 서서히 하지만 확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단순한 피로감으로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졌고 이불을 걷어내는 동작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침대에서 거실까지 불과 몇 미터의 거리가 아내에게는 먼 여행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한동안 아침 식사 준비를 즐겁게 하던 아내였다. 계란 프라이를 부치는 소리, 토스트가 튀어 오르는 소리, 커피포트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에는 모두 아침의 온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주방 앞에 서는 것조차 큰 결심이 필요해 보였다. 주방은 점점 조용해졌고 우리의 아침 식탁도 점점 단조로워져 갔다.
아내는 침대 한쪽 구석에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햇빛이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아내의 얼굴을 비춰도 아내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아이가 울어도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아내에게 아이가 우는 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런 아내의 옆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무엇을 해줘야 할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창밖에는 겨울 해가 짧게 비치고 있었지만 아내에게는 그마저도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식사량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반 공기를 겨우 비웠고 때로는 숟가락을 든 채로 한참을 멈춰 있곤 했다. 밥알 몇 개를 입에 넣고는 씹는 것조차 잊은 듯 멍하니 있었다.
"먹을 만해?"
하고 물으면 고개만 끄덕였지만 그 고개 끄덕임마저 힘겨워 보였다. 음식의 맛을 느낄 여유조차 없는 것 같았다. 밤이면 가끔 이유 없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왜 우는 거야?"
라고 물으면
"나도 모르겠어..."
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대답은 나 또한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유를 알 수 있다면 해결책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아내 자신도 모르는 슬픔 앞에서는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아내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너무 피곤해..."
아내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신체적 피로가 아니었다. 아내의 영혼이 지쳐, 존재 자체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머리를 감는 것도 옷을 갈아입는 것도 큰일이 되어버렸다. 욕실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되돌아오는 날도 많았다. 아내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을 또다시 피했다. 화장대 앞을 지나갈 때면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아 현실 속 자신을 부정했다. 그 거울 속에는 자신이 잃어버린 모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일까.
특히 마음 아픈 건 아이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아이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피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자신의 우울한 감정이 아이에게 전해질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아이가 엄마를 찾을 때마다 아내의 표정에는 미안함과 자책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겨울은 깊어지고 우리 집의 온기도 조금씩 식어갔다. 나는 창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봄이 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언제쯤 다시 아내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이 겨울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믿고 있었다. 아무리 긴 겨울이라도 결국 봄은 온다는 것을. 그때까지 나는 아내 곁을 지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