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출퇴근 버스가 형님네 아파트 근처를 지나간다는 사실은 꽤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새벽 6시 30분이면 집 앞에서 멀지 않은 정류장으로 가서 출근버스에 올라탔고 저녁 7시가 되면 반대편 정류장에서 다시 내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고 끝났다.
세 개의 방이 있는 평범한 34평 아파트였다. 그중 옷방으로 쓰던 작은 방 하나가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공간이었다. 어른 둘과 아이 하나가 지내기엔 비좁은 곳이었지만 그곳은 우리에게 소중한 안식처였다. 남의 집이라는 불편함보다 중요한 건 의지할 누군가가 있다는 안도감이었다. 아내가 혼자 견뎌내야 할 긴 시간들을 누군가와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우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상을 재건해나가야 했다.
매일 저녁 퇴근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이들의 모습과 아내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거실에서는 아이들 셋이 뒤섞여 뛰노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내가 누워있을 방은 언제나 조용했다. 문고리를 잡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내는 어김없이 작은 방에 누워 있었다. 때로는 아이와 함께 잠들어 있었고 때로는 천장을 향한 채 멍하니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과연 나아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불안은 매일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였다. 첫째 조카와 둘째 조카 사이에서 아이는 금세 적응해 갔다. 아이들끼리는 원래 그런 법이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세 아이의 웃음소리는 그 집안의 유일한 햇살이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면 작은 위안이 되었다.
저녁 식사 시간은 늘 조심스러웠다. 형님네 가족은 언제나 우리를 배려해 주었지만 우리는 손님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아내는 대부분 식사를 거르거나 조금 먹는 시늉을 하고는 이내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아내의 올케언니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도 아내의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다. 식탁 위에 놓인 따뜻한 국 한 그릇이 식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은 좀 나아 보이던가요?"
매일 저녁 아내의 올케언니에게 건네는 첫마디였다. 그녀는 항상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미역국 조금 먹었고, 점심엔 과일 조금 먹었어요. 그래도 오늘은 잠깐 같이 바깥 산책도 하고 그랬어요."
누군가 곁에서 챙겨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아내와 아이만 덩그러니 집에 남겨두었다면 아내는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을 터였다. 아내의 올케언니는 정말 헌신적으로 아내를 돌봐주었다. 함께 마트에 가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공원에 나가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표정은 구름에 가린 달빛처럼 여전히 흐릿했다.
밤이 되면 작은 방에서 우리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잠든 후 아내와 나는 속삭이듯 짧은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은 아내의 하루 일과에 대한 것들이었다.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를 다녀왔는지 기분은 어땠는지 물어보곤 했다. 단조로운 질문들이었지만 그것만이 아내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느다란 실이었다.
"미안해. 이렇게 폐만 끼치고…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정말 모르겠어."
아내는 자주 미안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 가슴 한편이 무너져 내렸다.
"미안할 게 뭐 있어. 우리는 가족이잖아. 오빠네도 가족이고. 나중에 갚으면 되지. 천천히 회복에만 신경 쓰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내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아내와 아이를 남겨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혹시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형님네 가족에게 민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들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처음 일주일 정도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일상,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하지만 곧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며칠째 아내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형님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누워만 있을 건데? 기운을 차리려고 노력해야 할 거 아니야!"
그의 말에는 걱정과 함께 답답함이 섞여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시기를 겪었기에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우울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우울증이 의지의 문제로 보일 수 있다. 조금만 노력하면 조금만 마음을 다잡는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한다.
아내의 올케언니도 나름대로 아내를 돕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함께 요리를 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하고 근처 문화센터 프로그램을 알아봐 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의 반응은 언제나 같았다.
"가기 싫어요..."
그 한마디에는 거절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과 무기력 그리고 자신조차 설명할 수 없는 막막함이었다. 우울증이란 게 그렇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당사자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마치 철벽을 마주하는 것처럼 그 누가 찾아와도 문전박대당할 지경이다. 아내는 점점 더 자신의 껍질 속으로 움츠러들어갔다. 가족들의 관심과 배려조차 부담스러워했다.
가장 힘든 건 아내 자신이었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모든 가족이 힘들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죄책감이 우울증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내가 왜 이럴까... 다들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아내는 자주 그런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를 달래야 했지만 솔직히 나 역시 지쳐가고 있었다. 매일 밤 방 안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과 형님네 가족들이 건네는 조심스러운 말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조금씩 짓눌렀다.
어느 날 밤 나는 작은 방의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고 아파트 단지의 가로등이 흐릿하게 빛났다. 세상은 여전히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내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아내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우리에게는 함께 키워야 할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를 도와주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들의 손길이 있었기에 우리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비록 철벽 같은 우울증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지만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창문을 닫으며 내일도 모레도 이 작은 방에서 아내와 함께 버텨내겠다고 조용히 다짐했다. 언젠가는 이 시간도 지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겠다고. 작은 방의 불을 끄자 어둠이 조용히 우리를 감싸 안았다.
두 달 동안 우리는 형님네 집의 작은 방 하나에 우리 가족의 삶을 눌러 담았다. 방은 문을 닫으면 세 걸음이면 벽에 닿을 만큼 좁았다. 낮에는 이불을 가지런히 개어 벽에 붙여두고 저녁이면 다시 펼쳐 잠자리를 만들었다. 바닥에는 아이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와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널브러저 있었다. 때때로 창문을 스쳐 들어온 햇살이 먼지를 비출 때면 나는 그 빛이 우리 집 거실을 스쳐가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우리가 떠나온 우리 가족의 집이 그리운 순간이었다.
두 달이 지나고 우리는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의 상태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마음의 구름이 자주 찾아왔고 때로는 그늘이 깊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시절 이후 우리는 달라져 있었다. 무너진 마음 사이에 다시 작은 순이 돋듯 삶은 천천히 방향을 찾아가고 있었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은 누군가의 온기를 통해 다시 제 체온을 되찾는 존재라는 걸 그때 알았다.
집을 나서던 날 형님네는 준비해 둔 밑반찬 봉투를 건넸다. 김치, 멸치볶음, 장조림, 시금치나물. 투명한 통들이 비닐봉지 안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이상하게 뭉클했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그 봉투를 품에 안았다. 그날 우리는 다시 집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의 일부는 여전히 그 작은 방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인생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작은 방 한 칸이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가 되는 순간이 될 수 있다. 그 방에서의 두 달은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데 작은 쉼이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