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육아휴직과 두 번째 육아휴직을 지나며 내 마음도 조금씩 닳아갔다. 아내의 우울증은 짙은 안개처럼 집 안 구석구석을 채워갔고 어느새 내 숨결마저 옥죄어왔다. 처음엔 오로지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일에만 마음을 두었다. 그럴 때면 내 감정은 언제나 뒤로 밀려났다. 아픈 사람이 아내인데 내가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 안의 울음을 꾹꾹 눌러 삼켰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깊은 물속에서 끝까지 숨을 참는 사람처럼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견뎠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 눈을 뜨면 한동안 그대로 누워 두 귀에 모든 집중을 모았다. 이불 너머로 들려오는 아내의 숨소리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고요 속에 묻힌 그 미세한 숨결을 들으면 오늘 아침의 아내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다. 깊은 잠에 든 건지 혹은 잠에서 깨어 괴로움을 삼키고 있는 건지. 그렇게 나는 매일 아내의 숨을 세며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어때?"
조심스레 묻는 내 목소리는 늘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아내의 대답은 매번 같았다. 조금 나은 날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였고, 대부분의 날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 한편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마치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손끝까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는 억지로라도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오늘은 조금 나아질 거야."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밝은 목소리를 흉내 내야 했다. 누군가는 이 집의 빛이 되어야 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세수를 하며 마주한 거울 속의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눈 밑 다크서클은 짙게 내려앉았고 뺨은 움푹 파여 있었다. 무엇보다 낯선 건 눈빛이었다. 내 안에서 조금씩 희미해져 가던 빛이 어느새 아내의 눈빛을 닮아가고 있었다. 생기를 잃은 삶의 온도가 빠져나간 눈이었다. 면도기를 들 때면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턱선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그 떨림이 내 안의 불안을 고스란히 전해왔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으며 정신을 붙잡았다.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마다 남은 힘을 하나씩 끌어모았다.
‘힘내보자. 오늘 하루만 더 버텨보자.’
집에서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구분되지 않았다. 아침이면 우는 아이를 한 팔로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분유를 탔다. 잠에서 덜 깬 채 아내와 먹을 아침을 준비했다. 집안을 정리하고 누워 있는 아내를 대신해 아이를 달래주었다. 어느새 아이는 엄마를 찾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아프게 했다. 부엌 바닥엔 흘린 분유 자국이 희미하게 말라붙어 있었고 싱크대 위엔 설거지할 그릇들이 매일같이 쌓여갔다. 아이를 먹이고 아내를 깨우고 집안을 정리하다 보면 시계는 언제나 정오를 가리켰다.
오후는 더욱 단조로웠다. 그 단조로움이 때로는 나를 잠식해 갔다. 아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 나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거실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유리창 너머로는 햇살이 따사롭게 쏟아지고 학교를 마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누군가의 하루는 그렇게 평화로웠다. 하지만 나는 그 평화로움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오후가 가고 밤이 찾아오면 꾹꾹 눌러 담았던 생각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 걸까.’
‘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일까.’
아내와 아이가 잠든 깊은 밤이면 생각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시곗바늘이 11시를 넘기고 12시를 향해 갈 때쯤이면 억눌렀던 감정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소리 내어 울 수는 없었다. 아내와 아이가 깰까 봐 입술을 꽉 깨문 채 어깨만 미세하게 들썩이며 흐느꼈다. 목이 메어 숨 쉬기조차 힘든 순간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절망 속에 머물 수는 없었다. 아내를 우울의 늪에서 끌어내야 했고 아이의 여린 손을 꼭 잡아주어야 했다. 누군가는 이 집의 버팀목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남편이자 아버지인 나의 몫이었다. 내가 무너지는 순간 이 집도 함께 무너질 것이었다. 그래서 나만은 절대 쓰러지지 말아야 했다. 비틀거리더라도 끝까지 버텨야 했다.
그런 나에게 유일한 도피처는 술이었다. 처음엔 저녁 식사 후 맥주 한 캔으로 시작했다. 그저 하루의 피로를 풀겠다는 스스로를 향한 작은 위로였다. 하지만 한 캔이 두 캔이 되었고 어느새 맥주는 소주로 바뀌었다. 캔을 따는 ‘푸시’ 소리가 마치 '파이팅'을 외치며 나를 응원하는 소리로 들렸다. 첫 모금을 넘길 때의 차가운 목 넘김 그리고 곧 퍼져오는 알코올의 따스한 기운이 그렇게나 좋았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모든 걱정이 멀어졌다. 세상도 나도 잠시 조용해졌다.
한 잔이 반 병이 되고 반 병이 한 병이 되었다. 한 병은 어느 순간 두 병 이상이 되는 날도 많아졌다. 아파트 편의점에서 술을 살 때마다 점원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또 오셨네요."
점원의 인사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를 내밀며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속은 불편함으로 가득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내 얼굴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부담감도 잠시였다. 집에 돌아와 첫 잔을 들이켜는 순간 모든 게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알코올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쓰디쓴 맛이 점점 달콤하게 느껴졌다.
술병이 비어갈수록 마치 깊은 우물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듯 현실이 흐릿해졌다. 머릿속 고민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두 번째 잔을 마실 즈음엔 온몸이 나른해졌다.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세 번째 잔이 넘어가면 아내의 우울증도 아이의 울음소리도 모두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 순간만큼은 현실의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해방은 잠시일 뿐 곧 다시 찾아올 어둠을 알고 있었다.
술이 깨고 나면, 현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침이 오면 또다시 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알람 소리와 이어지는 아내의 침묵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밤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다시 술잔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스스로 만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