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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끝, 두개의 별

by 오분레터

엄마가 돌아가시고 15년 만에 다시 맞닥뜨린 건 긴 어둠의 터널이었다. 그곳은 작은 불빛조차 스며들 틈이 없을 만큼 완벽히 닫힌 세계였다. 낯설지 않다는 그 익숙함이 오히려 나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마치 오래전 헤엄쳐 나왔던 바다에 다시 발을 담그는 것 같았다. 물은 예전처럼 차가웠고, 물살은 여전히 거셌다.


한 번 발을 들이면 끝없이 아래로 미끄러져 깊고 검은 심연 속으로 쓸려 들어간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음 곳곳을 서서히 잠식해 왔다. 손바닥에는 차가운 땀이 맺혔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술은 얼어붙은 내 몸을 잠시나마 따뜻하게 안아주는 듯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감각 그리고 이내 온몸을 감싸는 느슨한 안도감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 온기는 허상처럼 금세 스러졌고 곧 깊은 절망의 차가움이 더 강하게 스며들었다. 마치 겨울밤 눈 위에 누워 있는 것처럼 처음엔 시린 줄 모르다가 나중엔 온몸이 얼어붙어버리는 것 같았다. 술은 결국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심연으로 이끌 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15년 전과 달랐다.


어둠이 길게 이어진 터널의 끝에서 두 개의 희미한 불빛이 나를 향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작은 빛은 불안하게 떨고 있었지만 분명 나를 부르고 있었다. 파도 소리에 묻히지 않는 작은 목소리처럼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아내와 아이, 터널의 끝에는 분명 그 둘이 있었다.


내 나이 스물한 살 때 세상에서 가장 큰 울타리였던 어머니를 잃었다. 그 순간 세상에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홀로 남겨진 채 텅 빈 존재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는 뿌리 뽑힌 나무처럼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다. 바람이 불면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와 달랐다. 나를 바라봐 주는 애틋한 눈동자가 있었고 함께 숨 쉬는 연약한 온기가 곁에 있었다. 지켜야 할 존재가 생겼다는 사실은 때로 삶을 무겁게 만드는 책임감으로 다가왔지만 동시에 나를 온전히 붙들어주는 단단한 뿌리이기도 했다. 아침마다 아이가 내 곁으로 다가올 때, 아내가 조용히 내 손을 잡을 때,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픈 아내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다. 내가 무너지면 그들 또한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틀거리면서도 정신의 끈만큼은 놓지 않으려 애썼다. 술에 취해 휘청이면서도 아이 곁을 지켰고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도 아침 식탁에 앉아 아이의 밥을 챙겼다. 그 작은 책임감이 어쩌면 나를 깊은 구덩이 끝에서 붙들고 있던 마지막 동아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몸은 점점 지쳐갔고 마음은 오랜 시간 쇠약해져 있었다. 결국 나 역시 그저 나약하고 도움이 간절한 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강한 척하는 것도 어느 순간 버거웠다. 거울 속 내 얼굴은 낯설게 변해어 갔고 눈가에는 지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에게 술은 잠시 머무는 도피처였다. 하루 종일 쌓인 절망과 분노 쉽게 풀리지 않는 답답함을 술 한 잔에 녹여내고 싶었다. 편의점 냉장고 문을 열 때의 차가운 공기와 캔을 따는 순간의 짧은소리, 첫 모금을 삼킬 때의 묵직한 안도감만이 내가 기댈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그 위안은 항상 잠시뿐이었다. 잔이 비워지고 눈을 감으면 더 깊고 차가운 절망이 밀려왔다. 때로는 내면의 폭풍을 더 거세게 불러냈다.


그때쯤 작은 일에도 쉽게 무너지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분노했다. 아이가 흘린 물 한 잔에 소리를 지르고 아내의 작은 한숨에 문을 거칠게 닫았다. 그럴 때면 나는 제어 장치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스스로를 멈출 수 없었다. 폭주하는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은 두려움에 가득 차있었다. 그 안에는 실망도 원망도 아닌 그저 조용한 슬픔만이 담겨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거실 한편에 걸린 사진 한 장과 마주했다. 매일 보던 그 사진이 그날은 이상하게도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사진 속 우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내와 나, 그리고 품에 안긴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날은 봄이었을까. 사진 너머로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아내의 어깨는 가볍게 들려 있었다. 그 눈빛에는 어떤 어려움도 함께라면 견딜 수 있다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순간 내 안에 질문이 일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나는 도망치기에만 급급했을까. 언제부터 나는 우리 가족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위협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을까. 그 순간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그제야 깨달았다.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아내의 우울증도 세상도 아니었다. 바로 술에 숨고 도망치려 했던 나 자신이었다. 아픔은 누구에게나 있었고 치유가 필요한 것은 아내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였다. 사진 속 기억은 그저 과거가 아닌 가족의 끈을 더욱 단단하게 묶어주는 힘이 되었다. 우리는 한때 그렇게 행복했고 그 행복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주 조금씩 그러나 단단하게 나를 붙잡으려 애썼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서서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남편 조금 더 나은 아버지가 되겠다고 되뇌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다짐만큼은 진심이었다. 술잔을 내려놓고 아내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그리곤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나도 조금 힘든가 보네."


그 한마디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가슴 한쪽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더 꽉 쥐어주었다. 그 손의 온기가 천천히 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나도 힘들다"라는 고백은 약함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며 조금씩 걸어가기 위한 시작을 의미했다. 우리는 아직 온전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었다. 함께라면 비틀거리더라도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터널 끝의 두 작은 별은 여전히 흔들렸지만 그 빛이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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