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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4일

by 오분레터

2017년 12월 4일, 우리 부부에게 둘째가 태어났다. 차가운 겨울의 새벽 그날의 공기엔 긴장과 설렘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갑작스러운 산통에 잠에서 깬 우리는 자고 있는 아들을 두고 급히 산부인과로 향했다. 도로 위의 가로등 불빛이 차창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아내의 얼굴이 희미하게 빛났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묘한 떨림이 두려움인지 희망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이 모든 순간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내는 침착했다. 그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우리 삶이 또 한 번 달라지겠구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의 출산이 시작되었다. 나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다시 집으로 달려가, 잠들어 있던 아들을 품에 안았다. 아들은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나는 가속페달을 밟으면서도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병원에 도착했을 때 분만실 문을 여는 순간 둘째의 머리가 이미 세상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 짧은 찰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내의 신음 소리와 간호사의 목소리,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이 한꺼번에 뒤섞였다. 그 소리들 사이에서 나는 잠시 모든 세상의 소음을 잊었다.


아내는 2주 동안 산후조리원에서 지냈다. 그곳에서는 다행히 우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내는 마치 이전의 힘든 날들이 꿈이었던 듯 차분하고 단정했다. 작은 팔에 아이를 안고 미소 짓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평화였다. 그 얼굴엔 잠시나마 빛이 머물렀다. 조리원에서의 2주는 유난히 빠르게 흘러갔다. 매일매일 아기의 숨소리와 작고 고른 잠 그리고 아내의 잔잔한 웃음이 공간을 채웠다. 그 시간만큼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셋이 나갔다가 넷이 되어 돌아왔다. 무언가 비어 있던 자리가 꽉 채워진 듯했다. 그 순간 세상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평화의 한편에서 보이지 않는 무게가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류가 공기를 스쳤다. 그것을 느낀 건 나뿐이었을까. 아니면, 아내도 이미 알고 있었을까.


나는 어릴 적 늘 외롭게 자라왔다. 그 외로움에 아이들을 많이 낳고 사랑으로 채운 집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결혼하며 세명의 자녀 계획을 세웠다. 러러나 첫째를 낳은 뒤 아내는 두 번의 우울증을 겪었다. 그때 우리는 할 수 없이 계획을 다시 써야 했다. 꿈꾸었던 이상과 마주한 현실 사이에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기에 둘째를 가진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내의 우울증이 사라진 듯 보였고 우리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사랑스러운 딸을 품에 안았다.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이대로라면 셋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마음속에서 조심스러운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세상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삶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희망마저 현실의 벽 앞에서 흔들리곤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곧 크리스마스였다. 날씨는 매서웠고 새로 지어진 아파트 1층은 생각보다 더 차가웠다. 찬 공기가 바닥을 타고 스며들어 발끝부터 온몸을 시렸다. 아침이면 창문엔 하얀 성에가 가득 맺혔고 발을 디딜 때마다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아내는 자주 다음에 이사 갈 땐 꼭 중간층으로 가자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단순히 추위 때문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 차가움과 함께 또다시 우울증이 찾아올까 봐 아내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겨울이 올 때마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추위는 단순한 날씨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긴장과 불안 그리고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르는 어둠이 숨어 있었다.


아내는 또다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루 종일 부지런히 움직였다.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쉬지 않고 집안을 정리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했다. 빨래를 개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를 안고 재웠다. 나는 그런 아내에게 쉬면서 하라고 말했지만 아내는 고개를 저으며 묵묵히 움직였다. 그 모습에서 나는 안도와 동시에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아내 스스로 우울증에 잠기지 않기 위해 이렇게 바삐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가만히 있는 순간이 더 무서웠을 것이다. 잠시라도 멈추면 그 우울이 다시 스며들 것 같아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아내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쉬는 순간이 두려워 무언가를 붙잡듯 집안을 돌고 또 돌았다. 아내의 손끝은 늘 바빴고 그 바쁨 속에서 간신히 자신을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우울증은 노력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용히 다시 아내를 덮어왔다.


노력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한겨울의 추위처럼 그것은 조금씩 우리 곁으로 스며들었다. 보일 듯 말 듯한 기척을 남기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 찬 공기는 숨결 사이로 스며들어 마음 깊은 곳까지 서서히 차가움을 내리꽂았다.


어느 날은 아내의 눈빛에서 어느 날은 깊어진 한숨에서 그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애써 아닌 척 외면했다. 인정하면 더 깊이 빠질 것만 같았다. 아내가 아침 식탁에 앉아 멍하니 컵을 들고 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내가 아이를 안고도 눈물을 흘릴 때 나는 일이 있다며 자리를 피했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은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그림자가 아내를 삼켜버린 듯한 날 아내는 조용히 말했다.

“나, 또 이상해지는 것 같아.”

아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도 아내의 눈빛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익숙하면서도 견딜 수 없는 어둠이 우리를 덮쳤다. 우리는 그 어둠과 또다시 싸워야 했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두 아이를 데리고 더 무거워진 짐을 안고 싸워야 했다.


차가운 겨울이 계속되었다.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 거제도에 작은 눈발이 살포시 내리고 거리는 반짝이는 불빛으로 가득했다. 곳곳에 크리스마스트리가 빛나고 캐럴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하지만 우리 집 안에는 그 빛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창문 너머 환하게 빛나는 거리와 달리 집안은 어둠이 조금씩 스며드는 공간이 되어갔다.


이번에는 제발 아내가 이 어둠 속에 깊이 잠기지 않기를, 우리 가족 모두가 다시 따뜻한 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창밖의 눈발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우리의 네 번째 겨울도 길고 차가웠다. 그러나 그 차가움 속에서도 나는 한 줄기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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