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의 우울증을 지나오며 우리 부부는 하나의 반복되는 흐름을 발견했다.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잿빛 하늘이 낮과 밤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겨울이면 어김없이 아내의 마음에도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다 어느 날 봄바람이 살며시 커튼을 흔들고 목련이 부푼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그 무거웠던 기운이 조금씩 풀리곤 했다. 따스한 햇살이 땅을 데우듯 아내의 마음도 서서히 녹아내렸다. 마치 긴 겨울이 지나가듯 그렇게 아내의 우울증도 천천히 사라졌다.
이번에도 그럴 거란 희망으로 나는 서둘러 회사로 돌아갔다. 다행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아내의 우울증은 봄을 기다리던 들꽃처럼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창가에 햇살이 스며들면 아내는 천천히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아이들과 함께 동네를 산책하며 웃는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다. 조심스러웠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겨울 내내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고 집 안에는 부드러운 봄바람이 스며들었다. 그 바람은 어느새 아내의 마음속까지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복직한 그 해 나는 과장 진급 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아니, 사실 진즉에 과장이 되고도 남았을 나이였다. 하지만 세 번의 육아휴직은 내 앞에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 서 있었다. 국가가 장려하는 육아휴직 제도였지만 회사의 현실은 그 반대였다. 가족을 돌보느라 잠시 멈췄던 시간이 마치 나의 경력을 깎아내리는 잣대가 되어 돌아왔다. 그저 가족을 위해 선택이었다. 그 선택이 불이익의 이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냉정한 현실 앞에서 나는 조용히 입술을 다물어야 했다.
팀장은 “회사도 어쩔 수 없다”며 말끝을 흐렸고, 파트장은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이미 예감하고 있던 결과였지만 막상 ‘진급 불가’라는 통보를 직접 듣는 순간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육아휴직 기간을 제외하면 나는 누구보다 회사에 헌신했다. 힘들었지만 일은 늘 즐거웠고 성취의 순간마다 작은 자부심이 피어났다. 밤을 새워 고객의 요구를 맞추던 날들, 주말에도 책상 앞을 지키며 보고서를 수정하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시간들은 분명 내 청춘의 일부였고 나는 그만큼 진심으로 일했다.
그해, 나보다 한참 어린 후배가 과장으로 진급했다. 회식 자리에서 억지로 웃으며 축하의 말을 건넸지만 속 깊은 곳에서는 씁쓸함이 쓴 술처럼 맴돌았다. 소주잔을 기울일 때마다 목구멍이 따갑게 타올랐다. 후배는 미안한 얼굴로 “형님이 먼저 됐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해요.”라며 잔을 부딪쳤다. 가족을 위해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날의 술맛은 유난히 쓰고 오래 남았다.
그때부터 퇴근 후의 시간은 온전히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마치 첫 직장을 찾는 신입사원처럼 나는 수십 군데의 이력서를 보냈다. 낮에는 회사의 일에 몰두했고 밤이 되면 모니터 앞에 앉아 자기소개서를 다듬고 면접 질문을 예상하며 답변을 연습했다. 컴퓨터 화면의 푸른빛 아래에서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지쳐도 멈출 수 없었다. 이곳에서 더는 나의 내일을 꿈꿀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내 곁에서 조용히 힘이 되어주었다. “잘될 거야.” 짧은 한마디는 어떤 위로보다 깊게 스며들었다. 한때 우울의 그늘 속에서 힘들어하던 아내가 이제는 나를 붙잡아주는 버팀목이 되어 있었다. 그 따뜻한 믿음 덕분에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을 쉼 없이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운이 따라주어 지금의 회사로 이직할 수 있었다. 겨우겨우 버텨낸 시간의 끝에서 봄처럼 새로운 시작이 찾아왔다.
새로운 회사는 더 나은 조건과 함께 과장 직급을 제안했다. 합격 소식을 들은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아내였다. 소식을 들은 아내의 목소리에는 묘한 안도와 기쁨이 섞여 있었다. 우울증을 세 번이나 겪었던 그곳을 떠나기 때문이었을까. 아내는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봄 햇살을 맞이하듯 밝은 얼굴로 말했다.
“이제 진짜 새로 시작하는 거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응. 이제 다시 시작하는 거지.”
그 말이 입에서 나오자 마음속 깊은 곳까지 맑은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로 우리에게 새로운 계절이 오고 있었다.
단풍이 절정을 이루던 11월 우리는 마침내 거제도를 떠나 청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삿날 창밖에 펼쳐진 붉게 물든 산자락이 마치 우리 가족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해 주는 듯했다. 아내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그 미소 뒤에는 낯선 도시에서의 두려움이 살짝 드리워져 있었다. 이사 트럭이 떠난 뒤 텅 빈 집 안에 잠시 서 있었다. 햇살이 스며든 빈 벽과 낡은 바닥 그 모든 곳에 우리의 시간이 묻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이제 정말 새로운 시작이구나. 거제도에서의 아픈 기억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한번 발을 내디뎠다.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새로운 땅 위에 우리의 삶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청주는 위도상 거제보다 훨씬 추운 곳이었다. 예상대로 청주의 첫겨울은 매서웠다. 아침이면 창문마다 성에가 하얗게 내려앉았고 바람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 차가웠다.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이 집 안으로 스며들 때마다 거제에서 겪었던 그 긴 겨울처럼 아내가 다시 무너지는 건 아닐지 나는 마음속으로 긴장했다. 그 두려움이 매서운 바람보다 더 깊게 마음을 에워쌌다.
이사 온 첫 달 우리는 서로를 더 세심히 살피며 조심스레 겨울을 맞이했다. 아내는 매일 아침 아이들을 배웅하며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마주했고 나는 가능한 한 일찍 퇴근해 집으로 향했다. 작은 일상의 따뜻함으로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려 했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함께 외출하며 겨울 햇살을 온몸으로 느꼈다. 집 안에는 언제나 온기가 흐르도록 사소한 순간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그해 겨울 다행히도 우리 가족에게 우울증의 그림자는 드리우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이 주는 신선함 덕이었을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함께 쌓아온 작은 노력들의 결과였을까. 아내는 예상외로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고 아이들도 새 친구들과 즐겁게 지냈다. 이전과 달리 우리는 겨울이 찾아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 이상 겨울은 두려움의 계절이 아니었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집 안과 마음 안에는 따뜻함이 가득했다.
나는 새로운 회사에서 안정을 찾아갔고 아내는 동네 아이 엄마들과 교류를 시작하며 지극히 평범하게 하루를 보냈다. 아침이면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장을 보고 저녁을 준비했다.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 소중한 것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또다시 가을이 찾아왔다.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집 안 가득 퍼졌고 저녁 식탁에는 따뜻한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인생이란 항상 예측 불가능한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