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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밤, 그리고 작은 희망

by 오분레터

밤은 어두웠고 그 어둠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아내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손을 뻗어 잡으려 해도 아내는 마치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또다시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두 아이가 있었다. 결국 나는 세 번째 육아휴직을 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회사에서 남직원이 육아휴직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의 육아휴직을 낸 직원은 아마도 내가 유일했다. 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셈이었다. 그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회사에서의 인수인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내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었고 아이들은 방치되고 있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기약 없는 세 번째 육아휴직이 시작되었다. 네 해 동안 세 번째 육아휴직이었다.


아내의 세 번째 우울증을 지켜보며 나도 조금씩 무너져갔다. 아내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때 나는 그것을 붙잡으려 애썼지만 동시에 내 몸도 점점 아내와 함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육아휴직과 함께 찾아온 것은 깊은 허무감이었다. 그것은 벗어날 길 없는 고립감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술로 나 자신을 달래기 시작했다.


한 잔은 두 잔이 되었고 두 잔은 한 병이 되었다. 그 한 병은 또다시 두 병이 되었고 그렇게 밤은 흐르고 또 흘렀다. 술을 마시는 횟수가 늘어났고 쓰레기통에는 빈 병들이 쌓여갔다. 그런 나 자신이 우울증인지 아닌지 조차 몰랐지만 확실한 건 온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왜 내게만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 걸까? 하늘은 내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빼앗아갔고 어머니마저 내 나이 스물하나에 앗아갔다. 그리고 이제는 아내마저 내 곁에서 빼앗아 가고 있었다. 원망의 사무침은 깊어졌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날 밤도 아내는 하루 종일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두 아이와 놀아주고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았다. 첫째는 엄마를 찾았고 둘째는 울음을 터뜨렸다. 저녁이 되어 아이들을 씻긴 뒤 아내와 함께 먹을 밥을 준비했다. 아내는 마지못해 이불 밖으로 나왔지만 밥 한 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리고 나는 술을 따랐다. 그날도 한 병이 두 병이 되었다. 결국 내 안에 쌓였던 감정이 한순간에 터져버렸다. 분노인지 절망인지도 모를 감정이 마구 쏟아졌다. 아내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내뱉었고 방 안의 물건들을 던지고 부쉈다.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나의 포효하는 소리 그리고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그 순간 나는 세상을 원망하는 미친 망나니가 되어 있었다. 아내는 뒤로 물러서다 벽에 몸을 기대어 잔뜩 움츠러들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못했다. 모든 게 뒤엉킨 감정 속에서 결국 나는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눈을 떠보니 장인어른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밤새 아내는 첫째만 데리고 처가로 몸을 피했다. 혼자 아이 둘을 데려갈 정신이 없었는지 첫째만 데리고 집을 나섰다. 내 옆에는 둘째만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최서방 일어나게. 정신 차리고 우리 집으로 가자."

장인어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깊은 걱정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온 집안은 난장판이었다. 깨진 그릇 조각들과 넘어진 가구들, 벽에 난 자국들이 전 날밤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장인어른은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으셨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죄송한 마음이 밀려든다.


나는 둘째를 챙겨 아버님의 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아내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며 그곳에서 며칠을 보냈다. 하지만 아내에게 별다른 차도는 없었다. 아내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자는 아내의 말에 따라 우리 네 식구는 다시 집으로 내려왔다.


집은 그대로 엉망이었다. 부서진 물건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널브러져 있었고 어두운 흔적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도 그 난장판 속에 함께 뒤엉켜 있었다. 마치 이 집이 우리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처가에서 돌아온 후 집 안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부서진 물건들 사이로 우리의 깨진 관계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다. 침묵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다시 막막함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조금씩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깨진 그릇을 쓸어 담고 넘어진 가구를 일으켜 세웠다.


그날 밤 아이들이 잠든 후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여전히 아내는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밤 아내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비록 대화는 없었지만 내 존재라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내일은 날씨가 좋대" 같은 짧은 말들을 건넸다.


처가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특히 장인어른의 모습은 내게 큰 죄책감을 주었다. 장인어른은 아내의 상태를 보면서도 단 한번 분노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손자 손녀와 사위를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이 내게는 진정한 어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나도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함께 견뎌야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째 되던 날 둘째가 갑자기 열이 나서 응급실로 향했다. 의사는 별 이상 없다고 했지만 아내는 그날 밤 내내 아이 곁을 지켰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걱정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고 체온계를 확인하며 물수건을 갈아주는 아내의 손길이 조금은 살아있었다. 모성애는 우울증에도 꺼지지 않는 희미한 불빛 같았다.


그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짧지만 결연한 목소리였다. "나 노력해 볼게..." 그 한마디가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들은 아내의 다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차가웠지만 조금의 따듯함이 느껴졌다.


이후 아내에게 변화는 서서히 찾아왔다.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고 조용히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약을 복용하고 상담을 받으러 갔다. 처음에는 항상 동행했지만 나중에는 혼자서도 갈 수 있을 만큼 조금씩 나아졌다.

봄이 가까워질수록 아내에게 미세한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들의 존재는 아내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첫째의 웃음소리와 둘째의 옹알이만으로도 집 안의 무거운 공기가 조금씩 가벼워졌다. 아내도 조금씩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첫째의 머리를 빗겨주거나 둘째에게 분유를 데워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작은 행동들이 모여 아이들에게 따뜻함을 가져다주었다.


육아휴직 3개월째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근처 바닷가로의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아내는 여전히 쉽게 지쳤지만 그 짧은 여행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바닷가에서 아이들은 모래를 만지며 놀았고 아내는 모래사장에 앉아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아내의 눈빛에서 잠시나마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의 약물 용량이 조절되고 상담이 지속되면서 아내의 상태는 안정되어 갔다. 여전히 나쁜 날들이 있었지만 그 빈도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아내의 상태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되었다. 나는 육아휴직 3개월이 지나고 나는 빠르게 회사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세 번째 육아휴직 마지막 날 우리 가족은 집 근처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봄이 시작되었고 공원은 새싹으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싱그러운 잔디밭 위를 기어 다녔고 아내는 간간이 미소를 지었다. 벚꽃이 바람에 흩날렸고 아이들은 꽃잎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출근 준비를 하는 내게 아내가 말했다.

"이제 혼자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의 말을 믿고 싶었다.


우리 앞에는 여전히 긴 여정이 남아있었다. 아내의 우울증은 완전히 치료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 한번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봄이 찾아왔다. 이번 봄은 조금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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