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식은 친인척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들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아내의 전화기에서 공중을 타고 이어졌고 응원의 메시지는 끊임없이 울렸다. 특히 아내의 처가 쪽 친인척들의 걱정은 깊어만 갔다. 수년 전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아내였기에 어르신들의 안타까운 마음은 더욱 애틋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무겁게 전해졌다.
나는 그들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실은 나아지는 게 아니라 조금씩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지만 그들을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를 가다듬을 때마다 입안은 바짝 말랐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부산에는 아내의 작은아버지와 고모님이 한 아파트에 살고 계셨다. 우리는 그곳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도 아내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 없이 메말라 있었다. 아내의 고모님과 숙모는 마치 자신의 딸처럼 아내를 걱정하셨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힘을 내야 한다." "많이 먹어라 그래야 힘이 난다." "혼자 계신 아빠가 얼마나 걱정하시겠니 빨리 힘을 내라."
늘 아내의 고모님이 하시던 말씀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말들이 아내를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았다. "힘내", "노력해", "이겨내"라는 말들이 채찍처럼 아내의 등을 내리쳤다. 밤이면 이불속에서 "나는 왜 이렇게 약한 걸까..."라며 흐느끼는 아내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찢어지면서도 어느 순간 무뎌지기 시작했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마치 안갯속을 헤매는 것 같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움직임은 깊은 바닷속을 떠도는 듯했다. 식사 시간이면 그저 숟가락만 든 채 멍하니 앉아 있었고 옷을 고르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옷장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며칠 전 입었던 옷을 다시 꺼내 입었다. 머리를 감는 것도 세수를 하는 것도 모든 게 버거워 보였다.
나는 때론 화가 났다. 왜 조금만 더 노력하지 않는 걸까. 왜 이렇게 자신을 방치하는 걸까. 손톱 하나 깎지 않은 채 며칠째 같은 옷을 입고 머리는 산발이 된 아내를 보면 속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듯 더욱 움츠러드는 아내를 보며 나는 내 마음의 분노를 삼켜야만 했다. 입 안 가득 쓴맛이 번졌다.
그 속에서도 아이는 봄날의 꽃처럼 순수하게 피어났다.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울며 잘 자라주었다. 아내에게 달려드는 아이를 보며 아내는 더욱 괴로워했다. 제대로 된 엄마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아이를 품에 안으려다 멈칫하는 아내의 손이 공중에서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저 아내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언젠가는 지나갈 거라고 우리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다고 속삭였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매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조차 지쳐갔다. 나 자신도 흔들리고 있었다.
한 번은 처남댁의 친정 식구들이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엄청난 대가족이었다. 위로 오빠 한 명과 언니 넷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와 아이들까지 모이니 집안이 가득 찼다. 처남댁의 언니가 우울증을 겪은 경험이 있다는 말에 한줄기 희망을 품고 찾아갔지만 집에 들어가는 그 순간 아내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너무 많은 시선과 걱정, 위로의 말들이 오히려 아내를 옥죄었다. 거실 가득 모여 앉은 사람들과 그들의 따뜻한 눈빛이 아내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무게였다. 우울증이 만든 보이지 않는 벽은 사람들의 온기조차 차갑게 막아섰다. 아내는 구석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날 밤 차 안에서 돌아오는 내내 아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라디오 소리만 작게 틀어놓은 채 그녀의 침묵을 지켜주었다. 가로등 불빛이 차창을 스치고 지나갔다. 깜박이는 그 빛 속에서 아내의 눈가엔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운전대를 꽉 쥔 채 앞만 보고 달렸다.
혹시나 하는 작은 희망을 찾아서 우리는 마산의 큰 이모댁과 진주의 작은 이모님 댁까지, 마치 길 잃은 나그네처럼 아내의 친인척들을 찾아다녔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낯선 길을 따라서 우리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매번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지만 어쩌면 그 모든 만남들이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걱정 어린 눈빛과 따뜻한 손길이 비록 그 순간에는 닿지 못했더라도 조금씩 아내의 마음을 덥혀주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 아내에게는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가 태어나고 맞이한 두 번째 겨울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두 번째 우울증도 마치 녹아내리는 눈처럼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었다. 따뜻하다는 남쪽 땅 거제도의 겨울바람은 내 고향 강원도 춘천의 그것만큼이나 매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봄날의 선물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아내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꽁꽁 얼어 있던 호수가 봄을 맞아 서서히 얼음을 풀어내듯 아내의 굳어 있던 몸과 마음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득 창가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미소 짓는 아내를 발견했다.
몸이 먼저 깨어났는지 마음이 먼저 녹아내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자연처럼 아내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모여 그녀의 차가운 겨울을 녹였던 걸까.
아내는 마치 오래된 죄인처럼 아이에게 끊임없이 미안함을 표현했다. 엄마로서 충분한 모유를 먹이지 못한 것과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것에 많이 미안해했다. 후에 아내는 조심스레 고백했다. 세상 무엇보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고. 그러나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고 가슴에선 모유가 충분하게 흐르지 않았다고. 그 미안한 마음이 깊은 협곡이 되어 아내의 마음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렇게 우울이라는 먹구름이 아내의 하늘을 어둡게 뒤덮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그 시절을 보상이라도 하듯 아이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신혼여행 이후 처음으로 떠난 해외여행은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걷던 오사카의 거리에서 아내의 얼굴에 더 이상 우울의 그림자는 없었다. 낯선 거리를 거닐며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작은 행복의 가치를 다시금 깨달았다. 일본의 하늘은 우리의 마음처럼 한없이 맑았고 공기마저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의 수레바퀴는 다시 겨울을 향해 돌아갔다. 두 번의 우울증이 겨울과 함께 찾아왔기에 우리는 마치 폭풍을 기다리는 뱃사람처럼 긴장된 마음으로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겨울날의 하루하루를 보냈다. 겨울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고 한때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엔 우울이라는 손님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우리는 희망이라는 따스한 햇살을 보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겨울이었다. 아침마다 아내의 얼굴을 살피는 일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생기가 돌았고 웃음소리는 집 안 가득 퍼졌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의 소식을 들었다. 두 번의 우울증으로 굳게 닫아 두었던 둘째의 문을 우리는 조심스레 열기로 했다. 그리고 2월의 어느 날 작은 기적처럼 새 생명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 순간 우리는 이 행복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꽁꽁 얼어붙은 땅도 봄이 오면 녹듯이 우리의 겨울도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