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돌고 돌아 언제나 그렇듯 정확하게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가 그 계절 안에서 견뎌낸 시간만큼은 결코 똑같이 되풀이되지 않았다. 또다시 찾아온 겨울이었다. 겨울은 아내의 우울증을 시험했다. 나 역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다. 매일 아침 아내의 침묵 속에서 나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물 한 잔을 건넬 뿐이었다. 아내의 손은 차가웠고 눈빛은 어딘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하나님을 놓지 않았다. 성경 말씀 한 줄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는 아내의 모습이 기억난다. 어떤 날은 그 문장을 수십 번 읽어도 의미가 와닿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말씀들이 쌓여 작은 울타리가 되어주었다고,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었다고 말했다. 함께 기도해 주는 이웃 교인들의 손길도 있었다. 따뜻한 위로의 말과 짧게 나누는 포옹이 아내에게는 작은 등불이 되어주었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희미하지만 확실한 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종교적 믿음이 강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에게 신은 멀게만 느껴졌다. 기도하는 아내의 옆에 앉아 있어도 나는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내가 조금씩 회복해 가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믿음이란 단어는 여전히 내게 낯설었고 신은 멀고도 아득한 존재였다. 기도하는 아내의 곁에 앉아 있어도 나는 어떤 말을 어떤 마음으로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두 손을 모은 채 조용히 아내의 숨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그런 시간 속에 아내의 눈빛 속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그 순간 이유도 모른 채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한 마음으로 속삭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종교의 믿음으로 아내가 자신을 견뎌냈다면 나는 운동으로 일상의 무게를 버텨냈다. 러닝화를 신고 현관문을 나설 때면 차갑고 맑은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무게가 발바닥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리는 듯했다. 숨이 거칠어질수록 오히려 머릿속은 맑아졌고 복잡했던 생각들이 땀과 함께 흘러나왔다. 고요한 새벽을 깨운 건 오직 내 발소리뿐이었다. 그 규칙적인 리듬이 내 안의 불안을 천천히 떨궈냈다.
그렇게 나는 하루를 버틸 힘을 얻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회복의 길을 걸어왔지만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행복하게 살아내기 위해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 길이 달라도 괜찮다는 것을 우리는 천천히 배워가고 있었다.
어느 봄날 아침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나한테 성경 읽으라고 권하잖아. 나도 같이 읽어볼게. 대신 당신도 나랑 같이 뛰어보자.”
아내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같이 해보자.”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나누기 시작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어온 회복의 길이 하나의 약속으로 이어졌다. 우리에게는 다시 함께 걸어갈 새로운 시작이 찾아왔다.
우리는 짧은 러닝을 함께 했다. 아내는 금세 숨이 차올라 자주 멈춰 섰고 나는 그 옆에서 천천히 걸으며 아내를 기다렸다. 아내의 호흡이 조금씩 안정될 때까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길가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우리의 속도는 다르지만 방향만은 같았다. 밤이 되면 우리는 성경을 세 장씩 소리 내어 읽었다. 아내와 나는 번갈아가며 한 구절씩 읽어 내려갔다. 그 시간만큼은 오직 말씀과 우리의 목소리만이 거실을 채웠다. 운동과 신앙, 몸과 마음의 회복이 서로를 보완해 주길 바랐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만 조금 더 건강해지고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
이 이야기를 짧게 온라인에 올렸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낯선 이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응원은 우리가 잘 가고 있다는 믿음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과 이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되었다.
아내는 지금도 교회에 다니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아이들과 함께 예배에 참여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때로는 봉사활동에도 나선다. 아내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돌아왔다. 물론 가끔은 여전히 힘든 날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작은 빛을 찾아낼 줄 안다. 그 빛이 아내와 우리 가족을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는 여전히 운동화를 신고 길을 달린다. 새벽의 찬 공기와 점점 밝아오는 하늘 아래에서 나는 조용한 감사함을 느낀다. 우리가 지금껏 버텨온 이유는 언제나 함께였기 때문이다. 서로의 방식을 존중했기에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언젠가는 또다시 겨울이 오겠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서로의 길은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꿈을 꾸며 나아간다. 계절이 변하고 혹여 아내의 마음에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 해도 우리는 함께 달리고 함께 기도하며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봄은 언제나 다시 온다. 겨울이 아무리 길고 추워도 계절은 반드시 바뀐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우리의 봄도 언젠가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