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듯
그렇게 밤이 지났다. 아침이 되자마자 작은 아버지들이 오셨다. 그런데, 하나 같이 나를 보는 시선이 너무 싸늘했다. 그간의 인사를 전하고 몇 번이나 대화를 해보려고 했는데, 대답도 너무 차가웠다. 그나마 첫째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만이 예전처럼 나를 대할 뿐 하나같이 싸늘했다.
21.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듯
싸늘했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 듯, 아팠다. 동생이 장난질을 쳤구나. 아빠를 앞세워 경조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술책을 부렸다. 혹시라도 아빠 마음 다치실까 알면서도 해달라는 대로 했다. 그 뒤에 숨어서 무슨 짓을 했을지는 너무도 뻔했다. 어려서부터 늘 하던 행동이다. 피해자 인척 온갖 험담을 늘어놨을 것이다.
작은어머니들은 그나마 덜 싸늘했지만 예전에 나를 대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섭섭함을 느낄 새도 없이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장수를 기원하며 찍었던 영정사진 속 아빠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루뿐인 장례식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조문객들이 몰아쳤다. 나는 아빠얼굴을 아는 아주 오래된 친구 몇만 불렀다. 위로도 힘들었다. 회사야 어쩔 수 없었지만. 동생은 엄마를 보낼 때보다 술을 덜 먹었고, 다소 진중하게 장례를 치르고 있는 모습이 위안이라면 위안이 되었다. 첫째 작은아버지와 둘째 작은아버지가 형의 마지막 길 함께하고 싶다며 장례식장에 남으셨다.
조의금 정리를 도와주려고 남았던 사촌동생들은 이번에도 1시가 넘도록 가지 않는 동생의 조문객을 기다리다 지쳐 집에 간다고 일어섰고 나와 올케, 아이들이 모여서 조의금을 정리했다. 그때도 동생은 조문객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잠시 고민 했지만 올케에게 조의금을 건네지 않았다. 드릴 아빠도 엄마도 없다.
내가 가지고 있겠다고 했다. 현금결제를 할 거면 같이 간다고 했더니 올케는 카드로 결제하겠다고 했고 나는 영수증을 주면 현금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우리는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었다. 발인을 하려는데 둘째 작은아버지가 당황해하셨다. 왜, 염습이나 입관을 안 하고 바로 발인을 하냐며 되물으셨다. 둘째 작은아버지는 엄마의 염습과 입관이 마지막 날 이루어졌던 일을 기억하시고 아빠도 마지막날 아침에 입관을 할 줄 아셨던 모양이다.
어제 염습과 입관을 모두 마쳤다고 엄마는 부검 때문에 마지막날에 입관과 동시에 발인을 진행했던 것이지만 아빠는 부검을 안 했기 때문에 이미 입관을 마쳤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울부짖으신다. 입관식 때 큰형 얼굴 마지막으로 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마저도 못하게 되었다며 애통해하셨다. 둘째 작은아버지는 타 지역이라 오시는데만 5시간 가까이 걸리셨기에 아빠의 입관절차에 참여하실 수가 없었다. 소식을 듣고 출발하셨을 때는 이미 입관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발인제를 지내고 장지로 향하기 위해 운구차에 오르기 전 장례비용을 정산했다. 카드결제를 하겠다던 올케는 현금으로 마음을 바꾸었고, 나는 비용을 확인하고 봉투에서 현금을 꺼내주었다. 자세하게는 아니지만 지출금액만큼은 꼼꼼하게 봉투에 적었다. 한 푼이라도 꿀꺽했다는 소리를 듣기는 싫었다.
장례비용 정산이 마무리되자 우리는 아빠를 모시고 장지로 출발했다. 1시간 남짓 걸렸다. 엄마를 화장할 때와 절차가 달랐다. 엄마를 화장할 때 나는 필요가 없었다. 첫째이지만 아들 상주(喪主)가 아니라는 이유로 엄마를 보내는 그 모든 행정 절차에서 제외되었었다. 사진 한장 내 마음대로 봉안당에 넣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슨일인지 반드시 첫째 자녀가 동행해야 하니 잊지 말고 신분증부터 챙기라고 했다. 이유도 모른 채 함께 접수처로 갔다. 화장 서류를 접수하는데 서류가 누락되었다고 거부 당했다. 누락 서류를 챙겨 와야 접수가 가능했다. 접수원으로부터 누락된 서류 목록을 건네받았다.
이번에 나는 움직이지 않았었다. 솔직히 너도 한번 해봐라 싶은 것도 있었다. 엄마 때처럼 서류가 복잡한 것도 아니었다. 크게 할 일도 아니었건만 그 간단한 가족관계증명서조차 발급기준에 어긋났고 서류도 빠뜨렸다. 그래놓고 검사필증 받아온 것을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양 거들먹거렸었다. 어젯밤.
상주(喪主)란게 무엇일까? 상주(喪主)는 결국 가부장적 가족제도하에서의 아들의 권리일 뿐 의무는 없었다. 책임감이 1도 없는 아들은 여기저기서 허술함을 줄줄 흘리며 새고 있었다.
당황해서 어쩔할 줄 모르고 있는데 다른 상례사가 화장시간이 아직 2시간 이상 남아 있아있으니 그 사이 발급하면 된다고 식사부터 하자고 했다. 하지만 엄마 때의 불안한 경험이 있던 나는 친척들이 식사를 하는 사이 남편과 함께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나섰다. 동생한테 맡기면 아빠 화장도 물 건너갈 수 있겠다 싶었다.
다행히 행정복지센터를 찾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관련 서류를 발급받고 식당에 도착했다. 술이 거나하게 오른 동생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유가 있으니 어서 밥을 먹으라고 했지만 나도 남편도 넘어갈 것 같지 않아서 거절하고 그대로 화장장 접수처에 갔다.
서류를 하나하나 챙기면서 빠진 게 있나 점검을 하고 있을 때 검사필증에 목격자 진술서가 얼핏 보였다. 목격자와 사망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했다.
목격자가 옆집 아저씨가 아니었고, 사망장소 거주자도 아빠가 아닌 모르는 이름이었다.
서류가 잘못된 건가 싶어서 사망자를 확인했지만 그건 또 아빠가 맞았다. 아빠는 집에서 돌아가셨는데 왜 사망장소 거주자의 이름이 다른 거지?
접수를 안 하고 기재되어 있는 목격자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때였다. 상례사가 이런 일은 흔하게 있다며 사망자가 아버님 함자만 맞으면 목격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서류를 제출해 버렸다. 그렇게 그 일은 지나갔다.
서류 접수가 그렇게 끝나고 화장비용을 납부해야 했다. 엄마의 납골당 사용기간이 아직도 20년 넘게 남아있었다. 차액만 지불하면 되겠거니 했는데 봉안당 원칙상 잔여사용료는 상주(喪主) 계좌로 환불되고, 다시 전액 납부되어야 한다고 해서 상주(喪主), 즉 동생의 계좌로 환불신청을 한 후, 합골비용을 지불하고 나서야 화장과 봉안에 대한 모든 서류접수가 끝났다. 대기실에서 아빠의 화장순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소시오패스's 친구나 동료 사이를 이간질해서 갈등을 일으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