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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다, 너를

23. 유언대용신탁 VS 실비보험

by 마흔아홉

목격자와 사망장소가 달랐던 검사필증 목격자진술서. 싸늘했다. 등줄기를 스쳐 지나가는 서늘함에 잠들기는 글러먹었다.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새벽 1시였다.



23. 유언대용신탁 VS 실비보험


노트북을 켰다. 인터넷 등기소에서 부동산 등기사항증명서를 발급했다. 아빠 소유의 집 주소인데 소유자 이름이 아빠가 아니었다. 오타가 났나 싶어 한 자 한 자 주소를 확인하며 입력했다. 역시나 소유자가 아빠 이름이 아니었다. 2년 전에 소유권이 이전되어 있었다. 아빠가 살고 계시던 집의 소유자가 아빠가 아니었다.


소유자가 아빠가 아니니 사망장소 거주자의 이름이 달랐던 것 같다. 주식회사우리은행으로 2년 전쯤에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신탁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신탁이 뭐지?


등기목적 - 소유권이전
등기원인 - 신탁 신탁원부 제2022-12345호
권리자 및 기타 사항 - 수탁자 주식회사 우리은행 신탁


동생이 엄마의 예금을 병원비조로 달라고 했을 때 재산상속포기각서를 들이밀면서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아빠는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고민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쓸 돈이라고는 이게 다인데, 그걸 언제 달라고 할지 모르겠다며 걱정이 많으셨다. 물론 엄마 예금 달라고 안하겠다고 동생은 말했지만 아빠도 알고 나도 안다. 십수 년간 안 한다고 했다가 돌아서서 다시 한다고 하기를 수십 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집으로 나를 불렀다. 은행계좌와 부동산 계약서, 등기권리증 등을 건네시며 세금과 계좌관리를 해달라고 하셨다. 불안하다며 나에게 방패막이를 부탁하셨다. 누나가 관리해 준다고 하면 동생이 더 이상 말을 안 하니 그렇게만 해달라고 하셨다. 아빠는 현금만 찾을 수 있으면 된다고.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아빠의 마음이 편하다면, 뭐가 어려울까 싶었다. 그날 임차인과도 재계약을 했다. 그전까지는 모두 엄마가 하셨던 일이지만 이제 엄마는 없다. 아빠에게 이번에는 내가 해드렸지만 다음 계약할 때는 동생과 함께 하시라고 말씀드렸다. 아들이 섭섭해할 수도 있고, 그러면 아빠가 불편해지신다.


대신 계약하고 나면 누나에게 사진 찍어서 주라고 동생에게 시키라고 했다. 그냥 누나가 보고 있다는 사실만 알게 하면 되겠지 싶었다. 동생은 아빠에게 그러겠다고 했다지만, 역시나 보낸 적은 없었다. 기대도 안 했다. 대신 아빠는 동생이 보내든 말든 나에게 꼬박꼬박 연락을 하셨고 계약서도 건네셨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아빠도 모르게 집 소유권이 우리은행으로 바뀌었어 있었다. 소유주가 아빠가 아니라니. 신탁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잘 모른다. 아빠 공동인증서로 계좌정보통합관리서비스 <내계좌 한눈에>를 통해 아빠 계좌를 조회했다.


우리내리**(을종부동산)신탁으로 예금잔액 N억원이 보였다. 인터넷뱅킹 신청은 안되어 있는지 거기까지 밖에 확인이 안 됐다. 우리은행 우리내리사랑신탁을 검색하자마자 정보가 우수수수 쏟아졌다.



우리내리사랑신탁. 유언 없이 유산상속이 가능한 상품으로 위탁자가 신탁 설정 후 계좌에 있는 예금을 마음대로 찾아 쓰다가 사망 후 상속자에게 상속이 되는 것이었다. 상속자는 지정하기 나름이었다.


예금잔액이 N억 가량이나 있었는데 왜 병원비 백만 원 이백만 원에 연연하셨으며, 팔골절로 입원 중에는 현금 좀 달라고 하셨지? 그 큰돈이 아빠 계좌에 있는데? 심지어 그 은행은 병원 아래인데??? 입원했던 병원은 동생네 집 근처에 있고 우리은행 근처였다. 거동이 불편하신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심지어 아빠는 퇴원 후 병원 통원을 위해 한 달쯤 동생네 집에 계셨을 때조차 아빠집에 와서 현금을 찾아가셨다.


몇 달 전 이를 빼셨을 때도 그랬다. 이에 염증이 생겨 동생과 치과에 갔는데 가자마자 이부터 빼더란다. 염증 가라앉은 다음에 임플란트 하자 했지만 비용이 천만 원이 넘는다는 말에 불편하지 않으니 이 없이 사시겠다는 거다. 그놈의 천만 원 타령 지겹다. 뭐만 하면 천만 원 타령인 동생도 지겹다. 나랑 다른 병원 가보자 해도 그냥 됐다고 손사래만 치는 아빠나 엄마도 지겹다.



만약 아빠가 예금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다면 그리고 그 은행이 동생네 집 근처, 치료 중인 병원 바로 근처였다는 것을 아빠가 알았다면 굳이 몇 번이나 집까지 오실 이유가 없다. 임플란트 천만 원이 들어간다고 이 빠진 상태로 사실 생각도 안 하셨을테다.


계좌정보통합관리서비스 예금을 보면 계좌개설일과 최종입출금일이 동일했다. 즉, 신탁을 설정하고 계좌를 개설한 이래 아빠는 단 한 푼도 찾아 쓰신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은행은 동생네 집 근처 지점이었다.


작년 가을 임차인이 집을 빼겠다고 해서 아빠는 고민이 많았다. 걱정하지 마셔라 우리가 더 드리면 되지 않느냐 했지만, 자식이 주는 돈과 당당하게 받는 월세는 다르다며 아쉬워하셨던 아빠였다.


그렇다면 아빠는 버젓이 예치되어 있는 예금을 두고 왜 단 한 번도 출금하지 않으셨지? 그 신탁 자체가 위탁자가 쓸 수 있는 돈이고 쓰다가 남는 돈을 상속하는 것인데? 아빠는 '쓰실 수가 없었던 것'이든가 아니면 '이 사실 자체를 모르셨다'는 것 밖에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빠는 집을 도둑맞았다.



밤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35재가 내일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동생네가 은행에 가서 보험 가입을 해줬다며 신나하던 아빠의 말이었다. 계좌개설일 그즈음이었다.


허수아비도 제 구실을 한다는데 나는 방패막이 노릇을 해달라는 아빠의 부탁을 지키지 못했다. 얼마 안 되는 재산 지켜줘서 고맙다며 남편의 두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시던 아빠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나는 남동생 달랑 하나뿐이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형제는 없다. 앞으로 동생(이하 그)은 남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알리고 연을 끊기로 했다. 진즉부터 남처럼 살고 있었지만 혼자 계신 아빠 때문에 참고 또 참았었다. 혼자서는 힘에 부칠 것 같아 남편에게 의논을 했다.


남편이 묵은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의 장례식 때 작은아버지들끼리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엄마의 장례 내내 술에 취해 산 그는 상례사들의 요청들을 무시하거나 거부했고, 의 마음대로 결정했다. 난처했던 상례사들은 남편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남편은 여기저기 다니며 가 싸질러놓은 일들을 수습했다.


전후사정을 알리 없는 작은아버지들은 버젓한 장남이 있는데 사위가 처갓집 일에 감 놔라 배 놔라하며 한다며 들으라는 듯이 이야기를 하셨다는 거다. 그 이야기를 남편은 다 듣고만 있었고. 나에게만 싸늘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미안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을 안 겪었어도 될 사람이다. 그때 말하지. 왜 여태껏 참고 있었냐고 물었다.


"어머니 그렇게 돌아가시면서 너나, 아버지나 넋이 나갔는데 그런 소리해서 뭐 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지. 말씀드리고 끝내자니 이 참에 오해 풀어드렸으면 해서 그러지"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남편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세월이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다음날부터 남편은 작은아버지들께 말씀드릴 내용을 정리했고 나는 아빠와의 통화녹음 몇 개와 병원비 영수증, 아빠집의 부동산등기사항증명서, 우리은행 우리내리사랑(을종부동산)신탁상품에 대한 설명서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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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오패스's 부정한 행위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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