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니 딸(아들)이 지켜보고 있다, 덕 쌓고 살아라
마음을 굳힌 뒤 작은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저녁때쯤 귀가하신다고 하셔서 시간에 맞춰 작은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마침 사촌동생이 있었다. 가져갈 물건이 있어서 왔다가 온 김에 큰누나가 온다고 해서 기다렸다며 반가워해 주었다.
25. 부모 덕도 고대로, 부모 업도 고대로 간다잉
남편이 물 한잔을 마시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작은어머니와 작은아버지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셨지만 남편은 말을 시작했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말씀드리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오해가 많으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마저 돌아가셨고 덮고 지나갈 수만 없어서 작은아버지께 말씀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어머니 사실..... 그냥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반쯤은 의무감으로 하던 전화였다. 증명이 되어줄 거라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증거가 필요한 상황이 오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몇 년이나 지난 일이고 덮어뒀던 일이다. 털어놓을 생각도 없었던 일이었다. 결혼한 이후 사촌동생들 결혼식에나 간간히 참석했을 뿐 작은아버지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왕래는 그가 더 많았음은 말해 무엇할까.
"엄마 죽었나 봐. 여기 지금 앞마당에 쓰러져 있고 칼이 있어. 119 불렀는데 아직 안 왔어"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아빠의 목소리에 작은아버지께서 울음을 터트리셨다.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사촌동생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대답 없이 통화녹음을 다시 들려드렸다. 아빠의 '칼'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엄마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남김없이 말씀드렸다. 왜 엄마의 부고를 늦게 전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째서 부검을 해야만 했는지, 엄마가 퇴원하시던 날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날은 어땠는지, 그가 그토록 노래 불렀던 천만 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모두 말씀드렸다.
모든 친척들에게 엄마와 아빠의 병원비와 간병비를 그 혼자서 부담했고, 누나는 나 모른 척했다고 한다. 거기에 아빠는 한마디도 못하셨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보태셨을 분이다. 아들의 뜻을 한 번도 꺽지 못하셨던 아빠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일이다.
목격자진술서의 사망장소 거주자가 달랐던 사실과 그래서 발급받았던 부동산 등기사항증명본을 보여드렸다. 소유권 이전이 한눈에 보였다. 우리은행 예금잔액도 보여드렸다.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사촌동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신탁이 뭔지 잘 모르지만 예금잔액은 너무도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다. 우셨다. 한참을 그렇게 우시던 작은아버지가 남편손을 잡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김서방. 나는 이런 줄도 모르고 너네가 이렇게 애쓴 것도 모르고 그렇게 욕을 했구나. 미안하다."
우리는 괜찮았다, 아니 나는 진짜 괜찮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남이었다. 험담을 했으면 했지 안 했을 위인이 아니다. 있는 말 없는 말 보태서 얼마나 악의적으로 만들어냈을지는 그가 나에게 했던 다른 이의 험담을 기억해 보면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거기에 아빠는 얼마나 보태셨을지. 아니라고 하면 아빠에게 더한 화풀이가 간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아빠도 안다.
작은어머니는 엄마가 그렇게 가셨는데 그 세월 이걸 어찌 속에만 담고만 있었냐고, 아빠는 왜 그걸 한마디도 못하고 당하고만 계셨냐며 우신다. 하지만 작은어머니도 아신다. 그를. 하루이틀 보신 것도 아니고 자그마치 40년이 넘는 세월이다. 그가 아빠를 휘두르고 함부로 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셨다. 그리고 그 모습에 가장 가슴 아파하던 게 나의 엄마다. 자식의 치부가 자신의 치부인 듯 너무 괴로워하셨다.
미안하다고 우시지만 나는 안다. 그뿐이다. 쥐뿔도 없는 집에서 아들을 그렇게나 떠받든다. 그동안의 세월 동안 나는 질리도록 봐왔다. 집안의 모든 대소사가 그와 함께 움직인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금 첫째 작은아버지는 그를 쉽게 내치실 수도 없고, 그럴만한 분도 아니시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그 많은 험담을 들었으면서도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셨던 분이다. 다른 작은아버지들은 그의 험담과 이간질로 인해 내가 너무 괘씸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렇게 싸늘했었다고 하셨다. 다른 작은아버지들은 이제 그를 상대조차 하기 싫다고 하신다.
고작 1시간 남짓 집에 다녀온 걸로 화를 냈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고 작은 아버지들은 그게 싸울 거리나 되냐고 되려 나를 욕하셨단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나는 가족의 연을 끊으려 하지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큰 형의 아들이니 아빠를 생각해서라도 미워하지는 말아 달라 말씀드렸다. 그를 미워하는 건 나하나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 나와 남편은 다른 작은아버지들과 이모들을 만나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전했다. 오해는 모두 풀었다. 나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하고 싶었던 말을 했고 판단은 이제 어른들의 몫일뿐이다.
단 한 가지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와의 관계가 예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척을 지지는 않더라도 그를 보는 시선은 달라질 것이다. 나는 그거면 됐다. 예전과 같지 않다. 난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엄마가 왜 스스로 생을 마감했는지 작은어머니들은 내게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나라고 알 수 있을까. 다만 엄마의 유언과도 같았던 마지막 말, 아들이 돈 때문에 퇴원시켰다는 그리고 아들이 버렸다는 그 말만 나는 기억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엄마는 그가 돌아가시게 만들었다고.
그가 엄마의 등을 떠민 거라고.
엄마가 안 돌아가셨으면 아빠도 이렇게 덧없이 가시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게 내가 아는 다다.
그날 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엄마에게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가 올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까? 솔직히 나도 그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를 의심하고 또 의심해 봐도 잘 모르겠다.
엄마 눈에는 아들만 보였던 것일까? 아들만이 엄마 세상의 전부였을까? 아빠는? 나는? 딸이라며 속내를 다 쏟아내던 엄마에게 나의 위로가 위안이었던 적이 있기는 할까?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지금 나는 서글플 뿐이다.
요즈음 한참 재미있게 폭삭 속았수다를 봤다. 애순이의 엄마를 관식이 같은 아빠한테 자란 애순이가 참 부러웠다. 그렇게 한참 재밌게 드라마를 보던 중 무릎을 탁 치는 대사가 나왔다. 그에게 고대로 돌려주련다.
니 딸(아들)이 다 지켜보고 있다. 덕 쌓고 살아라. 부모 덕도 고대로. 부모 업도 고대로 간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부여잡고 있던 끈이 사라졌다. 가슴에 묻어놓았던 이야기를 풀어버리고 이제 그 끈을 놓아버리고 나로서만 살아가려고 한다. 나는 그를 버린다.
다시는 보지 말자. 안녕, 내 옆의 소시오패스.
소시오패스's 자신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희생시킬 수 있다. 그것이 부모 형제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