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6일 _ Perth
내가 진정 이곳에서의 시간을 즐겼던가?
즐거움보다는 의무감이 앞서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끝이 보일수록 스스로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의지가 사라짐을 느낄 때가 있다. 책을 읽을 때 정말 흥미롭게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읽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지금까지 읽어온 시간이 아까워서 때로는 어떻게는 마저 다 읽어야한다는 의무감에 마지막 장을 향해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어느 정도 끝이 보이는 순간이 되면 내가 글을 읽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글자를 보고 있는 것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저 쳐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진정 그것이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지워진 의무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고, 어리석은 순간을 범하고 있는 것이리라.
오늘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서 과연 오늘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제 오늘은 그 동안의 시간과 생각과 경험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오늘 나는 그 어떤 의지도 부여받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침에 내가 겪어야만 했던 당혹한 순간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만...) 난 오늘 그저 이 공간 속에서 지나는 모든 것들에 이방인으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결국 뭔가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즐길 줄 아는 자는 결코 어느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그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항상 책에서는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할 때 가장 커다란 행복과 기쁨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나 역시 그 생각을 함께 나누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은 어떻게 현실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내 인생에 이미 절반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있다. 내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그것은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노력하고 그 모든 순간에 내 열정을 다하여, 어떤 아쉬움, 후회도 없는 행복한 순간을 만들기 위한 그 무언가. 나는 그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여행의 시간이 마무리되어 간다. 비록 이 여행에서 그것을 찾고자 했고, 그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빨리 찾으면 찾을수록 내게 다가오는 행복의 순간은 더욱 길어지겠지...
#2.
샤워 후 식당으로 갔다. 어제 만났던 한국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간단히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 그들이 식당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함께 자리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 어제 zen의 ipod에 한국 음악을 심어주기 위해서 itunes를 만졌는데, 그로 인하여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음악들이 모두 지워졌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어제 밤 미친 듯 소리를 질러댔고, 오늘 아침에도 그 때문에 스스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 그 말을 들었던 순간 정말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이를 어떻게 해야할까에 대한 고민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물론 내일이 지나면 어떻게든 지금의 고민이 해결되어 있겠지만, 그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닌 zen에게 달려있었기에 난 그저 어떻게 사과를 하고 매듭을 지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만이 앞설 뿐이었다.
그녀들과 도서관을 가기로 약속하고, 잠시 방에 들렀다. 그리고 거기서 zen을 만났다. 그 때부터 오늘의 사건은 시작되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는 그녀는 이미 나를 보는 순간 그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빠르게 진행되는 말 속에는 그녀가 음악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 음악이 없어짐에 따른 분노와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걱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더불어 직접적으로 나에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나에 대한 원망도 강하고 표현하고 있었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결국 이미 없어진 음악은 어찌할 수 없고, itunes를 새로이 다운 받아서 내가 가지고 있던 한국음악을 심어주기로 매듭을 지었다. 함께 도서관을 갔다. 한 시간 가까이 노력했지만, 도서관에서는 그 프로그램을 다운받을 수 없었다. 결국 한국친구들을 남겨둔 채 Zen과 숙소 인터넷을 쓰기로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4불을 주고 인터넷을 쓰고, 어렵사리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서 한국 노래를 담아주었다. 적잖이 또다시 한 시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날씨가 너무 좋으니 나중에 하자고 했지만, 이미 내게는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없을 만큼의 스트레스가 되어 있었다.
(방금 이탈리아 새롭게 체크인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들어왔다. 프란체스코, 키아라. 매우 친근감이 있는 이들이다. 조금 있다가 맥주를 한잔 하러 갈건데... 그 때 다시금 만날 수 있기를...)
결국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음악을 넣어준 후에야 그 사건을 일단락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함께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선의, 무지, 자책, 스트레스, ...... 모든 것이 엉켜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선한 의도를 가진 행동이었다. 하지만 실수를 했다. 그리고 어쨌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다.
아예 그 행동을 하지 않았어야 했나?
사실 나름대로 좋은 뜻으로 뭔가를 하려다 우연치 않게 벌어진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나로 하여금 정말 치욕스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격렬했다. 말로는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나타난 순간에 그렇게 분노하면서 언성을 높이면서 말을 하는데...... 나의 실수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행동까지 내가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만난지 하루 밖에 되지 않았으나, 충분히 배려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만의 생각이요, 바램이었던 듯 싶다.
그 일이 해결된 후 한국 친구들을 다시금 만났다. 처음에는 수요일에 다른 도시로 이동할 계획이었으나, 싼 비행기표를 구해서 오늘 저녁 이동을 할 것이라고 했다. 호주에서의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면서 즐거운 마무리를 하고 싶었는데... 더 나은 방법을 찾은 것에 대해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주었지만, 내심 내 맘속에 남은 아쉬움에 대한 생각은 어쩔 수 없었다. 4시경 그들이 떠날 때 그들에게 뭔가를 남겨주고 싶었다. 내가 가진 것 중 나보다 그들에게 더욱 소중하고 값진 뭔가... 가방에 라면 두개가 있었다.
'내가 혼자서 먹는 것보다 저들이 먹을 때 더 큰 기쁨이 있겠지?'
호주에서 갖는 첫 라면이자, 누군가로부터 건네 받은 것이기에 기억해줄 수 있지 않을까?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기분이 좋았다. 뭔가를 기대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나를 기억해줄 수 있고, 또한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했으니까...
그녀들이 떠나고 난 후 도서관으로 가서 인터넷을 사용했다. 퍼스가 작은 도시여서 그런지 한국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그 도서관 주변에는 유난히 한국인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2m 쯤 되었을까? 옆에 한국 여자 두분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으나 쌩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다. 숙소로 돌아갈 무렵 또다른 한국인들에게 말을 걸었으나 왠지 거리감을 두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았다. 서움함과 실망이 없지 않았다. 아니 컸다. 물론 나는 그들에게 이방인임이 분명하다. 내가 그들에게 거리감이 없다고 해서, 그들 역시 나에게 거리감이 없어야한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었는데, 그 무엇인가가 서로간의 관계에 벽을 남길 수 밖에 없음이 아쉬웠다. 내 욕심이 컸나? 어쩔 수 없는 특성인가? 그 아쉬움을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지쳤나 보다. 혼자서 뭔가를 먹기도 싫고, 시장함도 느끼지 않는다. 오늘은 늦은 저녁에 간단히 맥주를 한잔 마실까 한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소주도......
지나간 시간이 존재하는 의미는 그 시간이 주었던 경험과 시간을 잊지 않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의 어리석음이 오늘에 다시금 존재하지 않을 때 더욱 빛을 발하지 않을까...
호주에서 짧지만 긴 시간을 보내면서 지녔던 경험과 생각이 내일,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모든 날이 아쉬움이란 단어로 묻혀지지 않을 수 있도록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기를 바란다.
그나저나, 이제 하루 밖에 안 남았는데... 아... 오늘 정말 힘들게 보냈다...
* 그날은 진짜 멘탈이 나갔었나보다. 단 한장의 사진도 없구나...(2025년 4월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