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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이구 Nov 30. 2024

엄마의 유방암 선고날, 번호가 따이는 아이러니.

첫눈이 펑펑 내리던 날.

시간은 작년 2023년 11월 말로 거슬러 내려가겠다. 정확히는 1년 전의 일이다.     


 아침에 눈을 떠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를 켜고 쇼츠를 보며 양치를 했다.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쇼츠에서 말하길 요즘 신종 번따 스킬은 휴대폰 메모장에 추파 멘트를 적어두고,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말없이 휴대폰 메모장 화면만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했다. 와 세상 스마트하고, 간단하게 번호를 따는구나 했고, 자신은 유부녀이지만 이런 신종 번따 스킬을 당할 줄은 몰랐다며 웃으며 썰을 푸는 유투버 언냐가 약간은 푼수 같지만 귀여웠다.      


- 번호를 이렇게도 따네 ㅋ 요즘 사람들 재밌게도 산다.

  (지도 요즘사람이면서)


 핸드폰을 껐고 화장실에 씻으러 들어갔다. 따뜻한 샤워에 알맞은 코지한 음악을 틀었고, 머리에 물을 적시는 순간 잘 나오던 음악은 멈추었다. 반갑지 않은 현상이었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물을 껐다. 엄마였다.  

    

 가슴 옆에 콩알 같은 게 잡힌다며 며칠 전 병원을 찾아갔던 엄마였다. 주변에서는 작은 물혹이니 걱정 말라고 엄마를 안심시켰고, 나 또한 그러한 뻔하지만 굳은 말들을 했다. 오히려 아무 일이 아니라는 태도로 엄마를 대했으며 괜히 유난을 떠는 게 더 모두를 불안하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물혹이라고 모두가 예상하던 그 세포에 대한 결과 값이 드디어 나오는 날이었다. 애석하게도, 슬픈 예감은 들어맞는 법. 엄마 몸에 있던 그 세포는 암이었다.


그렇다 유방암이었다.     

 

- 이진아~ 엄마 암 맞대. 맞다네.. 수술해야 한대. 이번주에 수술 날짜 잡을 거고.. 근데 1기래 거의 완전 초기래 세포만 똑 떼내면 된대.. 근데 항암치료를 받으면 머리가 다 빠진다네.. 그것만 피하고 싶다.. 근데. 오늘 눈이 왜 이렇게 많이 오니...?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더 서글프다.    

  

 병원에서 울음을 참지 못하고 말하는 엄마의 말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당장이라도 택시를 잡아 엄마한테 가고 싶었다. 함께 얼싸안고 지금 엄마가 있는 그 공간에서 울고 싶었다. 전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서글프게 들렸고, 그냥 함께하고 싶었다. 엄마한테 당장 가겠다며, 오늘의 약속은 취소하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러지 말라고, 네가 와도 해줄 수 있는 건 없다며. 너는 일정 그대로 너의 하루를 보내라며 나를 다독여 주었다. 너무나 씩씩하게 모두를 밝게 햇살처럼 비춰주던 우리 엄마는, 암 선고를 받고도 우리에게 늘 그랬듯 햇살처럼 따듯하게 있어 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화장실 맨바닥에 주저앉아 계속을 울었다. 지켜보지도 못했지만 엄마의 햇살 같던 젊은 시절과 지금의 엄마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      


- 고생만 한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떻게 해.   

  

 그렇게 눈물을 닦고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씻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아 틀어 올리고 터덜터덜 걸어 나왔고, 머리를 말리면서 한참을 울었다. 시끄러운 드라이기 소리와 내 울음소리는 이중주를 이뤘으며, 다 모르겠고 그냥 너무 어이가 없어서 눈에서 물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화장을 시작했고, 파운데이션과 눈물이 섞여 화장이 보기 싫게 뜨게 되었다. 오늘 엄마가 암 선고를 받았지만 내가 못생겨 보이는 건 허락할 수 없기에.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클렌징 티슈를 꺼내어 얼굴을 부드럽게 닦았다. 이번에는 눈물을 참아보자며 화장을 다시 두들겼고, 가장 중요한 속눈썹을 바짝 올리는 시점에는 울음을 꾹 참고 화장을 보송하게 끝마쳤다.      


 기분이 거지 같지만 친구들을 압구정 로데오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나름의 깜찍, 빈티지 코어로 옷을 입었고. 약간의 꼴사나운 '깜찍'을 김치처럼 눌러주는 검은색 에어포스를 신고 밖을 나왔다. 버스를 타고 하늘은 보니 펑펑 내리던 눈은 그쳤고, 오늘 아침에도 보았던 엄마가 사무치게 생각났다.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 엄마~~ 눈도 그쳤다. 초기에 발견되었고, 금방 수술할 수 있다는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 엄마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많으니까. 우리 이겨내 보자. 우리 가족들이 서로를 더 아끼고 사랑하고, 단단해지는 시간이 되겠네.     


-그래~~ 전화 위복.

 너무 춥다 옷 단단히 입고 가라~ 사랑해     


-나도 사랑해~~     


-쉰~~~^ 나게 놀다 와

(탬버린으로 엉덩이를 쳐대는 라이언)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말 ‘전화위복 轉禍爲福’


벼락같은 일들이 생길 때마다 우리 엄마가 주문처럼 외우는 말이었다. 그해 7월 다시 한번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고, 동일한 7월 6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였다. 엄마는 늘 나에게 해주었던 말이었다.


거짓말처럼 그 사자성어는 나에게 좌우명이 되었다.    

 

 미련한 건지, 바보 같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기가 센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가 없는 말과 태도에 휘둘리는 타입은 아니다. 나에게 오히려 상처를 받으라며 개소리를 퍼붓던 전 남친의 악담은 그냥 웃겼다. 20대 초반까지 혈육과 육탄전을 벌일 때면, 엄마의 아들은 나의 약한 아킬레스건을 부숴버리는 말들을 자주 던졌다. 처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성격과 미련하게 살이 오른 나의 외모에 대한 비하를 매번 신랄하게 해댔다. 이에 질세냐? 나 또한 우리 가문에서 제일 못생긴 새끼가 어디서 나에게 그딴 말을 하냐며, 니는 잘란 게 키밖에 없는 대가리 큰 새끼인지 모르냐며, 니 대가리가 너무 커서 내 엄마가 너를 낳다가 죽을 뻔한 거 기억 안나냐고. 니는 내 동생이었으면 쳐 맞아서 이미 저세상에 있을 운명이라면서. 그렇게 바락바락 대들 때면 183의 장정은, 그대로 자신보다 한참 밑에 있는 나의 대가리에 손바닥을 내리꽂았다.     


 써글놈.      


 중학교 3학년 시절, 무리에서 나를 떨구기 위해 화장실로 불러내어 다구리를 치려던 10명의 여자애들의 공격도 그냥 우스웠다. 너네 다수가 한 명을 두고 이러고 있는 거 웃긴 거 아냐며, 너네 무리의 문화냐고, 그게 문화라면 난 나간다고. 알아서 잘들 지내라며 오히려 그들을 황당하게 했다. 그리고 거기 너. 나랑 초딩때부터 절친 아니었냐고, 너는 나에게 이랬으면 안 된다며 일침을 가해 무리 중에 한 명을 되려 울려버렸다.      


 고딩 시절 사이코 호랑이로 소문이 자자하던 기술가정 선생님은 나를 퇴학을 시키겠다며 고함을 지르던 그 모습도. 솔직히 웃겼다. 하교를 앞두고 신발장 근처 복도부터 신발을 갈아 신었다는 고작의 이유로. 나에게 퇴학을 시키겠다고 고함을 지르는 50대 어른의 모습이 너무나 노간지라서 나도 모르게 실소가 삐져나왔다. 내 입에서 나온 ‘치-.’라는 소리에 눈이 돌아버리신 선생님은 내 이름과 반을 물어보셨다. 하지만 나를 조금 편애하던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옆에 계셨고, 귀가 벌게져 싹수가 노랗게 어른에게 할 말을 하려던 나를 붙잡고 어서 집으로 가라며 학교 밖으로 밀어내셨다.      


  누군가의 잽에는 끄떡이 없는 이상한 성격을 가졌으며, 동시에 나는 명언, 좌우명, 멋들어진 말에 힘 또한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죽어 없어져 세상의 균열조차 낼 수 없는 미천한 인간의 뇌에서 흘러나온 ‘무생물의 말’이라는 것들. 그것을 신뢰하는 나약한 인간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저 대가리가 좀 컸다고, 염세한 것이 아주 멋있는 줄 아는 오만한 멍청이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아프고 내 인생은 바뀌었다. ‘말과 따뜻한 태도’라는 것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달콤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사자성어, 책 속의 말, 위로를 주는 명언 쇼츠들이 눈에 들어왔다. 또 발길을 끊으려고 했던 교회도 다시 열심히 나가게 되었다. 큰 기적을 바라면 내가 도피할 수 있는 희망마저 가져갈 것 같다는 생각에 겁을 먹었다. 큰 것을 바라지 않으니, 그저 우리 가족들에게  이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힘만을 달라며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또 비굴하지만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CCM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켜 기도를 했다. 다 모르겠고 우리 엄마 좀 살려달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여기서 비굴한 것은 내가 믿는 신과 무생물의 것들을 무시했던 나의 태세전환이 몹시나 비굴했다는 것이다.     


 고작 유방암 1기 가지고 유난이라는 말을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더 심각한 병세로 힘들어하고 있는 환우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있으니. 그러나 어제만 해도 멀쩡하게 아무런 수심 없이 웃던 우리 가족들의 얼굴에 거짓말처럼 웃음이 사라졌고, 햇살 옆에 묵묵히 떠 있는 달 같던 우리 아빠는 더 과묵해졌다.


 암선고를 받고 며칠 뒤 엄마의 생일이었다. 그날도 이상하리만큼 매섭게 추운 날이었고, 4명이서 둘러앉아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외식을 했다. 음식을 사랑하는 우리 엄마는 별 감흥 없이 몇 술 뜨지 않았고, 엄마의 생일이라고 100만 원을 보내준 오빠의 송금 메시지에도 이전처럼 환히 웃지 않았다. 눈물을 참으며 거지 같은 먹구름을 위에 두고 나는 밥을 먹었고, 엄마의 케이크 초에 불을 붙였다. 고작 유방암 1기이지만, 우리 가족이 웃음을 잃고, 행복감을 잃고, 끝이 없는 절망에 빠져 버렸다면 절대로 유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절대로.     


 우리 가족에겐 엄마의 암 선고는 재앙과 같았다. 그리고 교회에 냅다 달려가 시발 하나님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냐는 기도를 매주 하였으며 엉덩이가 들썩이는 신나는 찬양이 흘러나올 때도 난 울며 기도했다. 우리 엄마 좀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약속 장소로 향하기 위해 나와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환승하려던 때였다. 선정릉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휴대폰에 글을 쓰고 있었다. 오늘의 감정을 이렇게라도 담아야겠다는 마음이었으려나.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이 심정을 어딘가에 풀 곳이 필요했다. 선정릉역에 열차가 들어왔고 문이 열렸다. 열차 안에 탑승을 했고, 어차피 압구정 로데오에서 내릴 거니까 서서 가자는 마음으로 휴대폰 자판을 두들겼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눈앞에, 뉴발란스 530을 신고 검은색 슬랙스가 얹어져 있는 남자의 발이 멈춰 섰다. 순간 전 남자 친구와의 동일한 착장에 그 사람인가라는 바보 같은 기대를 했고, 고개를 들어 확인을 했다. 역시나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 눈앞에 갤럭시 휴대폰을 들이밀고 있는 남자가 서있었다.


 뭐야. 상단바가 내려와서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데이터 어쩌고, 저쩌구만 잔뜩 있는 화면을 꿈뻑꿈뻑 보여주었다.


뭐지 이 덜떨어진 놈은?     

 


- 어.. 저기 아무것도...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에 화들짝 놀란 그는 다시 휴대폰을 거둬갔다. 휴대폰을 잠시 뒤적거리다가 원래 보여주려고 했던 메모장을 나에게 말없이 보여줬다.

대충 내용은 이랬다.

     

너무 예쁘고, 귀여우셔서 눈이 갔습니다.

제 이상형이 셔서 그러는데

혹시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아무한테나     


 여기서 읽던걸 멈췄다. 일단 걸치고 있는 옷들은 나쁘지 않았지만, 번호를 줄만큼의 내 취향의 외모가 아니었다. 그도 나의 겉모습에 연락처를 물었으니, 나 또한 그의 겉모습을 보고 결정을 내리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번호를 줄까 말까 고민이 된다면 모를까. 그냥 단숨에 나도 모르게 거절을 했다. 나는 약간은 선이 얇은 남자를 선호하는데 이 남자는 약간의 살집이 있어 보였다. 또, 굳이 따지자면 탁 트인, 시원한 아랍상을 선호하는 나에게 그의 이목구비는 큰 임팩트가 없었다. 더군다나 간편하게 내 목소리도 듣지 않고서, 자신의 목소리 또한 밝힐 용기가 없는 남자에게 나의 연락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은 자신만의 용기를 낸 것 같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매우 용기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또 참으로 쉽고 빠르게 연락처를 받아가려고 하는구나 싶었다. 뭐 아무나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번호를 수집하는 콜랙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건 내 알빠가 아니므로. 무엇보다 내 취향의 남성은 더더욱 아니므로 거절을 하였다.

      

 툭치면 튀어나올 것 같은 나의 동그란 눈은 그대로였고, 나는 벙쪄버렸다. 죄송하 다는 말도,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거짓말도 하지 않은 채. 어디 모자란 애처럼 손을 가로로 저었다. 무음으로 시작된 대화였으니 나는 끝까지 무음으로 끝내야만 할 것 같았다. 누가 보면 마임쇼 대결하는 줄 알았겄네. 한번 다 손사래를 치는 나를 보고 그 남자는 휴대폰을 닫고 빈자리에 앉았다.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지, 일어나 몸을 빙글 돌려 자리를 또다시 옮겨 앉더이다. 그때 살짝 무서웠다. 여기서 내가 칸을 옮기면 더 그림이 이상해질 거 같아 그 자리에 서서 휴대폰을 마저 했고. 그는 바로 다음 역에서 내렸다. 그가 내 눈앞에서 사라졌고, 맞은편 끝자리에 앉은 젊은 서양인 관광객의 미소만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났고, 얼탱 없는 이야기를 먼저 전했다. 전 남자친구 같아 보였으면 번호를 주지 그랬냐고 했지만. 그와 정말 비슷하게 입었고, 가방도 그와 똑같은 노스페이스 등딱지 가방을 메고 있었지만 그냥 이상하게 별로였다는 말을 하고 런던베이글 웨이팅을 걸으러 힘차게 걸어갔다. 런던 베이글에 올라가서 엄마의 얘기를 해주었고, 사려 깊은 나의 친구들은 따뜻한 눈동자와 말로 위로를 주었다. 이들과 둘러앉아 매서운 겨울이 시작되는 날,  따끈한 밥을 나눠 먹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하루였다. 일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봤던 쇼츠의 '신종 번따기술'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나 슬플 수가 있을까 싶었던 하루, 요즘 내 인생은 너무 거지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만의 배설을 하고 있는 와중. 누군가는 내가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연락처를 알고 싶다며 큰 용기를 냈다.


 태어나서 가장 큰 절망감을 느끼고, 세상에 대해 따끈따끈한 독기를 품고 서 있는 내가. 당장이라도 누구에게 시비를 걸 거 같아, 속에 품은 독을 메모장에 풀고 있던 내가. 누군가의 마음에 쏙 들어 보일 수 있는 이 상황이 정말 아이러니했다. 나의 거절에 그는 타격을 입어 앉아 있던 자리를 두 번이나 옮겼지만 말이다. 또 말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거 같아서 친구들에게 엄마의 암선고 소식을 말하였고,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기분을 이날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갔고,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곤 온 가족에게 신기한 일이 있었다며, 오늘의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와 아빠는 웃었고, 오빠는 그 남자 큰 용기를 냈을 텐데 안타깝다며 감정을 대입했다. 자신의 목소리도 밝히지 않고, 내 목소리도 듣지 않고 번호를 물어보는 남자는 별로라는 말에. 오빠는 너는 너무 유난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유난스럽지 않게 남자를 만날려고하면 굉음의 잔소리를 해대는 놈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우리 집 부부의 30주년 결혼기념일 당일날. 엄마는 수술을 받았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친한 교회 언니의 청첩장 모임이었다. 엄마에게 약속을 취소할까?라고 물었지만 역시나 그러지 말라고 했다. 코로나가 다시 유행이니 병원에서는 외부인 출입을 막는다고, 어차피 같이 못 있으니까 오늘도 너의 하루를 살라고 말이다. 몇 달 전 실연 당한 백수가 청첩장 모임을 가서 밥을 얻어먹는 것을 우리 엄마는 늘 싫어했다. 그러나 엄마는 거기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어 보였으며, 물론 엄마의 볼맨소리에 청첩장 모임을 안 가진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암 수술날이 되었고, 아침부터 병원에 달려가 수술실 밖을 하염없이 지켰으며 남은 시간은 카페에 가서 공부를 했다. 약속시간이 되었고, 판교에 있는 아비뉴프랑에서 교회 내에 친한 동갑 무리들, 예비부부와 함께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티 타임을 가졌다. 원형 탁자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모두가 나 빼고 맑게 웃고 있었다. 나는 맑고, 환하게 웃는 방법을 요 며칠간 까먹고 있었음을 그때 느꼈다.


 유독 환하게 웃는 나의 맞은편에 있던 친구. 평소에 그 친구의 웃음만 봐도 나는 즐거웠다. 더 웃었으면 좋겠어서 실없는 농담으로 그녀를 자주 웃기곤 했다. 근데 그날은 그 웃음에 나는 질투를 느꼈다. 나는 오늘 절망적인 하루를 보내고 왔는데, 내가 아끼는 너는 너무나 맑게 웃는구나 하고 말이다. 나는 오늘 너무나 슬픈데,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르겠다는 절망을 느꼈는데, 너희는 내속도 모르고 맑고 환하고 예쁘게 웃는구나 하고. 나의 속은 이제 막 문들어져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데, 웃어야만 했다. 나의 엄마가 암제거 수술을 받았다고 해서, 신혼부부가 마련한 초청의 자리를 곱창낼 순 없으니까.


  나는 예비 신랑분께 넉살 좋게 웃으며 우리 언니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냐고, 결혼을 결심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셨냐고 물었고, 나와 친구들은 MC를 자처해 재롱을 피웠다. 평소 우리들의 그런 재롱을 사랑해 주는 언니였기에. 그렇게 웃으며 티 타임을 마치고 신혼부부는 먼저 집으로 향했고, 나의 사정을 잘 아는 친구들만이 남아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살이 왜 이렇게 빠졌냐고, 너무 수척해졌다며 나를 걱정하는 친구들이었다. '하긴, 요즘 네가 살이 안 빠질 수가 있겠냐. 마음이 그렇게 힘든데.' 내 속도 모르고 맑게 웃고있던 이들은 나를 신경쓰며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그 언니와 단둘이 식사를 가졌던 날이었다. 언니의 청첩장 모임 날, 사실은 엄마의 유방암 수술날이었다고 고백하였고 언니는 담담하게 그 동안의 내 이야기를 지긋이 들어주었다. 언니는 자신의 어머니 또한 유방암 투병을하셨고, 암이 재발해 유방 절제 수술까지 받으셨다는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그날을 견뎌내서 지나온 어머니가 대단하시고, 네가 너무나 장하다고 말해주는 언니였다. 나 또한 언니를 둘러싼 일들을 담담히 들었고, 어린나이에 그런 일들을 겪어서 너무나 힘들었겠다고 때 늦은 위로를 보냈다.


우리는 그날 같은 그림자를 함께 나누며, 같은 눈물을 흘렸다.


 인생은 거지 같은 일들의 연속이다. 우리는 모두에게 보일 수 없는, 어디서 부터 생겼는지도 모르겠는 할큄과 고름을 품고 산다. 또, 누군가를 탓할 수 도 없는 사고 같은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을 티 내면서 살아갈 수 없는 이유는, 모두의 고요함과 평화를 나로 인해 깰 순 없으니까. 또, 신은 내가 견딜 수 있는 일만 주신다는데, 썅 그냥 감내할 수도 없는 일들이 내 상태와는 상관없이 터지는 것만 같다. 알 수 없는 아이러니함의 굴레에 우리는 데굴데굴 구르며 산다. 얻어터지면 터지는 대로, 오물이 묻으면 묻는 대로. 생채기가 나면 나는 대로, 우리는 살아낸다. 그럼 어떡해 죽을 순 없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꼭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생각했을 때.


없다는 것이다.


 힘들 때일수록 힘을 주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힘을 내려고 힘을 주고, 나 자신을 꽉 쥐는 순간. 나는 찌익하고 징그러운 소리를 낼 것이며, 차마 쳐다보기도 힘든 몰골을 보이며 삐죽 터져버릴 것이다. 힘들면 힘든 것을 받아들이고, 기쁘면 기뻐하고, 슬프면 슬퍼하라는 것이다. 너무 힘이 든다면 그 자리에 픽 쓰러져 눈물이 가로로 흐르게 내버려 두어도 보고. 믿고 있는 신이 있다면 시발 나 이렇게 버려둘 거냐고 어떻게 좀 해보라고 고함도 치라는 것이다. 자신만의 창구를 만들어내어 나를 그냥 그대로 슬퍼하게, 힘들어하게 고요하게 잠시라도 넣어두는 것이 얼마 살지 않은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 모르겠다. 내년이 되었을 때는 '방법'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


- 이진아 인생은 전화위복이다. 힘든 때일수록 쏟아 날구멍은 있어. 이날을 발판 삼아서 튀어 오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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