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를 물어보며, 밥을 먹자던 연하남
- 할렐루야~ 쌀아계씬 예쑤님~
아따 이 새벽부터 까랑까랑하시네.
나름 초등학생 때부터 이모를 따라서 교회를 열심히 나갔었다. 선데이 크리스천 인생, 20년 만에 새벽예배는 처음이었다. 그날은 개천절이었다. 연휴라서 그런가 새벽 5시가 채 되지 않았던 시간인데 사람들이 미어터졌고, 교회 주차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교회 지인들과 MT를 마치고, 새벽 예배를 참석했다. 나도 믿음의 배우자와 함께 좋은 믿음의 가정을 꾸리게 해 달라며 내가 믿는 신에게 기도했다. 아주 정착하고 싶고, 결혼하고 싶어 미치겠는 마음이 갑자기 절절 끓었다. 팔팔 끓는 아랫목 같은 마음을 가득 담아 기도를 드렸다.
나를 보고 계시다면 씨뱅 이렇게 취업도, 뭣도 아무것도 안되게 두지 말라는 기도는 보너스.
아무튼 나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짝을 만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했던, 특별한 새벽이었다. 그렇게 새벽 예배를 드리고 교회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교회 문을 나왔다. 시간은 새벽 6시가 조금 넘어간 시간이었고, 집에 갈 지하철을 알아보고 있었다. 원래 타려던 첫차는 시간이 촉박해 타지 않았고 그다음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에 문이 열리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맨 끝자리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나의 맞은편 끝자리엔 내 또래의 남자가 폴폴폴 졸고 있었다. 머리가 깔끔하게 손질되어 시원하게 넘어가 있었고, 옷도 깨나 꾸며 입은 상태로 의자에 기대어 자고 있는 꼴. 그 꼴이 딱 봐도 새벽까지 술을 진탕 먹은 모습이었다. 우리가 몸을 실은 차는 첫차는 아니었지만, 하루 중 두 번째의 차였다. 새벽부터 취해있는 저 남자가 웃겼으며, 괜찮게 생겼네.라는 생각만을 하고 이내 나는 다리를 꼬아 휴대폰을 바라봤다. 열차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 고요했고, 가방을 열어 책을 읽을까 했지만 새벽부터 책을 읽을 뇌의 상태도 아니었기에. 또 금방 내릴 것이니 휴대폰으로 릴스를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 쿵-!
맞은편에 앉아 졸고 있는 남자의 품 안에서 아이폰이 떨어졌다. 쿵 소리에 나도 모르는 무심결에 눈이 갔지만 무한도전 릴스를 안락하게 보고 있었기에, 이내 릴스에 정신을 그대로 팔았다. 나에게 그 남자의 존재감은 당연히 0에 수렴했으며, 라푼젤의 모습을 한 박명수의 화려한 엑팅에 나는 온전히 집중을 했다.
지하철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고, 모두가 내려야 하는 종착역이 다가왔다. 문이 열렸고,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함께 일어났지만, 나의 눈은 그가 떨어뜨린 휴대폰에 향해있었다. 그렇다 그 사람은 휴대폰이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지하철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하철 문이 열렸고, 나는 황급히 그가 떨어뜨린 아이폰과 펴보진 않았지만 그의 주머니에서 같이 나온 것 같은 종이를 잽싸게 주웠다.
나보다 꽤나 위에 있는 그의 날갯죽지를 톡톡 쳤고, 그는 나를 돌아봤다. 그의 눈을 마주치며 떨어뜨린 휴대폰과 종이, 그리고 ‘이거 떨어 뜨리셨어요’라는 건조한 말만을 건네고 내 갈 길을 갔다. 눈앞에 있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올렸고, 지잉 내 몸은 올라가고 있었다. 노래를 무엇으로 바꿀까 하는 생각으로 스포티파이를 뒤적거리는데, 누군가 내 날개 죽지를 톡톡 치는 것이었다.
-저....
아니나 달라, 그 남자였다. 나의 바로 뒤에 서있던 그는 에스컬레이터 손잡이를 꽉 잡고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말을 잇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얼굴로 휴대폰을 열었고, 인스타그램을 켜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돌리곤 다시 휴대폰을 닫았다. 그는 잠겨져 있는 휴대폰을 순식간에 나의 손에 턱 하고 얹어버렸다.
시바 이게 뭐지. 내 손위에 있는 이 흰색 아이폰. 그 아이폰 안에는 아주 귀여운 흰색의 비숑이 갇혀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으며, 당장이라도 배방구를 해주고 싶은 깜찍한 아가였다. 내 손위에 올려져 있는 이 휴대폰을 어찌해야 하지. 나는 당황해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 새벽에 나도 정신이 없어 순간 이 휴대폰이 이 사람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스타그램 키는 거 봤잖아. 이멍청아
- 휴대폰이 그쪽게 아니에요?
나의 멍청한 질문에 그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돌렸고, 눈을 부릅뜨며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그는 귓구멍에 끼고 있던 에어팟을 떨구었다.
진짜 가지가지한다.
나는 웃음이 삐져나왔고, 웃었다. 그는 굼뜬 몸으로 허리를 숙여 에어팟 프로 콩나물을 찾는 의미 없는 행동을 했고, 동시에 내 발 밑에 뭔가 걸리는 게 있어 나도 몸을 숙였다. 역시나 나의 에어포스 옆에 그의 콩나물이 누워있었으며, 그걸 집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웃으며 콩나물을 받았고,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물건을 두 번이나 찾아주었다. 에스컬레이터가 때마침 끝나가고 있어 우리는 황급히 내렸다. 그는 웃으면서 '아 잠시만요. 잠깐만요'라는 말을 하며 나를 불러 세웠다. 아무리 그에게 휴대폰을 가져가라고 주어도 그는 절대로 휴대폰을 가져가지 않았다. 왜 이러시냐며, 제발 가져가라고 그의 휴대폰을 얼굴까지 들이밀어도 능글맞게 웃으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만을 했다.
옥신각신을 하며 그와 나는 지하철 개찰구까지 걸어갔고, 새벽이었지만 열차의 종착역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휴대폰을 두 개 들고 있는 나와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그를 사람들은 쳐다보며 비켜갔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고, 카드를 쥔 손으로 개찰구를 나에게 가리켰다.
- 일단 찍고 나가시죠.
그래. 일단 나가야 이 휴대폰을 그에게 다시 줄 수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개찰구 앞에 섰다. 나도 휴대폰 뒤에 달려있는 카드 슬롯 케이스에서 교통카드를 꺼냈다. 동시에 다른 하나의 카드가 튀어나가 멀리 비껴갔고, 그는 달려가서 나의 카드를 주워주었다. 웃으며 나에게 카드를 건넸고, 나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카드를 받았다. 그 또한 나에게서 달아난 내 물건을 찾아주었던 순간이었다. 내가 먼저 카드를 찍고 나왔고 그가 카드를 어서 찍고 나오길 기다렸다.
드디어, 마침내. 그는 집요하게 휴대폰을 주려는 나에게 휴대폰을 건네어받았아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또다시 '잠깐만요'라는 말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이것도 인연인데.. 밥 한 번 먹어요. 제가 사드릴게요
이 말을 사실 나의 날개 죽지를 건들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이 이렇게나 많은 과정을 거치고 나올 줄은 몰랐다. 그는 드디어 내손에 고스란히 얹어져 있는 휴대폰을 가져갔고, 전화번호 다이얼 창을 켰다. 그제야 나는 그를 유심히 봤다.
나보다 꽤 위에 있는 머리, 하얀 얼굴, 쌈뽕 하게 왁스로 스타일링한 머리, 진청 셋업 재킷과 바지를 입었고, 검은색 로퍼를 신었다. 얼굴의 이목구비는 아랍, 두부로 나누자면 두부에 가까웠으나, 코로 떨어지는 선은 뚜렷했다. 눈은 크지 않지만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가 조금은 강아지 같아 귀여웠다. 그렇다 슬림하지만 긴 허우대를 가졌으며 그에 반해 얼굴은 귀여웠다. 사실 이러한 분석을 하기도 전에 이미 뭐인지 모르겠지만 '귀엽네?'라는 간단명료한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며, 나도 모르게 변호를 주었다. 물론 엄청나게 망설였다.
- 음.. 어.. 네..?
망설이는 눈으로 그를 뻔히 쳐다봤고, 그는 말없이 자신의 휴대폰을 나에게 건네고 있었다. 귀엽네. 웃기네, 오늘 이 상황. 번호를 천천히, 나는 망설이고 있으며, 쉬운 여자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찍어주었다. 사실 낯선 이에게 나의 번호를 처음으로 주었던 순간이었다. 남자친구가 있을 때는 당연히 거절, 강남역 한복판에 난파 같은 것들은 그냥 지나친다. 또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닌 남자는 정중히 거절을 한다.
근데? 이 남자는 뭔지 모르겠지만 귀여웠고, 골 때렸고, 귀여웠고, 이 모든 상황이 웃겼다.
그러므로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번호를 그냥 주고 싶었다.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래?라는 생각으로.
- 아 근데 너무 취하신 거 같은데...? 나중에 기억 안 나실 거 같아요!
나는 그에게 물었고, 그는 아까 뵀을 때부터 술은 다 깼다고 웃으며 나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집이 어느 쪽이냐는 물음과 함께, 그는 먼저 자신이 사는 아파트 이름을 말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아파트였고, 동네 주민이라는 생각에 약간의 경계가 풀어졌다. 나는 나의 아파트 이름을 말했고, 그는 듣자마자 동네 주민이 아니냐고 반가워했다.
-하긴.. 이 시간에 집에 가시는 거면 이 근처 사시는 거네요. 저도 그래요. 와. 진짜 동네에서 밥 먹으면 딱 이겠다.
마지막 마디를 뱉고 그는 배시시 웃었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 아 저 진짜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까 진짜 너무 이상해 보였을 거 같은데.. 저 진짜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 오늘은 휴일이잖아요? 그래서 마셨고, 원래 이렇게 막 이 새벽에 이러고 있는 게 흔한 일이 아니에요. 저 회사 다니는 회사원이에요.
그는 지하철에 널브러져서 졸던 자신의 과오를 청산하고자, 말을 주절거렸다. 그러나 여자들에게 이러한 말들은 더 공포를 자극한다.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을 하며 번호를 물어보는 낯선 남자들의 고정 멘트였기에, 이미 번호를 줘버린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말을 듣자마자, 진짜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내 얼굴은 어두워졌으며, 나는 후회가 들었다. 진짜 이 남자가 누군 줄 알고 번호를 주었을까.. 흉흉한 세상인데, 이상한 사람이면 어떻게 해..
난 정말 미친년이구나 하고 말이다.
난 내 품에 팔짱을 두르고 집으로 가는 길을 걸었고, 그는 계속해서 나를 강아지 마냥 따라왔다. 정말 쫓아오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이라고, 자신도 이쪽으로 가려했다고. 걱정 마시라는 말을 하면서 내 옆에 가까이 붙어 걸었다. 계속해서 내가 그를 경계하는 태도를 그는 신경 쓰는 듯한 눈치였고, 눈썹이 약간은 휘어지면서, 억울해지는 까만 눈동자가 왜인지 모르게 귀여워 보였다. 지하철부터 둘의 집 쪽 까지는 도보로 꽤 시간이 걸리므로, 계속해서 함께 하염없이 걸었다. 그는 주절주절 나에게 자신의 신상 정보를 말해주었다.
- 저는 부모님이랑 살아요. 여기가 본가예요. 아 참 여기 주말에 애기들 짱 많잖아요. 문화 센터도 있고, 여기 지금 왜 불 켜져 있지? 여기 뭐예요?
자신도 이곳이 익숙하며, 자신의 나와바리이며, 이 지역사회에 몸담고 있는 지역주민이라는 것을 괜히 아는 척을 하면서 어필하였다. 주절주절 이 동네는 사람이 너무 없다며, 심심하지 않냐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한다면서.
그는 자기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며, 회사원이라는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 이번엔 하나의 정보를 더 흘렸다. 자신은 자동차 회사에 다닌다며.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말을 자신감 있게 했다. 자격지심 가득한 취준생인 나에게 그의 말은 귓등에도 안 들어왔으며, '왜 갑자기 잘난 척이야..' 하는 생각으로 어떤 자동차 회사인지, 무슨 계열인지도 묻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신상을 자신감 있게 쏟아냈고 나는 그러시구나.라는 말만 반복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출구로 걸어갔고, 조용한 역 안에 그의 딱딱한 로퍼 소리와 우리의 대화 소리만이 고요하게 퍼졌다.
문득 든 생각. 잠깐만, 지금 나의 모습이 그렇게 번호를 물어볼만한 상태는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디다스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후쿠오카에서 산 호피무늬 안경을 얼굴에 얹고 있었다.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흰색 화이드 카고팬츠에 된장색의 에어포스를 신고 있었다. 한 손에는 아이보리색 바람막이를 들고, 회색 잔스포츠 백팩을 메었다.
- 저 지금 몰골이 너무 말이 아닌데..사실 머리도 안 감았어요,, 왜,, 왜 저에게..
나는 갑자기 청결 상태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날렸으며, 얼탱이가 없는 이 상황 가운데 정말로 그의 의중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 질문을 들었던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진짜 그렇지 않아요..’라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또다시 나를 두 손으로 가리키며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아니에요 진심으로. 전혀 아니에요.’라는 말을 했다.
그렇게 또 걸으면서 그는 나에게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되냐는 질문을 했다. 혹시 실례라면 미안하다는 말을 붙이며. 나는 화장을 안 하면 고등학생 같다는 소리도 가끔 듣는다. 쌩얼로 마트를 가면 종업원들이 가끔은 반말을 하기도 하며, 마스크를 끼고 공항에 가면 공항직원들은 나를 미성년자 동반 라인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또, 20대 중반에는 후드티를 입고 롯데월드에서 혼자 줄을 서고 있으면 고딩들한테 시비가 털리기도 하여, 동행했던 전 남자친구는 그 이후로 나를 고딩 소굴에 혼자 두지 않았다.
아무튼 동안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기에 나의 나이를 낯선 이들에게 쉽게 밝히지 않는다. 나는 내가 몇 살일 것 같냐는 복학생 같은 질문을 되려 했고, 그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자신 보다 3살은 어릴 것 같다는 대답을 했다. 나이를 묻기 전에는 이 남자, 직장인이고 열심히 살았다 했으니 당연히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오빠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그럼 그쪽은 몇 살이신데요?'라고 물었고.
그의 나이는 나보다 1살이 어렸다. 그렇다 연하남이었다.
그의 나이를 듣고 나는 화들짝 놀랐고, 나의 표정을 주시한 그는 ‘왜요?? 우리 동갑이에요??’라고 물었다. 나는 '제가 1살 누나예요'라고 말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약간은 놀랐지만 괜찮다는 말을 했다.
뭐가 괜찮은 건데;;;
이어서 나이를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또 실례를 했다며 사과를 했다. ‘아니에요! 오늘 가뜩이나 초딩처럼 입긴 했어요, 제가 화장을 안 하면 오해를 자주 받아요' 라며 분위기를 풀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나의 장난에 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녜요!!라고 말하면서 나의 말을 부정했다. 손사래를 치면서 내 팔목을 살짝 잡았고, 그는 황급히 손을 뗐으며 자신도 놀랬는지 토끼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보다 1살이 어리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가 조금 더 귀여워 보였다. 시종일관 '아니에요!!'라며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과 자신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종종 거림이 갑자기 살짝은 깜찍했다. 내가 나를 낮추는 표현을 조금이라도 할 때마다 강아지 똥 같은 눈을 하며 연신 아니라고 종종거리는 그 남자의 모습이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뭐인지 모르겠지만 약간은 순수해 보이는. 그런 연하남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의 얼굴을 자세히 봤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야 그가 뿌린 향수 냄새가 코에 들어왔고, 조말론에 우드세이지 앤 씨솔트와 비슷한 우디 하면서 부드러운 냄새가 났다. 누가 보면 성수동에 있는 탬버린즈 매장 직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깔쌈한 피부와 향기를 가지고 있었다. 158cm인 내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몇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자,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나와 함께 서서 걸었던 남성들의 신장을 계산해 보았을 때 178은 족히 넘어 보였고, 180 사이의 키를 가져보였다. 또 그는 자동차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면 디자인 회사나 의류 브랜드에서 일할 것 같은 쌈뽕 한 아웃핏을 갖추고 있었다.
그와 대화를 하면서 경계가 조금은 풀린 나는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 다운 얼굴도 있네 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그도 웃으며 한쪽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이내 또 다시 두 손을 앞으로 움직이며 ‘일단 앞을 봐주세요’라는 말을 했다.
나이에 비해 빨리 회사원이 되신 거 아니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다른 애들 다 놀 때 자신은 공부만 했고, 정말 한 맺히게 살았다고 했다. 이직도 하고 정말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이렇게 약간 날티나게 생겨서' 오해도 많이 받는다고, 근데 자신은 전혀 억울하다고. 이제야 놀기도 많이 놀지만, 어릴 땐 공부를 정말 열심히,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말을 했다. 첫 모습 빼고는 이 남자에게 술 취한 느낌이 없었는데, 이렇게 자아가 비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내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아 역시나 이놈 취한 놈이었구나 싶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직업을 가졌길래 이렇게 유난이야.
-세상이 너무 팍팍하잖아요. 다 먹고살기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이것도 인연인데, 동네에서 같이 밥도 먹으면서, 놀면서 알아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라는 싱거운 말만을 했다. 그는 다시 자신이 다니는 회사 얘기를 했다. 사실 자신은 자동차 회사를 다닌다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대뜸 B사를 다닌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허우대가 멀쩡한 놈이 대기업을 다닌다는 게 왜인지 모르게 안 믿어졌으며, 괜히 거짓말 치는 거 아니야?라는 의심이 들고 다시 경계 모드를 켰다. 우연의 일치인지 우리 오빠도 같은 계열사의 자동차 회사를 다니고 있으며, 그 남자가 다니는 B사에는 오빠의 친구도 다니고 있다.
-아 저희 오빠도 사실 자동차 회사 다녀요 A사, 저희 오빠 친구들도 많이 다녀요 B사. 저희 오빠는 oo팀이에요. 자동차 oo 할 때 ㅁㅁ하는.
한 명밖에 안 다니는데 많이 다닌다고 구라 쳤다.
-아 진짜요?? 사실 저희 형이 A사를 다녀요.. 신기하네요.. oo하시는 구나...
- 헐 정말요?? 같은 팀은 아니겠죠? 여기 근처에 다니실까요? 저희 오빠는 ㅇㅇ시에 있는 공장으로 출근해요. 요기 근처에 자동차 공장 많잖아욧!
나는 그의 형과 우리 오빠가 같은 부서이면 신기하겠다는 생각에 그의 형에 대한 질문만 해댔다. 그는 나의 질문은 웃으면서 무시하였고, 자신의 세부 소속을 밝혔다. B사에서도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팀 C사의 연구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더이다.
- 저는 C사 연구원이에요. oo에 대한 설계를 전반적으로 하고 있어요.
재수 없어. 너무나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직업을 설명하고 싶어 미치겠는 속마음이 다 투명하게 보여서 좀 짜증 났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반응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이 동네에서는 그 정도는 놀라운 것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물론 나는 쥐뿔도 없고, 이룬 것 아무것도 없는. 자격지심에 똘똘 뭉친 취준생이지만 말이다. 물론 우리 오빠가 A사에 합격을 했을 때 나는 울었다. 그러므로 그가 C사 연구원이 되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을 했을지 보이긴 하지만, 초면에 처음 보는 여자에게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난 모습은 정말 가벼워 보였다. 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이런 식으로 꼬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별로였다.
우리 집 아파트 단지에 다다랐고, 우리는 갈라져야 하는 시점이 왔다. 그는 갑자기 발을 멈춰 가만히 섰다. 그는 자신의 등에 붙어 있던 르메르 크루아상 범백을 앞으로 돌려 지퍼를 열었다. 고개를 숙여 가방에서 주섬주섬 검은색 종이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 이건 제 명함이에요. 꼭 전화해요. 우리 밥 한번 먹어요. 심심할 때도 연락하고요. 정말이에요! 꼭 해요. 우리 밥 먹어요.
한 끼 줍쇼 같았다. 밥에 목숨을 거네. ‘네가 하세요’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내 번호를 가져갔으니 정말 내가 생각나면 네가 하겠거니 했다. 그의 명함을 자세히 봤고, 검은색 빳빳한 종이에 C사 로고가 음각으로 박혀있었다. 그 간지나는 명함을 뒤로 돌려보니 그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이름도 평범하지 않은 ‘X’ 씨였다. 그러나 이름 자체는 'X'씨 가문에서는 흔하게 사용하는 이름들 중 하나였다. 동명이인도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이름. 실제로 그의 이름은 대학생 때 과방에서 느끼한 목소리로 벚꽃엔딩을 부르며, 축제 때마다 꼴사납게 나대던 과대 오빠와 동명이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 향하기 전에 나에게 하이파이브를 청했고, 나는 가만히 손을 펼쳐 허공에 두었다. 그는 손을 나에게 가까이 가져다 댔고, 내 손을 살포시 몇 초 동안 잡았다. 또 손을 잡으며 자신에게 연락을 달라며 당부했다. ‘네가 하거라.’ 그렇게 그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고, 뒤돌아 나에게 팔을 휙휙 저으며 ‘전화해요~~’ 라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는 그의 명함을 만지작 잡으며 나의 아파트로 향했다.
아침까지 술 쳐 마시고 지하철에서 여자 번호 따는 자동차 회사 다니는 놈 중에 멀쩡한 새끼가 어딨어. 하는 생각으로 집에 들어왔고. 때마침 아침까지 술 쳐마시고 들어와 샤워를 하고 잠을 청하려는 A사 직원이 우리 집에 있었다. 바로 그에게 따끈따끈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을 한 뒤 명함을 보여줬다.
- 진짜네. 맞네. B사 얘네 이런 명함 써. 실제로 C에 이 팀이 있어. 얘 연구원이네? 공부 잘했겠네. 구라는 아닌 거 같다. 야 근데 조심해라. 뭐든 조심. 이제 꺼져 나 잘 거야.
나의 마음은 사실 뒤숭숭했다. 결혼할 남자를 주세요라고 내가 믿는 신에게 처음으로 진지하게 기도했던 날이었다. 기도를 한 지 1시간도 안 돼서 남자가 꼬여버렸네. 퀭한 몰골에 모자를 쓰고 터덜 터덜 집으로 가는 길에 풀착장으로 꾸민 남자가 내게 들러붙어서 번호를 달라고, 밥 한번 먹자고 얘기하고 있는 이 상황이 매우 웃겼다. 번호만 물어보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순식간에 세미 소개팅처럼 서로의 신상정보를 조금씩 나누면서 발맞춰 걸었다는 사실이 얼떨떨했다. 그래. 드디어 사랑이 시작되려나. 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서양 영화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일단 씻고 침대에 누웠으며, 카톡으로 아침부터 이 소식을 나의 소녀들에게 전하였다.
나의 소녀들은 길바닥에서 그냥 번호를 따간 게 아니라 둘이 헌팅포차에서 만났냐고, 뭔 놈에 대화를 그렇게 나눴냐며 신기해했다. '왜 혼자 드라마를 찍고 다녀. 연락 오면 드라마고, 안 오면 시트콤이다.' 하면서 쪼개더이다. 나는 남자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장기연애를 마치고 나서 까먹어버렸다. 그냥 목석이 돼버린 나는 어쩌면 좋냐고 정말 연락을 해야 하냐고, 아니면 기다려야 하냐고 물었다.
남자가 생겼으니 헤쳐 모이자며 번개로 점심부터 모인 소녀들과 그 남자에 대한 열띤 토론을 했다. 그러나 그 토론이 무색하게 오후 5시가 돼도 그에게 문자나 연락은 오지 않았다. 괜히 차도에 지나가는 C사 자동차들에 돌멩이를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락을 하라고 했던 그 남자의 말을 믿고 문자를 보내라는 친구들이었다. 그 정도로 깔쌈한 피지컬과 와꾸, 솔직히 말하면 너무나 쌈뽕 한 직업을 갖고 있는 놈이 지하철에서 얻어걸렸으면 나라도 먼저 연락을 했을 거라고.
- 얘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이년아. 연하남? 귀요미 누나가 낚아버려.
그래. 결심했어. 문자를 보내기로. 나의 전화목록에 아침 7시 08분 빨갛게 찍혀있는 부재중 전화. 명함과 대조했을 때 동일한 번호였다. 카톡을 보내는 것은 어떠냐는 친구들의 제안이 왜인지 모르게 싫었고, 문자를 전송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머리를 싸매 한참을 고민했고, 너무 다정하지도, 기다린 것 같지도 않게. 쿨하게. 그날의 해프닝을 그저. 그냥. 가볍게? 기억하냐고 묻는 짤막한 멘트를 생각해 냈다.
- 아침엔 기억이 나시나요? ㅋㅋㅋㅋ
파란 말풍선은 발송됐고, 이제 그에게 답장이 올 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