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광

by 강인한

1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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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부터 용산으로 갈 거고. 거기서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볼 거야. 그리고 한동안 한국에 좀 더 머무를 생각이고. 너도 생각 정리되면 연락해.”


자신과 닮았다는 그 사람의 일화 정도는 안다. 베토벤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의 일대기를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연주해 보았다. 전혀 와닿지 않았다.


국제 콩쿠르 본심에서 연주할 월광을 연습하면 할수록 달은 점점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던 그 사람이 싫어져만 갔다. 물론 이 곡이 뛰어난 기교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기교가 필요하지 않은 ‘다른 부분'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 다른 부분이 달을 힘들게 했다. 그것은 기교나 음정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좀 더 감정을 실어서 연주해 보란 말이야.”


달이 어느 정도 피아노 기교를 갖추게 되었을 때쯤, 영수 씨는 더는 끝없는 다카포를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달이 완벽한 기교를 갖추어 갈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아무리 무명 피아니스트 출신이었던 영수 씨에게도 달의 연주에 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피아니스트에게 청력과도 같았다. 달과 영수 씨가 크게 다퉜던 날, 그날따라 달의 연주는 강렬했다. 달은 그 순간의 느낌을 떠올려보았다. 건반을 강하게 눌렀고,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지만, 달의 진심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달은 일종의 반발심으로 아무렇게나 연주했다. 피아니시모를 포르테처럼 연주했지만, 달의 연주를 듣고 있던 영수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영수 씨는 달에게 피아노에 관한 어떠한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10년 간의 다카포의 마침표. 코다의 순간이었다.


달은 거리로 나왔다. 하얀 입김이 위로. 또 위로 자꾸만 올라갔다. 시선을 따라 올라가다 본 달은 여전히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이제 곧 눈이 내릴 것이다. 자정이 다가올수록 도심 속 사람들의 표정에는 설렘이 가득 채워져만 갔다. 조금은 어지러웠다. 그의 걸음걸이는 엇박이었고, 시선은 거리 속에서 흔들렸다.


거리에선 철 지난 캐럴이 울려 퍼졌고, 달은 무작정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어디든 길은 연결되어 있으니까.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템포 루바토, 그리고 페르덴도시. 주머니에 넣은 그의 손은 어쩐지 조금씩 달아올랐고, 걸음걸이의 끝은 작은 골목길 앞이었다. 그리고 그 앞은 끝없는 어둠. 그 어둠을 마주했을 때, 달은 들어가기를 잠시 망설였다. 달을 쫓아온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들어가야만 했다. 그 끝이 어떻게 마무리되던 달은 무대의 피날레를 장식해야만 했다.

그것은 패잔병의 피아니스트에게도 주어진 의무이자 숙명임을 달은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골목길로 들어갔다. 도시의 소음은 점차 어둠 속에 잠겨 갔고, 골목길 담장 위에 앉아 있던 고양이는 고혹적으로 달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한 해가 마무리되는 날. 그럼에도 이곳은 영원한 12월 31일을 바라는 듯, 시간이 잠시 멈춰있었다. 표정이 어두웠던 사람들도 영원한 휴식을 바랐던 것처럼 집 안에 작은 불 하나를 켜놓고 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머물렀던 거리를 달은 걷는다. 추운 겨울 속 가로등 밑 작게 피어난 민들레의 노란 꽃잎에도, 창문이 굳게 닫힌 반지하의 단칸방에도.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걸어가는 달의 뒤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달빛이 예쁘다. 그렇지?’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달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그의 귀에 하나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여기야. 바로 네 발밑.’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자 하나가 달의 밑에서 일렁일렁 춤을 추고 있었다. 달에게 말을 건 것은 그림자였다. 아무런 표정도, 다채로운 색깔도 없는 그것. 그러나 달보다 더 오래, 달보다 더 깊이 달을 지켜봐 온 존재.


“.. 넌 누구야?”

‘나는 너야.’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비유하자면 그래. 너도 봤듯이 달이 두 개로 나뉘었잖아?’


달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고민을 했다. 어떠한 생각을 대입해도 정상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에 단순히 ‘술에 취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달은 고개를 숙였다. 가로등 불빛이 그림자의 끝을 길게 늘였다.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듯 보였다. 상황은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물어보고 싶은 점들은 많았다.


“…근데 왜 지금에서야 나타난 거야?”


그림자는 침묵했다. 찬찬히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두 개의 발자국 소리가 일정하게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한걸음에 영수 씨의 얼굴이 떠올랐고, 또 한 걸음엔 미주의 향이 퍼져나갔다. 두 개의 작은 집 사이로 계단이 보였다. 그 계단을 올라갔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를 말이야?”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던 음악가. 너도 닮았다고 생각해?’’


달 또한 대답하지 않았다. 계단은 꽤 높았고, 그렇기에 걸어가는 데 애를 먹었다. 계단을 중간쯤 올라갔을 때, 달은 뒤를 돌아보았다. 서울의 도심이 한눈에 보였다. 반짝이는 건물들, 자동차의 붉은 브레이크 등이 도시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미주는 용산에 도착했을까. 시간은 어느새 11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그림자는 계속해서 늘어났다가, 짧아지기를 반복하면서 달에게 말을 걸었다.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던 그 음악가와 달은 닮은 점이 분명히 있었다. 예술가로서 중요한 점을 상실한 점. 그 점이 달의 마음에 와닿았다. 하지만 그 결과에서 달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베토벤의 명곡들은 상실의 시기를 거쳐 만들어졌지만, 아직 달은 상실의 과정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 미묘하지만 들여다볼수록 커져만 가는 간극은 달에게 얕은 침묵을 가져다주었다.


‘첫 연주의 순간, 기억나?’

“비창 2악장 말이야?”

‘맞아. 나는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해. 좋았지만 또 답답했지.’


작고 곱다 못해 보드라웠던 손. 달 또한 그 손을 기억했다. 손바닥을 있는 힘껏 쫙 펼쳐도 그의 손가락이 낮은 도에서 높은 도까지 닿지 못했던 순간이 있었다. 약간의 버벅거림이 있었지만, 연주보다 연주한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그 느낌이 좋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그림자는 달의 옆에 있었던 것 같다. 달의 시선은 건반을 향해있었지만, 그림자는 분명 영수 씨의 표정을 보았다. 실패로 끝나버린 본인의 인생에 내려온 마지막 한 줄기를 바라보는 그 눈빛을 그림자는 똑똑히 응시했다. 하지만 그림자는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크게 외쳐보아도 그것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끝없이 퍼져만 갔고, 햇빛이 거실을 채웠던 그 장소에서 들릴 일은 없었다.


“그 곡을 연주하지 말았어야 했어.”


달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달이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연주하려던 피아노 뚜껑을 덮고 조용히 집을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과 원 없이 놀고, 밤늦게 들어와 가족들과 시시콜콜한 예능이나 드라마를 보면서 지냈을 것이다.


‘너의 연주는 문제 될 게 없었어. 상황이 문제였던 거지.’


그림자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달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달이 그 순간을 운 좋게 빠져나왔다 해도, 결국 달은 피아노를 치게 될 운명임을 알고 있었다. 영수 씨가 국내 콩쿠르에서 떨어지고 피아노 앞에서 절망하던 그 순간에도, 그것을 먼발치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어린 달의 눈빛도 그림자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계단의 끝이 보였다. 이제 자정까지 20분도 채 남지 않았다. 마지막 계단을 밟은 순간, 달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달의 표정을 알아챈 그림자는 다시 한번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은 불꽃놀이 보러 가고 싶었지?’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나는 너라고 했잖아. 미주를 바라보는 네 표정도 다 보인다고.’


달의 표정이 붉어졌다. 긴 계단을 올라왔기 때문이라고 단정하며 스스로를 차갑게 식혔다. 자신은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이고, 그것을 되찾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네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 그리고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미주랑 나는 분명하게 달라. 너도 알고 있잖아.”

‘다른 건 맞지만, 그게 꼭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미주의 마지막 말을 잘 떠올려봐.’


그리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을 깬 건 달이었다.


“있잖아, 나는 다시 연주할 수 있을까?”

‘그건 스스로 증명할 문제야.’

“내 안에 사라져 버린 것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원한다면, 확인해 봐.’


그림자가 길게 뻗은 곳에는 버려진 피아노 하나가 있었다. 달은 조심스럽게 그 앞으로 다가갔다.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있었고, 낡을 대로 낡은 피아노였지만 건반을 눌러보았을 때 상태는 꽤 괜찮았다. 그리고 그림자는 침묵했다. 마치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청중과도 같이, 달의 마지막 연주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달은 피아노 건반에 묻은 약간의 먼지를 털어낸 뒤, 이윽고 자리에 앉았다. 건반에 손을 갖다 대 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되돌아왔다. 버려진 피아노에 거친 손은 묘하게 어울렸다. 하지만 그런 투박함은 달의 마음을 더욱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눈을 감았다. 어떤 곡을 연주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누가 정해주는 곡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연주도 아니었다. 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선율이면 충분했다.


달이 올려 보낸 하얀 입김은, 눈이 되어 떨어졌다. 그것은 달의 선율과 함께 도심 속의 행복한 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불꽃놀이를 기다리는 미주의 머리 위에. 끊어진 연락을 기다리며 줄담배를 피우는 영수 씨의 차가운 입에. 격렬한 싸움을 하고 경찰서를 나온 이의 피 묻은 손바닥 위에. 골목길 담벼락 위에 웅크려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작은 귀 위에도. 조용히. 그리고 우아하게 떨어진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존재를 한 번씩 거쳐 간 그 하얀 눈이, 이젠 달의 손가락 위에 떨어진다. 낡아버린 피아노를 따뜻하게 덮어준다. 춥고 억압된 나날들이었다. 달의 선율은 빠르기도 했고, 느리기도 했다. 격렬하게 감정을 쏟아내기도 했지만, 또 어떨 때는 절절하게 녹아내렸다. 그 순간순간의 선율이 달의 귀에 들려왔다. 곡이 절정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달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다치게 했을 때 느꼈던 미묘한 쾌감과는 분명 달랐다. 순간의 쾌감이 지나가고 나면, 마음속 어딘가 공허해졌다. 하지만 지금의 절정은 비어버린 달의 마음을 채워주고 있었다.


“카운트다운 진행하겠습니다. 다 같이 외쳐주세요.”


3

마지막 세 마디를 남겨 두었을 때, 달은 미주를 떠올렸고, 그녀에게 연락하기로 결심했다.


2

그리고 연락이 끊겨버린 영수 씨에게 다가가 투박해져 버린 손을 내밀고, 꼭 안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1

음악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해피 뉴이어!”


연주를 끝마친 순간, 달의 등 뒤로 폭죽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달은 다양한 색깔로 터져나가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길었던 한 해에 대한 고별이자, 새로운 시작을 향한 기대였다. 달에게 있어 춥고 어두웠던 과거를 지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축포였다.


달을 올려다보았다.

두 개로 나뉘었던 달은,

하나의 보름달로 다가오는 새벽을 차츰 밝혀나갔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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