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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의 비밀

(단편 연재 : 조지아에 갈 결심 epi. 2)

by 우유강

은혜는 토요일 오전 일찍 의원 업무 개시 전에 도착하기 위해 일찍 출발했다.



구월 중순인데도 팔월의 온도와 습도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던 대기는 전쟁 중이었다.


북쪽에선 찬 공기들이 틈만 있으면 내려오려고 용을 썼고 아직 머물고 있는 더운 공기들은 태양의 화력을 기세로 낮에는 버티고 있었지만 밤만 되면 기운이 꺾여 탈수기에서 돌아가는 빨래처럼 빗줄기를 퍼붓고는 아침이 되면 남은 물기를 부슬부슬 털어내곤 했다.


지난밤에도 비가 내렸고 아침에도 부슬비가 계속되고 있었다.

시의 서쪽 끝에 있는 병원으로 가는 동안 동쪽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자 운전하는 시야 가득 무지개가 들어왔다.

무지개는 은혜가 동서로 시원하게 뚫린 산복도로를 달리는 동안 도로 방향에 따라 가끔 안보이기도 했지만 십 분이 넘게 그녀가 달리는 길 앞에 떡! 하니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선명하게 아름다운 무지개라니.


은혜는 정지신호에 정차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빠르게 사진을 찍었다.

초록불이 켜지면 마치 무지개의 한가운데를 향해 출발하는 듯했고 딱! 오 분 정도만 속 시원하게 달리면 통쾌하게 무지개 아래로 결승선 테이프를 휘날릴 것 같은 거리에 보이는 무지개는 아름답게 반짝이며 어서 오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지개는 그 수월해 보이는 거리를 결코 좁혀 주지 않는다.



어릴 적 은혜는 자신이 보는 무지개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보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무지개는 개선문이 아니었다.

개선문의 아치는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오직 정면에서 볼 때만 정확한 아치를 보여준다.

보는 사람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개선문이야말로 개선문이 오직 하나라는 증명이 된다.


그런데 무지개는 어디서 보느냐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언제나, 아치의 모양을 절대로 이지러뜨리지 않는다.


단 하나의 무지개를 다 같이 공유하는 일은 없다.


내 눈에는 나만의 무지개가 보이고 너의 눈엔 너만의 무지개가 보일 뿐이다.


옆모습도 뒷모습도 없는 쓸쓸하고 찬란하신 고독함 때문에 무지개가 더 매혹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그 아침의 무지개는 아직도 은혜의 휴대전화 갤러리 안에 남아있다.




“왜 이제야 오셨어요?”


의사는 촉진을 마치자마자 초음파실로 가라고 했고 초음파기를 가슴과 겨드랑이 쪽에서 신중하고 느린 속도로 한참을 문지르더니 곧바로 CT 촬영까지 하자고 했다.


노련한 눈을 가진 의사는 영상을 보더니 바로 이어서 조직검사를 재촉했다.

생검기가 마취연고를 바른 은혜의 가슴에 마치 총이라도 쏘듯 몇 번을 탕탕거렸다.


의사는 다음 주 목요일에나 결과가 나올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지금 당장 서울에 있는 큰 병원 유방외과에 검진 예약을 해야 한다고 은혜를 재촉했다.

간호사들은 마치 큰 병에 걸린, 어머니의 자매를 대하듯 은혜를 닦달했다.

심지어 한 간호사는 대기실 은혜 옆에 앉아 은혜가 오 년 전쯤 췌장 물혹으로 진료를 받았던 대형병원 모바일 앱을 같이 확인해 주었다.


거긴 석 달 뒤에나 진료가 가능해 보였다.


“안돼요. 너무 늦어요.”


간호사가 들어가서 말을 전했는지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와 은혜에게로 와서 단호하게 말했다.


“겨드랑이 림프 전이가 확실하게 보이는데 앞으로 두세 달이면 다른 장기로 전이될 수 있어요. 이미 전이가 진행되었을 수도 있고요. 이 정도면 사이즈가 급격하게 커지는 경향이 있으니 최대한 빨리 진료 받을 수 있는 다른 병원을 알아보세요. 정 안되면 예약이 취소되는 경우가 있으니 자주자주 전화해서 예약 빈 자리를 뚫고 들어가야 해요.”



조직검사 결과 확인은 다음 주라면서, 진료를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곳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 심지어 수납을 담당하는 직원들조차 ‘답. 정. 암.’의 자세였다.


측은함이 묻은 말투와 더 친절해진 태도들이었다.



은혜는 놀라지 않았다. 인과율이나 확률이라는 단어에 스스로 세뇌되고 단련되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번에도 늦은 거였다.


그녀가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병원검진을 두어 달이나 미룬 후였기 때문이었다.

검진을 두어 달이나 미룬 것은 순전히, 암세포 증가가 두 배속으로 늘어난다는 걸 간과한 무지의 소치였다.


은혜의 유튜브 알고리즘과 웹 사이트 검색 창은 온통 유방암과 관련된 영상과 용어들로 도배되었던 것이 무색할 지경의 무지였지만 그걸 제외하면 그날 의사가 암이 아닐 거라고 심드렁하게 대했다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바닷가로 돌아서 집으로 오는 길, 은혜는 잠시 차를 세우고 해변에 서서 푸른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면서도 그저 오랫동안 그녀가 꿈꿔왔던, 퇴직하면 ‘조지아에 가서 일 년 살기’가 어쩌면 말 그대로 꿈으로 끝나겠구나 싶은 낭패감이 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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