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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느꼈던 배신감

(단편 연재: 조지아에 갈 결심 epi. 6)

by 우유강

그녀가 황급하고 음흉하게, 때로는 비겁한 흔적을 남기는 죽음들 앞에서 ‘이건 좀 너무 해!’라는 저항감을 안고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던 건 부제(수습신부)의 죽음 이후였다.



은혜는 대학교 일 학년 겨울방학 동안 고향인 ‘남정’읍에서 성당에 다녔다.


그건 순전히 종교적인 발심 때문이 아니라 ‘돈 까밀로’라는 신부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올릴까 하는 성당 청년들의 모임에 어쩌다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임에 성당 신자들이 애지중지 아끼던 신학생이 있었다.

그가 성당 마당에 나타나면 할머니 신자들이 몰려와 공손하게 ‘우리 학사님, 우리 학사님’이라 불렀고 모임에서도 ‘까밀로 학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제삼세계 가톨릭 사제들이 진보와 혁명의 중심에서 활동했었다는 원본 소설의 내용처럼 그는 밝고 열정적이어서 모임의 청년들이 모두 마음 깊이 그를 애정하고 있었다.

삼대독자였던 까밀로 학사는 의무복무 대신 유학을 갔다.



속세의 이십 대 후반은 모두에게 광풍이 휘몰아치는 삶의 중요한 순간들이 교차하던 시기라 그의 소식은 곧 멀어지고 가물가물해졌다.


그러던 어느 겨울,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맥 어느 골짜기에서 실족사 했다는 그의 영원한 부재(不在) 소식이 날아왔다.

부제서품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부제의 유품에서 은혜가 보냈던 위문편지 한 통이 나와 화제가 되었는데 유일한 이성으로부터의 편지였다고, 소식을 전해주던 친구가 덧붙였다.

은혜는 기억하고 있었다.

귀국하면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 사드리겠다는 내용의 편지였을 것이다.

그는 방황하던 청년기의 은혜가 기다리던 희망 멘토였다.



그의 죽음이 은혜에게 남긴 후유증은 크고 깊었다.


실족 후 바로 의식을 잃지 않았고 살아서 되돌아오기 위해 몸부림쳤던 흔적들이 주위에 남아있었다는 상황 전달 때문이었다.


연극놀이 이후 은혜는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지만 뿌리 약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신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부제의 죽음에 대한 끝없는 황망함과 분함, 그가 느꼈을 죽음 앞에서의 고통이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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