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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최종 보스, 그녀

(단편 연재: 조지아에 갈 결심 epi. 11)

by 우유강

‘결국은 이 암으로 인해 돌아가실 거예요.’

의사의 말 한마디는 그녀의 귓바퀴에 마치 문신처럼 새겨져버렸다.



죽음은 그녀 주변을 아주 오래 전부터 맴돌았고 서성였다.



아니 그녀 자신이 죽음을 먹는 자들처럼 세상을 서성이다가 이제 비로소 그 창 끝을 자신에게 향한 건 아닌가 싶었다.


서울의 큰 병원에서 나온 진단은 이미 양쪽 폐까지 전이된 유방암 4기였다.

원발암의 종양 크기와 림프를 따라 줄줄이 달린 종양의 크기도 작지 않았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환자들을 오 분 간격으로 진료해야하고 표준치료 매뉴얼 외에 따로 말할 게 없는 의사 앞에서, 자연요법이니 대체의학이니 헛소리를 잠시 했던 은혜에게 담당 의사가 다소 짜증스럽게 내뱉은 말에 은혜는 정신이 확 들었다.



그는 회복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야말로 그녀에게 꼭 필요한 진짜 처방처럼 느껴졌다.

비로소 자신이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은혜는 점심을 마치고 병원 밖으로 산책을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알루미늄 식판은 황동색 유기에 잡곡밥과 알 탕, 알록달록 다양한 색의 보기 좋은 야채 반찬들로 채워져 있어서 병원 홈페이지의 식단 배너를 꾸미기에 손색이 없이 아름답고 맛있어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 아마씨 기름으로 저염 조리된 것이라 혀를 통과시켜 목구멍 깊숙이 넘기기엔 인내와 의지가 필요했다.


식사를 마친 은혜는 쓰디쓴 머위 즙으로 입과 목구멍 안을 헹구고 그 목을 또 목도리로 칭칭 동여매고 나왔다.


눈 소식을 품고 있는 바깥바람은 칼칼하면서도 축축했다.

바람이 숭숭 스며드는 니트 모자 때문에 정수리가 시려서 은혜는 목도리에 눌린 후드를 끌어올려 뒤집어써야 했다.



병원 앞 팔 차선 도로 맞은편으로 멀리 보이는 우뚝 솟은 대학 빌딩을 배경으로 그 아래쪽 모든 블록들이 대학가였다. 대학은 멀리 있었지만 팔 차선이 넘는 대도로 부근이 모두 그 대학이름을 딴 유명한 거리였다.

팔 차선 도로의 이면도로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가게들 대부분이 날씨를 핑계로 아직도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부지런한 주인들이 서둘러 노상에 내놓은 옷걸이에는 짧고 좁고 많이 파인 어리고 젊은 옷들이 걸려 있었고 좌판의 악서사리들은 흐린 하늘 때문에 미처 반짝거리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 위로 눈송이들이 하나 둘 나풀거리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악서사리와 옷들을 파는 좁은 도로를 따라 내려가자 거리 이름을 영문자 상징물로 세워놓은 곳이 나타났다.

차 없는 거리였다.

조금 더 넓어지고 세련된 패션 브랜드들이 가득한 상가를 지나자 은혜에게는 금지된 온갖 달콤하고 기름지고 강렬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멋진 요리들이 즐비한 식당들이 나타났다.

그 많은 식당들 중 어느 한 곳도 그녀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거리의 끝에 버섯이라도 숨어있을 것 같이 축축한 작은 마당을 가진 어린이집이 있었다.



어린이 집 앞의 빌딩을 돌아 다시 팔 차선 도로로 나온 은혜의 눈에 도로 건너편, 키가 큰 소나무들이 보였다.


빌딩들이 빽빽한 거리 한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소나무들은 그 뒤로 고층 빌딩 없이 뻥 뚫린 기다란 공원을 장승처럼 몹시 앙상한 키와 빈약한 솔잎가지들을 치켜세운 채 지키고 있었다.


소나무 옆으로 작은 맞배지붕을 가진 청백색의 납작한 이층 건물이 보였다.


굵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기 시작한 도심 속 공원은 수묵화처럼 색이 무뎌졌고 풍경에는 소나무들과 작은 맞배지붕 건물만 남은 듯했다.



맞배지붕엔 둥근 창이 없지만 은혜는 마치 그림 속으로 들어가듯 횡단보도를 건너 소나무들 아래로 걸어갔다.


눈은 목도리에도 어깨에도 쌓였고 눈썹에도 앉기 시작했다.

길고 긴 공원 숲길을 쭉 따라 들어가니 인적이 더 사라졌다.


공원 관리하는 사람들이 어느새 송풍기를 들고 나와 돌계단이나 보도에 쌓여가는 눈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치워도 바로 쌓이는 눈과 천천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은혜는 암이 더 이상 관찰되지 않는다는 완전관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요양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단어를 금기로 삼았다.

원발암만 있거나 림프전이까지만 확인되는 경우는 희망찬가를 서로 주고받는 게 미덕이었다.



하지만 재발되거나 전이암이 나타나는 경우 다들 항암 부작용이나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병을 밀어내기 위해 먹는 약이 새로운 병을 부르고, 그걸 치료하는 또 다른 약을 부르는 악순환의 그늘이 언제나 더 무겁게 보였다.


오년 생존율 삼십사 퍼센트라는 유방암 4기 진단과, 결국 이 암과 관련되어 죽을 거라는 담당의사의 말을 새겨보면서,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생각해 봤지만 뾰족한 플랜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남은 삶 내내 스스로 죽음을 준비해야 하고 때가 오면 고스란히 온몸을 고통 아래 내주고 견뎌야 하는 것이 그녀에게 찾아온 죽음에 대한 숙제였다.



은혜는 그동안 주위의 숱한 죽음에 대해 막연하게 느껴오던 죄책감, 자신 때문인가 싶은 깊고 어두운 의혹과 두려움에 대해 그녀가 오랫동안 뼈저리게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논리가 없는 인간인지 알 수 있었다.



미루나무처럼 마르고 키 큰 나무들 사이로 가늘고 긴 바람이 불어왔다.

은혜는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아 있다가 바람에 부서지는 눈송이들을 보았다.

눈송이들은 지나간 모든 기억들처럼 그렇게 무겁게 주저앉아 있었지만 지금은 바람에 부서져 날리며 잠시 반짝거리다 사라진다.

은혜의 죽음도 마주하는 사람들 각자에게 저마다 다른 의미의 죽음으로 잠깐 새겨지다 사라질 것이다.

은혜는 자신의 죽음이 그중 누군가에게 무거운 기억 중 하나가 될까 잠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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