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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고즈넉한 잔소리

첫 마음

by 하성운

눈앞에서 부는 바람이 살갗을 뚫고 지나가려는 듯 거세게 휘몰아쳤다. 오래 맞으면 맞을수록 모래알들이 스치는 날카로운 감각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힘겹게 눈을 뜨고 추위에 익숙해지니 점차 시야가 트이기 시작한다.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어선들이 일렬로 정렬돼 있고, 바다와 맞물린 해가 지평선에 걸쳐 물결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슬며시 밑을 바라봤다. 짙은 군청색이 불규칙하고 세차게 일어나 그 물결에 해초들이 휩쓸린다. 눈에 보이는 모든 요소들이 항구도시와 잘 어우러졌다. '언제 봐도 정말 멋진 곳이야.'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광활한 풍경을 볼 때마다 본인이 겪은 모든 고초가 순식간에 파도에 휩쓸려 부식된다. 시선을 완전히 아래로 꺾자 이번엔 본인의 발등이 나타난다. 이 모습은 배경과 조화롭지 않다. 바람이 거세고 자주 불어서인지 이 주변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가까이 봤을 때 비로소 느끼는 이 광활함을 평생 사진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많다. 본인은 시행착오로 비로소 이곳을 눈에 담았으니 다수의 앞에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교 다리에 위태롭게 서 있는 발이 온몸을 지탱했다. 발끝을 휘저어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돌을 걷어찬다. 풍덩! 2, 아니 3초, 거품양으로 보아 바다 표면은 보기보다 멀리 있다. 곧이어 한 걸음 내디뎠다. 아까까지 세차게 불던 바람이 점점 약해진다. 사람이 오기 전까지 실행으로 옮겨야 했다. 바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사람이 본인 때문에 좋은 풍경을 놓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쪽 손을 스르륵 풀자 몸의 전체 균형이 오른쪽으로 쓸렸다. 계속 매달려 있는 자세도 질렸고, 생각 거리도 다 써버렸다. 그대로 떨어졌다. 떨어지기 전까진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지만 떨어지고 나서야 차츰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발 쪽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모든 내장이 위로 쓸리면서 바다와 점점 가까워지는 심오한 공포에, 본인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



윤청하 / 여 / 2009.12.05. / 만 15세 / 1학년 4반 13번 / 입학일: 2024년 3월 5일 졸업 예정일: 2027년 2월 10일/ 출결사항: 무단결석 27일, 조퇴 15회, 기타 결석 7회


"잘못된 거 없나 한번 더 확인해 봐."


백색소음이 가득한 어둡고 침침한 교무실은 올 때마다 낯설다. 두 걸음 남짓 할 공간에서 지난 반년 간의 일들이 기록되고 있다. 다시 제대로 확인하려 해도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본인 장래가 어떻게 되든 지금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순간, 건너편 책상에서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과 다르게 꽤나 열정 있는 듀오 같다. '아니 쌤, 저 지금이라도 열심히 하면 인서울은 할 수 있죠? 아, 진짜 제발요.', '수업 시간에 딴짓 말고 짚어준 곳 제대로 외워. 시험문제를 내가 내지 학원선생이 내니? 앞으로 2년 반만 열심히 하면 된다, 힘내자 응?'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자 담임은 손가락을 탁, 탁 튕기곤 컴퓨터 화면으로 슥- 열정듀오를 가렸다.


"아직 1학기인데 대회 우승도 하고, 근데 넌 항상 하나를 잘하면 하나가 아쉽다. 출결이랑 성적관리 제대로 안 할래?"


유나 잘하란 생각으로 눈동자를 크게 굴리고, 학교를 대신 다녀주는 대행 서비스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며 잡생각을 떠올렸다. 상대가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훤했지만, 일부러 눈길을 이리저리 흘리고 입을 벙긋 거리며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담임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컴퓨터 화면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왜 이렇게 학교를 빠져대나 몰라. 대학에서 출결 안 볼 것 같니? 취업할 때 회사에서는? 다- 출결 봐 네가 얼마나 불성실한지. 그렇게 학교 오기가 싫니?"

"네, 뭐... 네."

"왜 오기 싫은데?"

"귀찮아서요."

"껄껄..."


누군가는 담임의 말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라며 새겨들으라 했지만, 피와 살은 이미 낳아준 사람한테 잔뜩 받았다. 원하는 걸 배우지도 못하고 시간낭비만 하는 학교를 오기가 귀찮고 싫었고, 허구한 날 들리는 불편한 소음에서 벗어나 하루 종일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놀고 싶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살 거냐며 원치 않는 관심을 툭, 툭 던지던 어른들은, 마치 길고양이를 처음엔 귀엽다며 잠시 쓰다듬다가 곧 시선을 거두는 사람들처럼 나중에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자신들이 쌓아온 가르침을 제대로 받고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말을 잘 듣는 아이인지 시험한다. 진로와 꿈 따위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주변 사람들 앞에서 겸손을 챙기며 나서야 할 때 온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유능한 아이인지를 살펴본다. 청하가 생각하는 학교는 그런 걸 하는 곳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곳이었고 그런 곳은 열심히 다닐 필요가 없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상대한테 무책임하게 대답을 떠넘기는 듯한 침묵을 만들었다. 담임이 답답한지 다시 되물었다. 청하는 이 대화를 빨리 끝내기 위해 뒤늦게 교과서적인 답변을 머릿속에서 굴렸다.


"아까부터 왜 이리 어물거려, 이번 주에 한번 왔다 한번. 학교 안 올 때 막 오후 늦게까지 자고 그러지? 쌤이 자습시간 때 조용히 내려가 봤는데 공부도 열심히 안 하더만."


그 말에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다음 번호들이 제 시간 안에 진로상담 및 1학기 생기부를 정리해야 할 것이고, 눈앞에 담임은 며칠간 야근으로 신경이 곤두서있을 것이다. 굳이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저 사람 앞에선 여기서도 그렇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교무실을 들어올 때마다 편하게 떠들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진다. 여닫이 문에 자동 필터라도 씌운 것 같았다. 모든 나쁜 감정의 불순물이 씻겨져 나가 얼마 없는 예의 바른 모습을 차렸을 때, 본인을 이루는 솔직함도 같이 사라졌다.


"친구는 누구랑 잘 지내? 요즘도 밥 혼자 먹어?"

"그냥 다 한 번씩 말 걸 정도로 친하죠 뭐."


뭐 이리 사사건건 관심을 가지나, 어느샌가 본인 말투엔 건성이 묻어났다. 고등학교는 짧게는 일주일, 길면 한 달 안에 미래가 보였다. 학기 초엔 배우는 모든 것이 새로워 열을 갈아 넣었다.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만나면 무슨 시간이든 다 재밌었고, 그날 헤어졌을 때도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엔 겉치레를 섞어가며 서로 간의 미묘한 불안감으로 학기를 보냈던 반 친구 몇 명은 첫 중간고사가 지나자 조용히 본인의 진짜 친구를 찾아 나섰다. 내심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던 상대를 잃자 마음 한편이 비기도 했지만 금방 괜찮아졌다. 점점 수업에서도 사람한테서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식자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헛된 날만 지나갔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도 꽤나 몸과 마음이 편안한 일이었다. 옆에 있는 상대한테 본인의 선택에 대한 설명을 할 필요 없이 언제든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고, 상대의 기분을 파악해 맞추지 않으면서 괜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됐다.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않은 채 반에서 아주 사소한 이유로 혼자 다니게 됐지만, 반 아이들은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청하 본인도 그게 편했다. 성격과 관심사가 서로 맞지 않는 이유로 떨어져 지내게 된 것인, 그래서 친구를 사귀지 않는 일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밉보이지도, 돋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이번 학기를 보낼 것이다라며 마음을 먹었지만 간혹 많은 사람의 신경을 건드는 일이 생기곤 했다. 한 명이 받은 피해는 곧 다수에게로 번져갔고, 작은 문제부터 해결하지 못하자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그 골칫덩어리가 본인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니 이런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저 애만 없었으면.' 혼자 다니는 입장에서 같은 처지나 마찬가지인 그 애한테 미안했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신경을 건드는 일은 점점 늘어났고, 어느샌가 그 애는 학교를 다닐 필요 없는 이유에 추가됐다. 보이지 않는 선을 지키란 말은 누구든지 할 수 있었다. 그 무리에 속하고 싶으면 다수의 의견 속에서 맥락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 있게 의견을 내보일 줄 알아야 하고, 결과를 빨리 도출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탤 수 있어야 하고, 수가 맞지 않으면 물러날 줄 알아야 하고,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본인의 욕심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무리 사이에서 노력하는 의도와 다르게 숨만 쉬어도 불쾌감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평생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본인이 그 피해를 다 받는 사람이 있고,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은 '적당히 나대는 것'이었다. 날뛰는 기운은 넘치지 않게 잠재워야 하고, 바닥을 치는 기운은 끌어올려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쉽고도, 꼭 해야 하는 '적당히 나대기'를 하려면 옆에서 도와주는 어른이 꼭 필요하다. 그런 제대로 된 어른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은, 결국 사회에서 직접 돌을 맞아가며,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법을 뼈아프게 깨달을 수밖에 없다.


"우리 반 애들 중에 막 시끄럽고, 문제 되게 구는 그런 애들 없고?"

"없어요.“

"그래 다 없다고들 하지. 그래놓고 뒤늦게 울며불며 찾아오고."


그건 인정, 이라 마음의 소리로 외쳤다. 담임은 더 이상 상황을 묻지 않았다. 단순히 본인 편을 들어주지 않았단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담임이 한 말 중에 틀린 건 거의 없었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와줄 수 있는 어른이 이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청하는 고개를 숙이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뭐, 시끄러운 거 싫으면 쉬는 시간에 교직원 화장실에라도 가 있어."

"네.“

"하는 거 제대로 없으면 학교라도 잘 다녀야지."

"네엡."

"또 할 말 있어? 방과 후에 좀 남아있든가."

"아뇨.”


뭐가 그렇게 힘들고 의욕이 없었던 건지 항상 어른 앞에 설 때마다 본인은 한없이 작아진다. 즐거웠던 일들과 화났던 일들, 슬펐던 일들, 무서웠던 일들, 전부 어른들이 등정한 산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항상 불안이 따라붙는다. 용기를 내서 본인의 상황을 말한 이후에 돌아온 대답은 크게 두 종류였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지?',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참아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본인이 그렇게까지 힘든 상황이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에 오랜 시간 고민하고 아파왔던 것들이 순식간에 예민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어느 순간 예전에 해결하지 못한 상황이 더 큰일로 번지게 되고, 갑자기 생긴 용기로 본인의 상황을 구제하려 하면, 저번처럼 똑같은 결과가 나올까 걱정부터 하게 된다. 그 걱정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도 도와주는 사람도 주변에 없을 때, 용기란 건 함부로 낼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뼈저리게 알게 된다. 집으로 가는 버스 밖 풍경은 항상 똑같다. 늘 그렇듯 구름도 예쁘고, 건물도 예쁘고, 오늘 일어났던 일들이 생생히 떠오르며 허무맹랑함만 비춘다. 문이 철컥 열리며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순간 아무 생각 않고 그대로 버스에서 내렸다. 집까진 아직 몇 정거장이 남았지만 계속 물밀듯 밀려오는 생각 더미와 답답한 공기에 파묻힐 바에야 차라리 걷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의식이란 참으로 편리하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행동을 본인 대신 선택한다. 지금도 어디로 갈지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발끝이 향하는 곳만 걷고 있다. 다리 밑으로 내려오니 사람들은 술을 마시거나 조깅을 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강아지를 피해 자연스럽게 벤치에 가 앉았다.


"얘!"


여기서 저를 부를 사람이 누가 있나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살피자 왼쪽엔 텅텅 빈 도로가, 오른쪽엔 휑한 인도가. 혹시나 싶어 하늘을 바라보니 아까와 똑같은 풍경이 있었다. 이 다리 밑 벤치 주변은 본인 뿐이었다. 그럼 아까 들은 건 뭘까, 하나 의심을 가지고 추락 방지용 펜스 너머를 쳐다봤다. 넓은 바다. 물살 밑에 해조류가 흩날리고, 어선들이 일렬종대로 어우러진 바다. 그 한 곳에 거품이 꺼지질 않는다. 부글부글... 톡. 뭔가가 튀어나왔다. 눈살을 찌푸려 그곳을 응시했다.


"얘! 이 신발 네 것이니?"


사람이다! 바다 한가운데 사람이...! 황당하게 저기 사람이 웬 말인지, 그것도 멀쩡히 살아있는 채로 말이다. 희미하지만 가늘고 선명한 목소리. 자세히 들어보니 또래 여자애 같았다. 운 좋게 살아남은 케이스라 해도 저렇게 멀쩡한 상태로 헤엄을 치고 있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손에 든 폰으로 긴급전화 화면을 켜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방금까지 북적거리던 인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 목소리 안 들리니? 왜 대답이 없어!"

"어... 너 빠진 거야? 이쪽으로 헤엄쳐 올 수 있어?"


여자애는 헤엄치는 폼이 참으로 이상했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오래 숨을 쉬지 않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고개를 물 밑으로 처박고 다리에 모터를 단 듯 엄청난 물장구를 치며 다가왔다. 순간 한강 괴물이 아닌가 싶어 소리를 지르려던 참에 여자애가 뭍으로 올라왔다. 그대로 머리에 달린 미역들을 털어내고, 고개를 들어 고래처럼 물을 뿜으며 숨을 내뱉었다. 강한 노을빛 조명 때문에 여자애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 손바닥으로 시야 일부를 가렸다. 치렁치렁하게 몸을 가리고 있는 색이 밝고 특이한 긴 머리칼. 사람 머리가 저렇게 길게 자랄 수 있다니. 바닥까지 오는 긴 머리칼에 맨발인 저 애는 걸음걸이도 참 희한했다. 여자애가 머릴 반으로 가르며 옆으로 넘기자, 몽롱해져 있던 정신의 유리파편이 깨져나갔다. 그리고 그만 소릴 지르고 말았다.


"다, 다시! 다시 덮어!"

"알았어."

"아니, 근데 너 물에 빠졌는데 괜찮은 거야?"

"나 저기서 사는데?"


파밧, 하고 스파클이 튕기더니 여자애가 순식간에 수달의 모습으로 변했다. 순간 아까는 안 보이던 표지판이 떡하니 시야에 들어왔다. '수달 출몰 지역! 이 구역은 최근 애니멀보노에 출연한 물개들이 자주 놀러 오는 구역입니다. 귀엽지만 야생 동물이므로 가까이 다가가 먹이를 주지 마세요.' 여자애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선 쩌렁쩌렁 온갖 소음을 다 눌러버리듯 웃었다. 그리고 소중하게 지니고 있던 신발 한쪽을 내밀었다. 초등학생이 신을 법한 작은 사이즈에, 바닷물에 오래 있었는지 부식되고 색이 바랜 모습이었다.


"내 거 아니야.“

"그렇구나!"


괴생명체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등 뒤로 신발을 멀리 던져놓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일반 사람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오랫동안 무법지대에서 살아온 분위기였다. 짐승같이 행동이 경박하고 말도 어눌하게 토해내는 여자애는 활기차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갖고 있어, 딱히 그런 느낌이 나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청하는 처음엔 흥미로운 생명체에게 성심 성의껏 대답해 주다 나중엔 지쳐 쓰러져 단답으로 답했다.


"그렇게, 이렇게 해서, 또—그래서! 널 보게 된 거야!"

"어어, 그래."

"그런데 말이야, 넌 어쩌다가 여기 오게 됐니?"

"그냥, 엄...심심해서. 별 이유는 없어.”


괴생명체 여자애는 대화 시작 몇 시간 만에 드디어 생산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금 만난 사람이 건넨 질문다운 질문에 다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의심을 가득 품은 정적이 흐르고 청하라는 이름만 나왔을 때 여자애는 손뼉을 치며 활짝 웃어 보였다.


"아~넌 청하구나! 난 어선 사람들한테 인어아가씨라고 불리기는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라."

"인어... 같긴 하네 사람에서 수달로 변하니까. 흠... 근데 너를 나사에서 잡아가고 그러진 않겠지?"

"뭐! 내가 저런 힘없고 멍청한 수달이랑 같다는 거야? 난 그 이름 싫어. 다른 거로 할래!"

"그래... 생각해 보든지."


이 애는 도저히 입이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하는 맞장구 쳐줄 체력마저 다 소진했는지 무심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5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그건 뭐야?"

"핸드폰인데, 슬슬 어두워져서 가야겠어."

"아, 그렇네 사람은 매일 자야 하니까! 응! 잘 가!"


핸드폰 화면엔 아무 메시지 알림도 뜨지 않았다. 10시가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 방임주의 집안의 장점은 개인 생활이 보장되는 것이고, 단점은 소리소문 없이 누가 없어졌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기운 없이 집에 돌아온 날도 본인에게 관심 없는 가족들에게는 그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겐 항상 별일 아닌 일일 뿐이고, 본인은 어린애일 뿐이니까 아직 세상살이에 적응을 못한 철부지다. 딱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집 가기 싫다. 여기서 외박할까?"

"뭣! 어디서 자려고?"

"넌 어디서 자는데?"

"난 저어-기!"

"아... 바닷속? 저기 밤에는 추울 텐데."

"어어?"


여자애가 갑자기 뒤쪽을 보자 청하도 그 시선을 똑같이 따라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배가 있었다. 불을 켠 선박이 낮은 교량을 향해 직진하자, 그 광경을 본 주변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왜 멈추질 않지? 뭐가 잘못된 건가? 다시 선박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굉음이 부딪혀왔다. 콰광! 사람들이 동시에 귀를 틀어막았다. 몇 초간의 큰 소음이 멈추자 여자애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으어엉, 우리 집..!"

"뭣 진짜로, 저기 밑에 집이 있어?"

"안돼! 우리 집! 왜 저 배는 오늘 갑자기 이리로 온 거야!? 집을 잃었어! 흐어엉."


저쪽은 갈 곳이 아예 사라졌다. 갑작스레 생긴 책임감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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