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마음
낮에 조용히 잠들어 있던 물살은 밤이 되니 서서히 높은 곳으로 치솟았다. 기세를 몰고 칠흑 같은 파도가 밀려났다 끌어당겨지고, 넓게 퍼졌다가 수축했다. 바위에 부딪힌 물의 가장자리들이 조그만 물방울로 변해 튀어 오르는 짧지만 경쾌한 긁는 소리가 무섭고 시원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존하며 캄캄한 시야에 익숙해질 참에, 뒤에서 강한 자연광이 비치며 주변이 환해졌다. 옅은 무지갯빛이 파동을 일으키듯 사방으로 퍼져나가 주변 공간을 가득 메우는 광경에 본능적으로 '와'라고 내뱉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여자애는 뿌듯해하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청하를 바라봤다.
"난 존재 자체로도 빛나!"
"... 그래."
아주 조용히 숨소리조차 머금은 채 그 밝은 빛을 감상했다. 자연스러운 침묵이 이어지다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갑작스레 만난 여자애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쉽게 단정 짓기 어려웠다. 무슨 단어를 꺼내도 한없이 부족할 것 같았고 말로는 끝내 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여자애한테 조용히 스며들어 있었다. 잔잔한 기류가 주변을 천천히 감싸고 내려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 모든 반짝이를 한 곳에 응축시킨 유리구슬 같은 빛을 발견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북적거림과 동시에 찰칵, 카메라에 찍히는 소리가 났다.
"우리 빛 조금만 줄여보자."
"못해!"
"그럼 가리기라도 해, 내 옷 빌려줄게."
청하는 골목길로 들어가 주섬주섬, 체육복을 꺼내 여자애에게 건넸다. 아직 빨래하기 전이라 거적때기가 된 꼴이 주기 민망했지만 본인 딴에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불편해! 불편해!"
"미안, 사람이 되려면 입어야 해."
길이가 2m는 훌쩍 넘어 보이는 머리칼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겨우 윗도리를 끼워 넣었다. 번거로운 긴 작업이 끝나자 어느새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여자애는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남은 옷을 주워 입었다. 중력을 무시하듯 머리칼이 위로 솟아오르고 깔끔해진 상태에서 나머지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진작에 그렇게 할 것이지 라며 해탈한 표정을 짓는 청하의 어깨를 툭, 툭 건드리며 뭔가 완성됐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이제 고민과 선택을 해야 했다. 막차를 탈 수 있는 시간이라 해도 아무도 없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고, 미성년자가 부모의 동의를 받지 않고 늦은 시간에 갈 수 있는 곳은 늘 한정적이었다. 먼저 보호자한테 연락을 했다. 실종신고라도 하면 일이 커지기 때문이다. 데려와달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고 하기 싫었다. 자연스레 친구네에서 잔다고 거짓말을 했다. 마침 내일은 주말이라 기숙사 퇴실 일정과 겹쳤고, 달이 지나 용돈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아무 이상 없이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휴대폰 너머로는 심드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청하는 뭔가 쓴 걸 삼킨 듯 인상을 찌푸렸고, 여자애는 살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제부터 어디로 갈 거야?"
”안전하게 밤샘할 곳."
‘왜 함께 다니려 하는 거야.'라는 말은 둘 중 한 명도 꺼내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본인을 까내리지 않는 사람과 만났는데 혹시나 그 질문으로 인해 소중한 인연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옆은 함부로 평가하는 사람도 없고, 비하하는 사람도 없고, 허세 부리는 사람도 없고, 쓸데없는 말을 주야장천 내뱉는 사람도 없고, 무시하는 사람도 없고, 째려보는 사람도 없고, 무식한 사람도 없고, 이상하게 생긴 사람도 없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려 말을 거는 사람도 없고, 목소리가 큰 사람도 없다.
“완전 파라다이스네.”
방금 만난 사람은 본인의 말과 행동을 존중한다. 감정을 중요시하고, 목적이 어렴풋이 같고, 행동은 아직 어색하지만 나름 재미도 있었다. 청하는 그만한 이유였으면 같이 다니기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망설임이 담기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를 바라지도, 무리하게 달려들지도 않는 순수한 이동이었다.
"청하야 사람들은 일정한 때마다 밥을 먹던데, 너 배 고프니?"
"좀 고파."
여자애는 청하의 손을 이끌고 무작정 앞으로 향했다. 본인한테 데려가달라고 할 법도 한데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묻자, 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고 대답했다.
"저기 반짝이는 상자는 뭐야?"
"편의점 간판이네, 가자."
"우와, 나 여기 처음이야!"
여자애는 계속 먼발치에서 이상한 얼굴로 감탄했다. 같이 들어가자 했지만 어째선지 바깥 벤치에 앉아 기다리겠다고 했다. 왜 그런가 생각할 틈도 없이 자판기 우유라고 적힌 컵 두 개를 들고 여자애와 마주 앉았다.
"발이 다치니까, 불편하면 양말이라도 사줄게."
여자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맨발이 아닌 상태가 더 불편할 테니 이해가 갔지만, 이 애 자체가 야생의 상태라 챙겨주고 싶게 생겼다. 여자애는 고맙다며 우유를 들이켰다. 그리고 바로 맞은편 얼굴에 뿜었다. 여자애는 후다닥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휴지 한 뭉텅이를 뽑아왔다. 그리고 그 휴지 뭉텅이를 청하의 얼굴에 문댔다.
"혹시나 내 모습 때문에 아까처럼 이상한 시선을 받을까 안에는 안 들어가려 했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을 경계하잖아.“
휴지 더미에 숨이 틀어박혀 여자애 손 위에 본인의 손을 올리고 확-떼어냈다. 떼어낸 얼굴은 안면을 세게 처맞은 사람처럼 시뻘겋게 되어 있었다. 정신은 말짱한데 눈앞이 아득하게 흐려져 얼굴 피부에 닿는 공기가 미친 듯이 뜨겁고 무거웠다. 여자애는 등을 쓰다듬더니 두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자, 여기다 토해!"
할 수 있겠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꽉 깨물어 억지로 웃었다.
"조금만 있어, 내가 금방 고쳐줄게!"
여자애는 마법이라도 쓰려는 건지 고개를 살짝, 뒤로 쭈욱 빼더니 이내 청하의 이마로 돌진했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강한 반동에 몸이 뒤로 확 쏠렸다.
"우아악!"
"내 긍정 에너지를 네 몸속에 흘려보냈어! 이제 하나도 안 아플걸?"
정말이었다. 여자애의 말대로 열감이 사라지고 눈앞이 선명해졌다. 한순간이지만 머리가 상쾌해진 것 같기도 하다. 여자애는 자신만만한 표정과 몸짓과 말투로 말했다.
"사람들은 이걸 물리치료라고 불러!"
"우와.“
"뭐가 됐든! 괜찮아졌지? 이제 어디로 갈까?"
작지만 당당한 목소리가, 다음 목적지를 묻자 숨을 크게 들이켜고 말했다.
"요 앞으로 조금만 가면 해수욕장이 있어. 저번에 새벽에 갔을 때도 아무도 잡지 않았으니까, 아마 괜찮을 거야."
쏟아지는 졸음을 애써 무시하고 문 닫기 직전인 편의점에 들러 초콜릿을 왕창 샀다. 바다로 향하는 돌계단은 한 칸 한 칸 내려갈수록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음 순간,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짙은 바다 내음이 바람을 타고 전신을 스쳐 지나갔다. 천천히 시선을 앞으로 보냈다. 순간 거대한 흐름에 제 발로 빠져든 것 같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공간 전체가 어두운 공기에 가라앉았고,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검게 맞닿아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눈에 다 담을 수 없는 크기의 배경이 굴곡이 져 보일 정도로 커다랬다. 우주 한 공간에 멈춰 서 있는 것 같은 밤바다는 한없이 고요하고 무서웠다.
"이런 곳은 처음이야, 정말 멋있어! 얼른 내려와 봐!"
허겁지겁 신발을 벗고 여자애를 따라갔다. 모래사장은 딱딱한 바닥 위에 얇고 부들거리는 벨벳을 깔아 놓은 것 같았다.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래가 흩날리고 소금기 가득한 향기가 가까워졌다. 다음 순간 이상한 주문과 함께 바로 앞에서 팍-하고 불꽃이 가로질러 떨어졌다.
"이그스페트로파트로우나!"
"위잉가아르드으뤠비오우사!"
사방에 선홍빛 불꽃이 휘날렸다. 불꽃을 쏘는 사람들은 전부 하나같이 세상 잃을 것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웃음소리인지 비명소리인지 모를 기괴한 소음이 귀를 강타하고 주변은 자욱한 연기로 뒤덮였다. 이 미친 인간들은 술이라도 자셨는지 폭죽을 하늘에다 안 쏘고 서로에게 쳐 쏘고 있었다. 분위기 전환이 뜬금없이 일어나 조금 놀라긴 했지만,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이 웃겨 딱히 딴지를 걸고 싶지 않았다. 여자애는 입꼬리를 한껏 올리더니 순식간에 그 무리에 합류해 자신만의 불꽃을 터뜨렸다. 파밧-! 짧은 정적이 흘렀다. 폭탄 같은 불빛이 사람들을 지나쳐 바다로 떨어졌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푸른빛이 쏟아지고 동시에 머리 위로 비가 내리자, 여자애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나머지 폭죽마저 터지니 재빠르게 각자 흩어졌다. 이 굉음에 누가 경찰이라도 부르지 않을까, 가슴을 조아리며 청하는 황급히 윤슬을 데리고 놀이터 안쪽으로 가 숨었다. 주변이 잠잠해진지 한참 되었을 때,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자연스럽게 그네가 있는 곳으로 가 앉았다. 청하는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여자애는 번쩍 뛰어올라 옆에 찰싹 달라붙어 끼익 소리를 내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네는 낮에 타는 것만큼 밤에 타도 재밌었다. 여자애는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생물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면 너무나 사람 같아 보였다.
"너 이름이 뭐더라?"
"청하."
"이름에 무슨 뜻이 있어?"
"초여름인가 그거랬어.“
"멋지다, 네 이름 뺏어가고 싶을 정도야!"
아까 있었던 일은 까마득히 잊기라도 한 건지, 지나치게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무뚝뚝한 말투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추려 애쓰며 말했다.
"이름은 태어날 때 가족이 지어주잖아. 아님, 길러준 사람이."
"우린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걸! 말하고 듣지 않아도 우린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어!"
"우리? 누구랑 같이 있었던 거야?"
아차, 실수라도 한 걸까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여자애의 답을 대신 멈췄다.
"그게, 혼자니까.. 지금은."
여자애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청하의 손을 잡고 앞뒤로 붕붕- 흔들었다. 청하는 그 행동이 나름 마음에 들고 재미가 있었는지 말리지 않았다. 여자애가 팔이 저린지 손을 툭, 떨궜을 때 청하는 미미하게 아쉬움을 표하며 마저 질문을 이어갔다.
"네 가족은 어디로 갔나... 싶어서."
"우리 부모는 나한테 기운을 다 넘기곤 사라졌어. 그게 우리들의 규칙이야!"
"혼자인 게 외롭진 않아?"
그 말에 여자애는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종족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어, 항상 같이 다니는 반려가 필요해. 부모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서로의 자식에게 생을 물려주고 사라졌어."
"그럼, 넌 여기에 있고. 나머지 한 명은 지금 어디에 있어?"
"어디론가 가더니, 계속 안 돌아와. 내가 질렸나 봐."
청하는 위로의 말과 해학의 말 사이에서 망설였다. 순식간에 어색한 기류가 만들어지자 여자애는 어두운 밤의 기운이 기분을 안 좋게 한다며, 기를 모으더니 이내 커다란 불꽃을 쏘아 올렸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기운이었다. 조금 더 절제된, 잠잠한 빛이었다. 아까 지나쳐 오며 눈길을 사로잡았던 정성이 가득 담긴 조각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짜잔~!"
"우와. 대단해."
"걔를 계속 찾고 있어. 언제 만날지 모르지만, 서로 연결 돼있는 기운은 결국 서로를 찾아낼 수 있어!"
"찾고 나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거야?"
"응, 넓은 바다로 나가 살 거야."
끼익, 하고 그네가 밀려 뒤쪽에 기다란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문득 여자애의 그림자를 살펴보니, 반투명한 거구의 형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뭔가 멋있는데 무서워."
"무섭지. 세상은 참 거대하고 무서워. 우리가 모르는 것들 투성이야. 하지만 혼자가 아니니까 언제든 헤쳐나갈 수 있어!"
"나 또 궁금한 거 있어."
둘은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기에 대화할수록 질문거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17세 호르몬 때문인지, 작은 일상부터 재앙 같은 사건들까지 모든 것이 극적으로 느껴졌다. 서로가 겪은 사소한 일조차 아무 이유 없이 재밌었고, 굳이 이유를 찾지 않아도 저절로 납득이 갔다. 청하는 처음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웃었고, 여자애는 1분 넘게 사람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보았다.
"바다에서 제일 맛있는 게 뭐야?"
"참치!"
"그럼 제일 맛대가리 없는 거."
"개복치."
여자애는 상체를 거의 눕다시피 그네에 기대어 빙글빙글 돌며 줄을 꽈배기처럼 꼬아갔다. 그네 타기는 질릴 줄을 몰랐고, 입안에서 녹는 초콜릿은 미친 듯이 달았다.
"이제 내가 청하한테 물어볼래, 넌 제일 좋아하는 게 뭐야?"
"엄, 퍼질러 자기."
"학교에선 주로 뭐 하는데?"
"퍼질러 자기."
"집에선?"
"퍼질러 자기."
"그럼... 밖에선?"
"벽에 기대서 자기."
여자애는 웃음을 참듯 입꼬릴 씰룩였다. 청하는 이때까지 본인이 뭣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축 늘어졌다.
"나는 답 없는 사람이야, 미안하다. 이것 말고 한 게 없어."
"사과하지 마라앗!"
여자애는 전혀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듯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푸른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엉키고 설켰다. 청하는 본인 그네 쪽에 엉킨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며 짧은 숨을 내뱉었다. 여자애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발을 동동 흔들며 말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해야 할 일은 꼭 찾아야 해!"
"왜?"
"그야, 해야 할 일이 길의 방향을 정하니까!"
둘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서로 간의 접점이라곤 사람의 모습을 한 것일 뿐 뭣하나 맞는 게 없었다. 서로 간의 언어가 달라 가끔 답답한 부분도 있었지만, 누구 한 명 열이 나도 나머지 한 명이 기분을 살살 풀어주는 식으로 끝나지 않을 대화를 이어나갔다. 단순한 일상거리였지만, 그 흐름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었다.
"왜 사람들이랑 같이 다니지 않으려 해?"
"마음이 맞는 사람을 못 찾아서."
"오만하네, 외로워 죽는 생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거 가릴 처지야?"
"남의 상처를 함부로 밟을 만큼 오만하진 않아."
쉬는 시간과 시험이 끝난 직후에, 반 친구들은 각자 재잘재잘 떠들거나 모션게임을 하곤 했다. 그 분위기는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운이 빠져나갔다. 사소한 것으로 깔깔 웃어대는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건 청하에게 있어서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한 번은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았다. 타인과 한 공간에 같이 있을 때, 가장 풀어지고 편한 때가 집에서 가족들과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청하에게 있어 사람들 틈에 자연스레 스며들고 분위기에 무르익는 연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지만 집은 항상 가족들로 북적해 있어도 언제나 정적이었다. 서로에게 볼일이 있으면 간단한 전화나 메시지로 주고받았는데, 그마저도 형식적인 대화가 주된 내용이었다. 학교나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개인적인 감정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서로한테 관심 자체가 없는 듯 일상에서 겪는 고충들 마저 일체 입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저녁 식사 시간에나 간간이 나오는 뉴스 얘기를 주고받지 그마저도 공격적인 말싸움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가족 사이에 뭘 그렇게 불쾌한 티를 내는 건지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가장 친근한 사람에게 푸는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이나 티비를 보며 묵묵히 밥을 먹는 이에게 무심코 말을 걸면 무조건 응, 아니 같은 단답으로 돌아오니 대화를 길게 이어가는 법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로 인해 본인 이외 사람에게 관심이 사라지고, 다가오는 관심도 기본적으로 의심을 품게 됐다. 한 번은 외로움을 못 이겨 모든 의심을 풀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온갖 에너지와 시간을 쓰며 지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부터 그 사람과 본인이 낯설게 느껴졌다. 제대로 사람과 대화를 나눈 경험이 적었던 터라 그 사람과 있을 때 매번 긴장을 하기 일쑤였고, 그 사람과 본인의 모르던 면이 계속해서 나오고, 한번 생긴 문제는 결코 쉽게 풀리는 일이 없었다. 아직 모든 게 미숙해서 관계가 그렇게 힘들게 느껴진 건가라고 생각할 무렵, 결국 끝이 없을 것 같던 관계가 허무하게 끊어졌다. 그 이후로 청하는 혼자인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 행동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자신의 활동에 더 몰입했고, 표면적으로는 그 상황에 더 익숙해 보였다.
"외로워서 죽기 전에 빨리 마음 맞는 사람이 나타나면 좋겠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는 곳은 없어?"
"학교랑 집 다 없어."
"지금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구나, 그렇지?"
멀리서만 보던 자연스러운 대화를 청하 본인이 직접 하고 있으니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갑자기 이 대화가 끊어질까 봐 불안감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여자애는 끊임없이 말 하나하나에 정성껏 반응을 해주고 결코 답변을 재촉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볍게 즐기는 즐거운 순간일 뿐이었다.
"그럼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책임져야지!"
"말이라도 고맙다."
"아냐 정말이야! 내가 멋대로 너랑 다니고 있잖아."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대화 주제의 끝을 달리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저런 말이 나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만 많고, 겁 많고, 할 일 없는 사람이 그저 대교 다리 밑에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여자애가 하는 말은 자신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도, 상대를 비방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결단코 없었다, 없었지만. 앞서 말한 모든 내용이 순식간에 사라질 까봐 덜컥 겁이 났다. 옆에 있는 사람이 무섭고, 지나가는 사람이 무섭고 세상 사람 전부가 이쪽을 향해 욕을 집어던지는 것 같았다.
"그, 그런 게 아니야. 나도 즐거우니까 같이 있었던 거야."
"그럼, 같이 다니는 김에 사람 한 명 찾는 것 좀 도와주라."
황당한 말의 연속이었지만 여자애가 하는 방식대로 상대방의 고충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반려를 잃었다고 했다. 청하는 곧장 여자애에게 이제까지의 행적을 물었다. 여자애는 이 도시의 거의 모든 거리를 돌아봤다고 했다. 미역이 주렁주렁 달린 행색으로 다닌 것이냐며 기겁하며 물으니, 영혼의 형태로 돌아다니면 극강의 효율이라는 말에 깊게 안도했다.
"나는 청하가 돌아가고 싶은 집을 찾는 것을 도와줄게. 아니면 나하고 같이 바다에 빠질래?"
그 말에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같이 살겠다는 건지 죽겠다는 건지 도통 헷갈려 다음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여자애는 혼자 속이 편한 듯 청하의 그네를 힘차게 밀어주었다. 이 여자애가 어떤 방법으로 본인을 도와주려는지 모르지만, 확실하게 진심은 느껴졌다. 이룰 수 있는 일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해야 할 일이 생기니 자츰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고, 무거운 집을 내려두고 다시 시작하는 생경한 느낌에 조금씩 웃음이 흘러나왔다. 여자애는 말없이 따라 웃기 시작했다. 정말 별것 아닌 웃음이었다. 둘은 현실에서 도망친 불안전하고 미숙한 상태였기에 여자애와 다닐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짧을 것이었다. 중간에 누구 한 명이 사라질 수도, 어쩔 수 없이 서로를 포기할 수도, 아예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자애와 함께 다니는 것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온 세상이 멈춘듯한 어둠 속, 끝없이 희망을 쏘아 올리는 것이 사람이 지켜야 할 유일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