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마음
어떨 때는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본인에게 주어진 시험을 열심히 준비했었다. 선생님의 성향이 섞여 나온 문제는 부분 점수를 받지 못하거나 상위권 애들조차 싸울 정도로 기준이 정확하지 않게 나오기도 했다. 결국 한 사람이 만든 불완전한 기준에 못 맞췄단 이유로 '넌 공부도 못하는 애.', '넌 경쟁에서 밀려난 애.', '넌 사회에서 뒤처질 애.'라는 낙인이 찍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시험에 몰입하여 우열을 가른다. 그리고 그 경쟁이 끝났을 땐, 그 행동들이 너무나 허무하고 얕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남이 정해 준 답을 '그냥 받아들이는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면 피해를 보게 되고, 많은 선택지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편하고도 꼭 필요한 '그냥 받아들이는 능력'이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겠지만,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쁘게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런 방식으로 본인을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시험 문제는 결국 불완전한 사람이 만든 선택지라 본질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애매할 수도 있고, 의도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런 불완전한 기준으로 사람의 미래가 갈린다는 것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노력이나 잠재력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든 불완전한 기준에 맞추지 못하면 실패자가 되는 구조가 싫었다. 그날도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따분하게 흘러가는 날이었다. 다들 무표정하게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고, 그날은 청하가 먼저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일어났다. 어수선하면서도 고요한 분위기. 그 혼란 속 사이를 뚫고 조심히 발을 내디딘다. 천천히 움직여도 작은 부딪힘과 짜증 섞인 목소리가 교차한다. 본인만이 들리는 양해의 목소리를 반복하고 사람이 덜 붐비는 구석을 찾는다. 수두룩 쌓인 우편물 더미와 교재들을 한 곳으로 밀고 곧장 자리를 잡았다. 전화를 걸기 시작하자 긴장감과 두려움이 물밀듯 닥쳐오기 시작했다. 그 나지막한 소음의 전화 호출음이 작은 세계를 점점 채워나간다. 양쪽 귀에 다수의 대화 소리가 공기를 타고 무겁게 흘러 들어온다. 사방이 먹먹해지고, 눈앞의 글귀가 하나하나가 멀어짐과 동시에 점점 깊게, 더 깊게 무의식으로 빠져든다. 뚝_호출음이 끊기자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모든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맑아진 정신으로 당당히 전화 너머 상대에게 말을 건넨다. 돌아온 말에 귀 기울이며,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참 핑계도 가지가지다. 맨날 빠져나갈 궁리만 해대고, 듣기 싫어 죽겠다. 그 잠깐을 앉아 있지 못하겠어? 네가 계속 학교를 빠져대니까 애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 아니야."
"오늘 한 번이면 돼요. 더 이상 바라지 않을게요."
"내가 또 널 어떻게 믿냐. 그 남은 몇 시간을 못 버텨서 부모한테 빌빌대는 꼴이, 자식 두 명이서 허구한 날 부모 속을 긁어대는구나."
한마디 한마디가 쿵- 거대한 굉음을 내며 감정의 지면을 으스러트린다. 커다란 쇳덩이가 몸 구석구석 떨어지는 그 무게가 어찌나 무거운지 한순간에 모든 생각들을 품은 머리가 무력해진다. 전신은 얇게 땀으로 뒤덮였고 이성을 초월하는 공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작은 세계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사라져 갈 때, 또다시 전화 너머 상대가 가라앉는 정신을 일깨웠다.
"이번만이다, 또 이런 일로 전화를 했다간, 그땐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된 망신을 줄 거야. 알아들었으면 대답해라."
"네, 알겠어요."
빈 가방에 아무 짐을 때려 넣는다. 출석부에 종이를 끼우고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절대 고개를 들지 않는다.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발걸음을 빨리한다.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죽인다. 아무도 본인의 편을 들지 않는 공간에서, 나날이 정신을 죽이는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기회를 써버린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본인을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따끔한 불쾌감과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차근차근 탑을 쌓아간다. 그러다 다음 순간, 푸르른 싱그러움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마치 이쪽을 보라는 듯 시선을 이끌자, 그 이끌림에 따라 바람의 흐름을 타고 천천히 시야를 옮겼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났다.
"드르렁..."
등 뒤에 나는 드르렁 소리가 너무 뜬금없어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여전히 눈을 감고 싶다. 불쾌하지 않은 꿈을 꾸고 싶다. 조용한 꿈으로, 영원한 무의식으로 넘어가고 싶다.
"드르러어엉."
시끄러워 저 숨 좀 막으면 좋으련만, 화악- 청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쿵, 소리와 함께 지면에 둔탁한 소음이 떨어졌다.
"드르렁...코오..."
청하는 누가 시킨 듯한 불안정한 안무처럼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조용히 눈살부터 떨림이 시작돼 후에 얇은 땀방울이 슬금슬금 전신을 뒤덮었다. 밤새 서로한테 등을 기대어 꾸벅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등받이가 사라진 여자애는 눈을 끔뻑이고 부스스한 머리를 털어 상체를 일으켰다. 마중 나온 정적을 틈타 여자애의 머리를 손질하려 가방에서 가위를 꺼내 들었다. 앞으로 사람들 틈에 섞이기 위해선 여러 준비가 필요했다.
"미안."
"뭐가?"
여자애는 개성 머리가 돼버렸다. 미안함이 섞인 기류를 산뜻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 머릿속을 신선한 소금기로 가득 채웠다. 여자애는 전신을 뒤덮는 긍정 에너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뱅글뱅글 돌다 물구나무를 서는 등 기행을 펼쳤다. 청하에게 있어 그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신선한 경이로움이었기에 여자애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연결돼 있는 기운은 서로를 찾아낼 수 있으니까 느낌 가는 대로 가야 해!"
“근데 그냥 감대로 가는 길이 정확한 거야? 머릿속에 새겨진 이미지랑 실제 길은 좀 다르잖아.“
“마음은 온몸을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내 발이 이끄는 길도 정답이고, 손이 잡히는 곳도 정답이야!“
여자애는 어깨를 으쓱였다. 반박의 여지는 없었다. 작은 발걸음의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적막 속에 퍼진다. 오늘따라 한산한 거리이다. 다들 주말이 주는 풍족함을 즐기러 간 것인지, 서로를 위해 저마다의 신의를 지키러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넓은 도로엔 거대한 움직임의 발자취들과 각각의 신념이 적힌 현수막으로 가득했다. 그들의 행동이 남긴 흔적은 단순한 자국이 아니라 집단적인 의지가 강렬하게 드러나 있었다. 여자애는 전봇대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는 청하에게 물었다.
"저건 무슨 말일까?"
"아... 나도 잘 모르겠네."
이 밖에도 여자애는 눈에 보이는 것들은 물어봤지만, 청하는 모든 걸 다 대답할 수 없었다. 잘 모를뿐더러,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은 외부적인 요소를 다른 세계로 구분 지어 버리곤 한다. 그 세계에서 현재 본인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지금은 본인 세계 안에서만 집중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에, 다른 세상 일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여자애의 뒤를 졸졸 따라가니 어느샌가 도착해 있었다.
"집을 옮겼나, 아쿠아리움 수조 안으로?"
"바다가 마음에 안 들었나 봐, 사람들이 하도 쓰레기를 버리니까 그래!"
청하는 묘한 죄책감에 무심코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가 첫 번째로 가봐야 할 곳이라는 건 확실해!"
"영혼의 형태로 다 둘러본 게 아니야?"
"그 상태에선 기운이 흐리게 느껴지기도 하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가끔 어린아이들이나 어르신들이 날 발견하곤 하니까, 자세히는 못 봤어."
청하는 무심코 여자애를 따라가려다 이내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구조가 특이한 건물이었기에 한 번 이상 와야 제대로 된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어리둥절한 여자애한테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 번은 꼭 오는 곳이라며 표 두 개를 사 들었다. 동시에, 수조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순간적으로 청색 기운이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인공적인 바다향이 코끝을 자극했고, 동시에 수조 가득한 생명체들이 맞이했다.
"정말 멋진 곳이야!"
쾅, 쾅! 연이어 앞사람과 부딪혔다. 메인홀에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다시 수조로 고개를 돌리니, 시선을 이끄는 무리가 보였다. 작은 개체들이 한 사람의 이끌림에 따라 거대한 장벽을 이뤘고, 그 뒤에 희미하게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다음 순간, 그 사람이 걷는 발걸음을 따라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줄지어 헤엄쳤다. 정말 많은 연습이 있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동선이었다. 뒤이어 사람들이 세차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가운데 팻말엔 폰 플래시를 켜지 말라는 경고문과 공연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여자애는 공연에 집중하는가 싶더니 수조 안 사람만을 계속 바라봤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여자애는 청하의 손목을 덥석 잡고 달렸다.
"찾았어? 저기 수조 안에 있는 거야?"
"그런 것 같아, 분명 저 사람이야, 분명 능력으로 저 기적을 일으킨 걸 거야!"
”그거는 저, 훈련을 시켰으니까..."
문틈을 열고 들어간 곳은 관람 구역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사방이 콘크리트와 쇠 파이프로 이뤄진 좁은 복도였고, 축축한 물비린내와 공기 방울 소리가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자, 수조의 뒤편이 있었다. 작은 벤치에 누군가 숨을 고르며 앉아 있었고, 둘은 순간적으로 방금 그 사람이란 것을 알아챘다. 여자애가 눈동자를 굴리며 신호를 보내자, 양쪽으로 흩어져 서서히 가운데를 향해 걸어갔다. 몸은 숙이고, 기척은 없앤 채, 이건 조금 포획이 아닌가 싶을 찰나. 고글을 벗은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청하는 여자애의 머릴 꾹꾹 누르며 구석진 곳으로 가 몸을 웅크렸다. 물색이 유난히 탁한, 사람은커녕 청소 물고기조차 보이지 않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무슨 일이야?!"
"조금만 작게 말하자, 저 사람은 네 가족이 아니야. 여긴 없는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왜 크게 말하면 안 돼?"
"쉿, 언니랑 연 끊은 지 좀 됐단 말이야."
뒤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사람의 등장에, 청하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여자애는 청하를 일으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떻게 찾았냐 물을 것도 없이, 여자애의 주변에 이미 수조 너머 작은 생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하나의 군무를 이루고 있었다. 그 괴이한 현상은 너나 할 것 없이 보는 이에게 흥미를 일으켰고, 청하의 언니를 포함한 관객들이 이미 자리를 잡은 채 그 둘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하, 네가 여기 웬일이야, 그것도 여자애 한 명 데리고. 옷차림은 또 교복이네, 오늘 학교 안 갔니?"
"청하 언니다! 안녕!"
"안녕~! 여긴 무슨 일이야? 둘이 땡땡이치는데 내가 방해한 거야?“
청하가 드러내는 경계심은 그것을 오랫동안 봐와서 익숙해진 언니에게 통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청하는 막무가내인 언니의 성격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서로 자신의 의사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언니는 여자애를 일으키더니 이내 팔짱을 끼곤 주변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여자애는 그런 적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그 당찬 성격을 마냥 즐겼다.
"머리색 특이하다~ 염색 어디서 했어?"
"염색이 뭐야?"
청하는 뭐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지, 언니의 어깨를 살짝씩 건드렸다. 언니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자, 잠깐, 여기까지 왔는데, 30분만 기다려주면 안 돼? 밥 같이 먹자."
"같이 먹을 사람도 있으면서."
그 모습에 여자애가 약간의 어리광을 부리자, 청하는 신선한 충격에 입을 꾹 닫았다. 침묵은 당연하게 동의로 여겨졌고, 언니는 약속 시간과 장소를 말해준 후, 유유히 일을 하러 떠났다. 언니가 가자마자 여자애는 폭풍적으로 청하한테 질문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이름이 뭐냐부터, 둘은 가족이면서 어떻게 그렇게 성격이 다르냐는 등. 이야기는 답변이 내키지 않던 소재로 시작해 점점 꼬리의 꼬리를 물어 거대한 어항 속 풍경처럼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발전해 나갔다. 일반적인 질문만을 반복하던 여자애는 슬슬 발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청하의 부정적인 답변은 폭풍적인 질문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내면서 점점 재치가 섞인 가벼운 사고방식으로 개선돼 갔다. 여자애와 시간을 보낼수록 청하의 작은 세계는 즐복함이 물밀듯 넘쳐났다. 즐복함이 뭐냐, 여자애한테 물으니 즐겁고 행복하게 라는 뜻이라 했다. 여자애를 만난 이후로 생긴 편안한 침묵과 함께 웃기고 상상하고 장난치는 시간은 본인이 사회에서 뒤처지는 애라는 사실을 한 번 더 각인시켜 주었다. 창밖 너머 가방을 메고 학원을 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것을 더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여자애와 계속 얘기를 이어나갈 수만 있다면 뒤쳐지는 애라는 말이 붙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조 너머 생물들이 본인을 향해 헤엄치는 공간에서 여자애와 보내는 시간은 이제껏 무언가를 기다려왔던 마음을 보상해 주는 것만 같았다. 언니와 약속 한 시간이 다가왔다. 순간 청하는 여자애와 가는 곳마다 이런 기분을 느낄 것이란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푸... 드... 코... 트...!"
“잘 읽네."
"난 배움이 빨라! 비... 빔밥!"
"잘한다."
"떠...!"
"응, 맞아."
"떢빢끼!"
"하하, 잘했어."
언니와의 시간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어찌 됐든 또다시 걸음을 옮겨야 했다. 여자애의 계획은 정말 단순했다. 청하에게도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동선이었고, 자신의 반려를 찾는 여정을 복기하는 과정인지 여자애의 선택지에는 망설임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흰 여울 빛 마을을 끝도 없이 걷는가 하면 산길을 타 어느 천공의 카페로 들어가기도 했다. 여자애는 장소를 옮기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눈동자와 머리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여자애와 같은 종족이라면 그와 비슷한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했지만 좀처럼 여자애와 비슷한 느낌의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동굴은 어때?"
"밤에 추울 것 같아."
"저 절벽은?"
"있잖아, 일반 사람은 너처럼 아무 데서나 잘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거든."
간간이 청하가 지낼 곳도 찾아봤지만, 안타깝게도 여자애의 안목은 형편없었다. 저벅저벅, 무의식을 싣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아까와 달리 얌전한 걸음걸이는 그가 조용히 자신의 반려를 찾는 것에 의식했기 때문인 듯했다. 가끔 고개를 돌리긴 하지만 그곳엔 항상 아무도 없었다. 그때마다 청하는 흠칫, 혼란스러운 생각이 스쳐 지나가곤 했다. 본인이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꾸준히 다니던 길, 장소, 공간 빠짐없이 여자애가 찾아갔기 때문이다. 곧이어 뭔가를 발견한 여자애가 한 곳을 응시하며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앉자, 청하도 똑같이 행동했다. 기묘한 긴장감에 빠져들 때, 또다시 눈에 띄는 한 인물이 보였다.
"이얍!"
"으아악!"
"내, 내가 더 놀랐다."
청하는 아까처럼 그대로 고꾸라졌다. 천공의 카페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이곳은 언니가 몇 개월 전부터 알바로 전전긍긍하던 곳이었다. 청하는 가끔 언니의 심부름을 받는 날이면 꼭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주차장 구석으로 숨기 바빴었다. 여자애는 아픈 다리를 콩콩 두들기며 언니를 바라봤다. 언니는 하루 종일 쉴 틈이 없어 보이는 바쁜 사람이었다. 손에 한가득 언니가 사다 준 빵을 들고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자애의 불안전한 직감을 행동으로 옮긴 지 몇십 시간이 지났다. 마지막 장소를 제외하고 금일의 여정은 여기까지인듯싶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더 안 둘러보고, 이대로 괜찮겠어?"
"계속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피곤하기도 하고, 너도 더 이상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걸!"
머리 위로 한 방울, 두 방울씩 천천히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늘은 먹구름이 드리우고, 곧이어 어깨가 흠뻑 젖을 정도로 비가 내렸다. 인파가 적은 거리에 위치해 있었기에 주변에 갈 곳은 작은 성당뿐이었다. 둘은 동시에 성당 쪽으로 달려갔다. 손바닥만 한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는 부분을 여자애가 불꽃으로 튕겨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내부로 들어가자, 습기 가득한 공기가 머리칼을 스치고, 거대한 석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걸을 때마다 나무판자 아래에서 마치 오래된 관절처럼 삐걱- 소리가 났다. 안은 생각보다 넓고 덥고 습했다. 여자애는 이곳이 신기한지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모든 소리를 죽이고 멈춰 섰다.
"이 사람은 누구야?"
"어... 세상의 엄마?"
남은 말을 그대로 삼킨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짧게 숨을 들이쉬며, 여자애가 아주 낮게 덧붙인다.
"네 언니는 가족인데, 어째서 마음이 맞지 않아?"
"가족이랑 있을 때가 가장 불편해. 가까운 관계일수록 선을 쉽게 넘어버려."
"그것 참 피곤하겠네. 꼭 마음이 맞는 가족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청하는 잠시 눈을 내렸다가,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여자애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담담하고 흔들림 없는 말투로 설명을 이어갔다.
"괜찮아, 청하는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포기하지 않아도 돼! 마음이 계속 살아 있는 한 희망은 꺼지지 않아!"
"정말?"
"그럼! 네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야! 죽지 않는 한 희망은 계속 살아있어, 그러니 포기할 수 없어!"
망설임 없이 내뱉은 말은 해답을 가리키는 듯했다. 여자애가 내뱉은 말 하나하나가 응원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고, 언제 어디서든 활력이 가득했다. 너무나 쉽게 포기를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자애는 담담히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있었다. 그걸 듣고만 있어도 저절로 힘이 나고,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마음이 진정됐다. 내일 새벽에 관리인이 알아채기 전에 빠르게 이곳을 나가야 했기에 얼른 잠에 들어야 했다. 하지만 둘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감시 카메라 하나 없는 낡은 건물 속 뭐라 하는 사람 한 명 없이 둘만 있는 공간이었기에 뭘 하든 재밌을 것 같았다. 청하는 성당에 불법으로 들어온 것이니 신한테 죄를 고하자며 여자애를 이끌고 석상 앞으로 다가갔다. 여자애는 두 손 두 발 다 모으는 자세를 따라 기도를 이어나갔다. 무심코 청하는 어떤 기도를 했는지 궁금해졌다.
"너무 오래 기다리면, 사람 머리가 망가지잖아. 그래서 청하한테 마음이 맞는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어!"
순간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을 여자애가 대신 꺼내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매일 불안을 삼키며 살아. '조금만 더 기다려.'란 말은, 그 불안을 연장시키는 말이야. 그래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먼저 봐줘야 해. 기다리는 사람이 바보인 게 아니라, 제때 결과를 갖다 주지 않는 세상이 나쁜 거야. 그래서 기도했어!"
여자애의 말은 위로로 다가왔다. 이상하게도 그 말은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처음으로 정확히 이해한 사람처럼, 청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미 일어날 일처럼, 비가 거세고 조용하게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