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없이 맑은 마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름으로 어버이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창세 전에 그 크신 사랑 이미 나타났네. 나 같은 죄인 돌보신 그 영원한 사랑, 당신의 이름 말할 때 내 맘 곧 일어나 사랑으로 날 구하신 그분께 경배드리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수차례의 말들을 지나 조용히 문밖으로 나섰다. 성당 안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여기저기 울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숨을 토해가며 계속해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모습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청하는 여자애의 등을 살살 밀며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여자애는 의아한 표정으로 청하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우는 걸까?"
"마음이 힘든 상황에서 의지할 곳이 생겼으니까...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것 같아."
"누군가가 저 사람들을 엄청 좋아해 주나 봐!"
청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생각하다 그대로 사람의 사고를 아득히 뛰어넘는 생명체에게 물어봤다.
"어떻게 해야 저 많은 사람들을 좋아할 수 있는 건데?"
"티 없이 맑은 마음이 타고나야 해!"
"신님도 고생이 많네."
"그런가? 완벽한 신은 사랑 같은 거 안 할 텐데."
자연스럽게 다음 목적지로 걸음을 옮기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여정이 끝나면 여자애는 자신의 반려와 함께 바다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만약에 여자애가 반려를 따라간다면, 앞으로의 문제는 생각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이 수월 해질 것이다. 여자애가 가는 동선들은 평범한 사람의 한 일과였다. 사회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여자애와 다르게 반려는 이미 이쪽 생활에 적응했을 가능성이 높고, 여자애를 데리고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청하 본인은 혼자 남겨졌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김에 일탈이란 일탈은 다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일상은 항상 지긋지긋한 일들의 연속이다가 가끔, 아주 조금 기분이 나아질 때가 있었다. 그 조금 기분이 나아진 틈에 더러운 하루가 씻겨 내려가고 다시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면, 본인이 그렇게까지 불행한 사람은 아니라고 느껴진다. 그러니 가끔의 일탈은 방황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 날을 준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반대로 일상에서 기분 좋은 순간이 없어지면, 내일을 맞이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여자애를 만났던 날 이후에 하는 일탈이 최근 날들보다 힘을 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와 집에서 아무 느낌 없는 날들의 반복 속에 가끔, 아주 조금씩 찾아오는 행복과 불행으로 본인의 삶을 정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작은 변화가 어린 사람에겐 너무나 큰 자극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생각 없는 사람이 던진 돌과 여자애를 만난 이 짧은 시간이 그 예였다. 이들이 찾는 인물은 또 다른 인외생물, 여자애의 하나뿐인 동반자이다. 문득 청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인외는 어째서 자신의 반려인 여자애를 찾지 않는 것일까. 필사적인 것은 여자애 하나뿐이었던 거지, 어쩌면 이미 죽은 인물을 찾고 다니는 것일 수도 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인데 인외 종족이라고 다를 것이 있을까 봐. 사람보다 한없이 순수한 종족이니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기라도 했을지 모른다. '그는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야.' 마음속으로 외쳤다. 남은 이가 저를 찾고 있는데, 심지어 남조차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데. 어디선가 자리를 잡아 영원히 여자애를 잊은 것이라면 너무도 괘씸하다. 이 여정이 끝나면 청하와 여자애는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다. 각자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고, 서로를 위해서라도 까마득하게 잊을 것이다. 현재 상황은 어쩔 수 없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 지금보다 좋은 그때의 환경이 생각날 수밖에 없다.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시간과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그놈 찾는 걸 그만두게 하고 싶다.' 마음속으로 못난 생각을 외쳤다. 초콜릿을 맛본 아기가 한 숟갈의 달콤함으로 이유식을 완강히 거부하듯 여자애와 헤어지면 평소엔 신경도 안 쓰던 불편함들이 물밀듯 닥쳐올 것 같았다. 그걸 너무나 늦게 깨달은 지금은 여자애의 반려 찾는 것을 방해할 수도, 행복으로 가득 찬 세계를 멋대로 끝낼 수도 없었다. 차라리 돌아오지 않을 그를 대신해 여자애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면 지금 이런 머리 아픈 생각들을 하지 않고, 앞으로의 미래만을 떠올리며 애써 기분을 망칠 필요도 없지 않을 텐데. 여자애와 만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헤어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생각을 끝까지 미루고 여자애의 사고를 따라 해야 했다. 앞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느낌 가는 대로 본인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즐겼어야 했다. 그리고 시간이 다 된 뒤에 그때 후회해야 했다. 지금 상황은 청하 본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큰 공포로 다가왔다. 여자애로 인해 얻은 생생한 활력과 넓은 마음이 사라져 간다. 여자애를 만나 생애에서 가장 큰 행복을 얻음과 동시에 생애에서 가장 큰 공포를 얻은 것이었다. 순간 왼쪽 귀에서 여자애가 속삭였다.
"남의 가족 욕하는 것 좀 그만해 줄래?"
순간 홀린 듯 여자애를 쳐다봤다. 그대로 눈은 고정된 채 말문이 막혀 손에 땀이 잡히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미안해. 내가 생각하는 말을 들었어?"
"정확히는 음으로 듣지. 방금은 아주 소박하지만 날카로운 음정으로 정확히 내 반려를 욕하고 있었어. 하지만 신기하구나, 남을 질투하는 소리지만 한 없이 순수하고 깨끗해."
"모든 사람의 마음 소리를 들어?"
"전부."
말없이 정적이 흘렀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여자애의 능력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본인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뒤에서 어물거리기만 했다. 여자애는 뒤를 돌아보지도, 크게 화를 내지도, 상황을 넘기려는 유쾌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묵묵히 앞길을 걸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고개만 돌려 청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여자애의 눈에 청하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자신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더니 이내 획, 하고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에서 기운이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가자."
순간 청하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무언가 이끌리는 것처럼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여자애는 그런 손을 잡고 걸음을 두 배 더 빨리했다. 하늘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옮겨갔다. 둘은 맞잡은 손을 꼭 잡고 움직이는 땅을 디뎠다. 여자애는 학교 뒷문으로 향했다. 청하가 졸업했던 중학교. 정신없던 날들만 기억나는 곳이었다. 곧이어 상반신까지 닿은 철조망을 잔뜩 부풀어 오른 표정으로 이리저리 흔들었다. 청하가 엑스자로 쳐져 있는 지지대를 밟고 다른 한쪽 발을 교내로 집어넣자, 여자애는 그 모습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청하는 여자애를 잡아주다 실수로 윽, 소리를 냈고 여자애의 얼굴은 다시 부풀어 올랐다. 안절부절못하는 청하를 데리곤 여자애는 힘차게 유리문을 발로 까서 들어갔다.
"여긴 뭐야?"
"도서관."
"여기는?"
"시청각실."
여자애가 쿡쿡대며 웃자 청하는 조용히 따라 웃었다. 여자애랑 지나가는 모든 곳은 과거에 엄청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공허하고 기분 나쁜 향수병만 도졌다. 그래도 이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누군가와 조용하고 익숙한 넓은 곳을 걷는 행위 자체가 재밌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자애는 청하의 반으로 향했다. 청하는 순간 움찔거리며 혼자 속도를 늦추더니 이내 여자애에게 물었다.
"근데 너 여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이 동네는 인구 밀도가 높아 멀지 않은 곳에 중고등학교들이 유난히 밀집해 있었다. 청하는 하필 이곳을 선택한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여자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연하게 말했다. 청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뜸 전화를 받아야 한다며 자릴 비웠다. 수없이 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여자애가 교실 뒷문을 세게 밀자 차가운 공기와 잿빛이 순간적으로 정신을 짓눌렀다. 그 기세에 지지 않으려 교실 안을 활보하다 가장 끌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책상 서랍에 손을 넣자, 종이 한 장이 손에 잡혔다. 종이에 적힌 글을 눈으로 훑었지만 거의 이해가 되지 않아 소리 내 다시 읽어봤다.
"거짓된 나를 버립니다."
여자애는 종이를 다시 넣어두곤 청하를 찾으러 나섰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내디딘 발걸음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그러다 홀린 듯 낯선 장소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쾌쾌하고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숨이 턱 막히는 주차장이었다. 어찌나 어두운지 눈살을 아무리 찌푸려도 물체의 실루엣만 겨우 보이는 수준이었다. 여자애는 무심코 청하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높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초점이 맞지 않은 눈 여러 개가 동시에 여자애를 쳐다보았다. 여자애는 그제야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마스크에 가려진 감시카메라, 바닥에 깨진 휴대폰과 바닥에 널브러진 소지품. 섬뜩한 눈들 아래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한 사람이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연이어 들리는 영상녹화 소음과 함께 키득거리는 기괴한 소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순간 뒤에서 청하가 여자애의 어깨를 잡고 본인 쪽으로 이끌었다. 청하의 뺨에 붉은색 선이 그려졌고, 핸드폰은 완전히 으깨져 있었다. 여자애는 머릿속이 꽉 찰 정도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해결해 줄 거라 생각하고 쟤네한테 덤볐어?"
청하는 그 자리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끔 튀어나오는 여자애의 그림자 지는 면이 본인을 향해 똑똑히 마주하고 있었다. 그 말을 하는 여자애가 무서워 쉬이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무리 중 한 명이 여자애에게 다가왔다. 다가오는 손을 뿌리치자, 짜악, 소리와 함께 여자애의 뺨이 피가 맺혔다. 여자애는 고개를 빳빳이 들어 자신에게 향하는 눈동자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 모습이 극도로 기괴해서 보는 이에게 마치 사람과 다른 종족임을 나타내는 듯 보였다. 곧이어 여자애는 자신에게 걸어오는 말들을 전부 무시하곤 한 명 한 명씩 다가가 머릿속에 강력한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찢어지는 여자 비명, 꺾인 남자 비명이 뒤섞여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찢긴 숨소리들이 벽을 타고 메아리치며 공간을 가득 메우는데 어찌나 시끄러운지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피해자는 자신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억지로 떼어내곤, 중심을 잡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자 묵직한 무언가가 다리에 부딪혀 다시 고꾸라졌다. 다리를 걷어찬 사람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또래 여자애였다. 그 애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혼자서 뭘 어떻게, 전기충격기라도 쓴 거래? 다른 놈들 다 패 죽이는데 나만 멀쩡하게 두고 뭐 하는 짓이야.“
그는 여자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어깨를 밀치며 벽으로 몰아세웠다. 그러자 팍- 하고 밝은 불꽃을 튕기며 여자애가 뒷걸음질 쳤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만 못 건드네.“
"청하 얼굴 왜 저렇게 해놨어?"
"그냥, 눈에 보이길래."
그는 주머니 속에서 날붙이를 꺼내 여자애에게 휘둘렀다. 여자애의 능력은 어째서인지 그에게만 통하지 않았다. 여자애는 한 번 더 불꽃을 기둥 쪽에 튕겼다. 상대가 날아온 돌 파편에 얻어맞고 휘청거리자, 그의 목을 콱 움켜쥐곤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사방에 울려 퍼지다 이내 버둥거리던 팔이 툭, 떨어졌다. 여자애는 숨을 크게 들이켜곤 청하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놀란 눈으로 본인을 바라보는 피해자를 지나 도로를 향해 정처 없이 걸었다. 여자애한테서 나는 짙은 피비린내가 눈을 질끈 감기게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둘을 감시하듯 쳐다보더니 이내 서서히 멀어졌다. 더 이상 이목을 끌면 안 될 것 같아 청하는 여자애를 이끌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상가건물들의 위치를 따라 대교 다리 밑까지 걸어갔다. 여자애는 계단을 다 내려가자마자 그늘이 진 곳으로 가 그대로 드러누웠다. 아주 조용히 여자애의 상태를 보니 여자애는 눈만 끔뻑일 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본인 때문에 이렇게 된 꼴이니 뭐라도 해줘야 할 것 같고, 결국 생각나는 대로 내뱉기로 했다.
"밥 먹을래?"
혹시나 기분 나쁜 말로 들렸을까 어쩔 줄 몰라하는 청하를 보곤, 여자애는 짧은 숨을 뱉으며 덧붙였다.
"난 안 먹고 안 자도 살 수 있어."
여자애가 벌떡 일어나 청하의 어깨를 털었다. 청하는 살짝 움찔거리다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여자애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무서워?”
"아니야, 나 때문에 네가 그렇게 됐는데. 내가 무서울 자격이 어딨어."
"무서운 건 네가 약해서지. 하지만 그 괴롭힘 당하는 작은 애는 네 덕에 살았잖아."
"그 애들 다 죽었을까..."
"몇몇은 살아있을지도 몰라."
그늘진 곳 너머는 햇빛에 의해 바닥에 깔린 돌들이 이글이글 끓고 있었다. 서늘한 그늘에서 어디서 왔는지 모를 바람이 살갗을 따갑게 할 무렵,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날 만났다고 해서 네가 계속 살아갈 의지를 얻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넌 왜 자꾸 살려해?"
"뭐,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어."
여자애는 잠시 고민하듯 눈동자를 위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넌 계속 살아야 하던데."
"그걸 어떻게 알아."
"네 인과력이 그렇게 이끌고 있어."
"인과력?"
"사람들이 서로를 지켜주는 힘이야. 의지를 이어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쉽게 죽을 수 없어. 그러니 아까 그 애한테도 내 힘이 통하지 않은 거야."
"어렵다."
"어렵지 인과력이란 건 네가 날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큼 어려워."
알 수 없는 말을 하곤 여자애는 다시 드러누웠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자세도 바꾸지 않고 눈을 감았다. 가끔 청하가 얼굴 쪽에 손을 갖다 대면 미세한 숨이 왔다 갔다 할 뿐,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청하는 무심코 여자애에게 물었다.
"이거 꿈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꿈인 것 같아. 대교 밑에 갔을 때 이후로."
청하는 아, 소리를 내곤 고개를 돌렸다. 여자애는 뜬금없이 일어나선 청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눈빛을 애써 피하려 했지만 확고한 의지보다 더 빠르게 피할 순 없었다.
"네가 내 반려인 것 같아!"
"뭐?"
"너도 느꼈잖아, 우리 다녀간 동선들은 죄다 네가 남긴 흔적이었지?"
둘 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여자애가 하는 말은 사람의 이해를 초월한 것 같았다. 그것이 두렵기도 또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했다.
"믿을 수가 없어. 난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었는걸."
"내 모습은 진짜 사람한테서 뺏어온 거야. 걔도 그랬을 거야 아주 옛날에. 근데 네 인격이 더 강하니까 오히려 너한테 영혼이 잡아먹힌 거지!"
아무것도 믿기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갑작스레 떨어진 행운을 받은 얼굴은 황당함만이 가득했다.
"네 눈이 나처럼 반짝거린단 말이야, 우린 같은 종족인 게 확실해!"
둘은 몇 시간 동안 같은 곳을 맴돌았다. 웃음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한 명은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잠들고, 또 한 명은 멍하니 빈 곳을 바라봤다. 깊은 곳에서 깨어난 여자애는 청하가 보는 곳을 똑같이 바라봤다. 4글자로 적힌 곳 아래 미세한 글들이 쓰여 있었다. 하늘이 다시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여자애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보였다.
"희망 없는 상황 속에서 의지할 사람을 찾는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야. 그냥 같이 있기만 하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곁에 있을게. 그래, 그렇지! 티 없이 맑은 마음이란 건 이런 걸지도 몰라!"
여자애는 한없이 투명했다. 그런 모습을 본 청하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좋아,라고 한 뒤 공중전화 부스를 찾았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신호음이 가고 상대가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
"여보세요?"
"언니 나인데…그…“
"어어, 그래 청하야. 무슨 일인데?"
"…언니 집에 좀 가도 돼?"
***
뚜렷한 불안감이 남은 채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봉지 과자를 가리키며 작은 세계를 정화시키는 강한 울림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둘은 협소한 공간에 쭈그려선, 그렇게 앉아 있었다. 청하는 순간 눈을 깜빡이며 놀란 표정으로 질문을 대신했다.
"이얍!"
"으아악!"
"갈수록 더 놀라는 것 같다 너!"
또다시 눈에 띄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주말에 쓰리잡이라니, 정말 부지런한 사람이다. 청하는 질릴 법도 하지만 역시나 또 고꾸라졌다. 이번에는 동시에 두 사람이 잡아주었다. 그리곤 해맑게 웃어 보였다.
"언제쯤 언니한테 적응할 거야?"
작은 세계는 일순 안정감을 되찾았다가 다시 무가치한 불안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여나 자기 때문에 또 불편해질까 싶어 도시락 두 개와 캔 음료수를 쥐여준 채로 서둘러 문밖으로 내보냈다.
"참, 청하야!"
"어?"
뒤돌아서 바라본 얼굴은 적당한 피곤함이 깃든, 악의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순한 인상이었다. 언니는 그대로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말했다.
"차 조심해서 집 먼저 가 있고. 앞으로는 연락 자주 하자."
삽시간에 고요하게 스며들어 있던 반감이 사라졌다. 그동안 내비치던 보잘것없는 불쾌함의 감정들이 부끄러워짐과 동시에 작은 세계의 환경이 조금씩 정화됐다.
"그래,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