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미에르(Vermeer)를 찾아라-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비 오는 날 센트럴파크 걷기

by 남쪽나라

어젯밤 나이트투어로 추위에 된 통 혼이 났지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뉴욕에 도착한 후 바로 쉬거나 눕지를 않고 맨하탄 관광부터 나섰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침대에 눕자마자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침 6시까지. 나무토막처럼 잔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아침에 일어나니 시차를 못 느낄 정도로 몸이 아주 가볍다.


민박집주인이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는 뉴욕 최고맛집(?)의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잔뜩 바르고 커피와 함께 아침을 먹는다. 마치 뉴요커나 된 것처럼. 민박집주인의 말대로 과연 뉴욕 최고의 베이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째던 아침식사로는 괜찮다. 안주인은 크림치즈를 많이 바를수록 세련된 뉴요커라며 우리에게 크림치즈를 잔뜩 바르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우리는 크림치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아침도 든든히 먹었겠다 가져온 옷들을 다 껴입고 어젯밤 예약한 맨하탄 업타운투어를 찾아 나선다. 지하철을 타고 어렵사리 찾은 센트랄파크 입구는 아침부터 꽤 혼잡스럽다. 노선버스들과 빨간색, 파란색 녹색 등 요란한 색갈의 투어버스들이 뒤섞이고 영화에서나 보던 화려한 꽃마차들이 길옆을 차지하고 돈많은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다. 입구주변에는 기동복차림의 경찰도 꽤나 많다.


우리는 예약한 그린투어버스 승차장을 겨우 찾아 탄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춥기는 어젯밤과 마찬가지이다. 스카프까지 동여매고 아내는 용감하게(?) 버스 2층으로 올라가지만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래층 운전석 뒤에 나 홀로 자리한다. 부티 나는 센트랄 파크 주변의 맨하탄 업타운은 자주 오던 곳처럼 눈에 익다. 우디 알렌의 영화를 자주 봐서 그런가?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우디 알렌과 그의 여자들이 길 모퉁이 어디에서 불쑥 나타날 것도 같다. 고급진 아파트 입구를 지키는 잘 차려입은 수위아저씨들도 보이고, 4월의 혹독한(?)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팔다리를 자랑스럽게 노출한 채 센트랄파크를 가로지르는 날씬하고 멋진 백인여성들의 조깅모습도 보인다.


흑인들의 세상 할렘가도 지나고 명문 콜럼비아 대학도 보인다. 그렇게 한가롭게(?) 센트랄파크 주위를 돌면서 가이드는 몇 안 되는 승객을 앞에 두고 녹음이라도 한 듯이 하이톤으로 열심히 떠드는데 나는 그저 춥고 배고프기만 하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나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보이자 우리는 과감히 투어버스를 탈출(?)하여 미술관으로 진입한다. 미술관 앞 푸드트럭에서 놀랄 만큼 비싼 빵조각으로 허기를 채운 체.


20160426_151853-1.jpg?type=w2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입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역시 그 명성답게 사람들로 인산인해이다. 인파 속에 매표소 앞에 서니 비로소 뉴욕에 온 기분이 난다. 처음으로 가슴이 설렌다. 과연 어떤 그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방마다 볼 그림들이 넘쳐 났지만 패스 또 패스! 우리는 먼저 맨 위층의 유럽미술관부터 찾는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의 내가 보고 싶은 최우선 관람목표는 페르미에르(Vermeer). 방 몇 개를 드나들다가 마음이 급해 경비원에게 물어 페르미에르의 방을 찾는다. 크지 않은 전시실에 들어서자 다른 작품들과 섞여 다섯 점의 페르미에르가 떡하니 걸려 있다. 그림은 크지 않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것들이 페르미에르임을.


지금까지 진품으로 인정받은 페르미에르의 작품 총 36점 가운데 13점이 미국에 있다. 그중 다섯 점이 바로 내 눈앞에 펼쳐 있지 않나! 나는 처음으로 뉴욕엘 온 기쁨을 느낀다. 와! 이래서 사람들이 뉴욕, 뉴욕 하는 건가!


신앙의 알레고리(사진출처 :구글)
maid_asleep.jpg?type=w2 잠이 든 여인(사진출처:구글)
woman_with_a_lute.jpg?type=w2 류트를 연주하는 여인(사진출처:구글)
study_of_a_young_woman.jpg?type=w2 베일을 쓴 소녀(사진출처:구글)
young_woman_with_a_water_pitcher.jpg?type=w2 물주전자를 든 젊은 여인(사진출처:구글)

페르미에르보다 위대한 화가는 많다. 그러나 페르미에르만큼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는 화가는 많지 않다. 작품의 희소성 때문인가? 명성에 비해 가려진 그의 생애 때문인가? 아니면 그의 그림들에 얽힌 흥미로운 얘깃거리 때문인가? 빛과 색채의 화가로 잘 알려진 요하네스 페르미에르(Johnnes Vermeer)의 그림들은 우선 보기에 편하다. 압도적인 스케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알레고리도 없다. 17세기의 중산층의 일상을 빛과 색채의 절묘한 조화로 잘 빚은 소박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한 장의 스냅사진을 보는 느낌이다.


그의 그림은 사후 200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힌 체 관심권 밖에 묻혀 있다가 19세기 중반부터 새롭게 조명을 받으면서 서서히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세계 제2차 대전 중엔 히틀러가 가장 사랑하는 그림으로(Allegory of Painting은 히틀러가 거금을 주고 산 유일한 그림이란다), 대전 후에는 유명한 반 메헤렌의 위작사건으로 더욱 명성을 높여간다. 최근에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소설과 영화까지 등장하면서 그의 작품들은 현 세기 대중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그의 그림은 생각보다 작다. 대부분 20~30호 사이즈다. 그림 앞에서 찬찬히 들여다봐야 하는데 메트로폴리탄 같은 미술관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들 앞에 줄을 서 있으니까. 당연히 로마의 몇몇 교회 제단이나 예배실에 높이 걸려있는 카라바조나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주는 압도적인 포스나 전율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감이 전해져 온다. 그림을 보는 기쁨이 이런 것인가 보다. 페르미에르 방에서 오래 머물 수 없어 서둘러 여러 방들을 바람소리 내며 전전하다가 눈에 딱 들어오는 그림 3점이 있다.


Caravaggio_-_I_Musici.jpg?type=w2 카라바조의 그림 <음악가>(사진출처: 구글)


the_denial_of_st.peter.png?type=w2 베드로의 배신(사진출처:구글)


800px-Lutniarz.jpg?type=w2 류트 연주자(사진출처:구글)

앗! 카라바조다!. 아니 카라바조가 여기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음악가>와 <베드로의 배신, 그리고 <류트연주자>. 모두 이탈리아에서 본 그림들에 비하면 소품들이다. 그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뜻밖의 횡재한 기분! 몇 번을 왔다 갔다 보고 또 본다(나중에야 알았지만 미국에 카라바조의 그림이 10점이나 있단다. 아! 부자나라 미국이여!) 그다음의 수많은 눈에 익은 유명그림들, 그 앞에 일일이 설 수도 없어 바람같이 돌아보고 인상파 작품들 방에서 계속 머뭇거리는 아내의 손을 잡고 미련 없이 미술관 밖을 서둘러 나온다. 내가 그랬지? 욕심부리지 말자고. 페르미에르(Vermeer)와 카라바조(Caravaggio)를 본 것만으로 오늘 하루 행복하고 배부르다.


미술관을 나와 우리는 센트랄파크를 걷는다. 사실 센트랄파크를 꼭 걷고 싶었다. 그런데 영 사람이 별로 안 보인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 비도 내리고. 우리는 아이들이 미니보트를 띄우고 노는 연못가도, 동물원 주변도, 여기저기 공원 안을 거닐어 보지만 내가 그리던 센트랄파크의 4월의 풍경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곳엔 벚꽃이 만발하고 호숫가 잔디에는 젊은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흐드러지게 꽃향기가 널브러진 체 파바로티의 Aprile(사월)가 울려 퍼졌는데...


그래도 우리는 비 오는 센트랄 파크를 둘이서 우산을 받쳐 든 체 손잡고 거니는 오랜만의 행복을 누린다. 아직 5시도 안 된 이른 오후였지만 우리는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일찍 귀가한다.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몸도 약간 얼어있는데 이럴 때 딱인 인근 한식집을 민박집 안주인이 소개해준다. 이곳 교민들 사이에 소문난 맛집이라고. 과연 소문대로 전라도식 기본 밑반찬이 30개 넘게 나오고 시킨 음식은 맛있고 푸짐하다. 팁과 세금까지 포함된 계산서가 한국에 비해 만만치 않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다. 반주로 마신 소주 반 병에 간도 커져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뉴욕의 밤거리를 겁도 없이 걷는다. '뉴욕 무서운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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