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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에누 Nov 27. 2024

[일과 놀이 사이]          장년의 참새방앗간

은퇴한 백수들의 놀이터

22년간 일하다가 정년퇴임한 지 일 년이 지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참 행운아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일 년 정도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보니까 그런 생각이 점점 더 절실해집니다. 근무하던 직장이 가족이 사는 곳과 떨어진 지역에 있다는 건 불편함도 컸지만 좋은 점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나만의 공간이 있었다는 겁니다. 대학이 제공하는 꽤 널찍한 연구실도 있었고 혼자 기거하는 아파트도 있었으니까요.

사무실과 은신처에서 마음껏 자유를 구가하다가 그런 공간이 없어진 것은 엄청난 상실입니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역에서 직장 생활하는 것이 일상인 사람은 이해할 겁니다. 그리움과 외로움도 컸지만 간섭받지 않고 일하고 놀 수 있는 이점도 쏠쏠했던 것 같습니다.




옛적에 처녀총각들은 방앗간 근처에서 밀회를 즐겼다고 합니다. 왜 하필이면 방앗간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거기서 그들이 방아를 찧었는지, 쿵덕쿵덕 방아 찧는 소리가 연애에 필요했는지는 알 수도 없고 상상도 잘 안됩니다.

참새들도 방앗간은 그냥 못 지나간다고 합니다. 여자들도 마음껏 수다 떨 수 있는 방앗간이 있습니다. 장년 남자들에게도 참새방앗간 같은 공간은 꼭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늙으면 양기가 입으로 다 모인다고 합니다. 어디 가서 입방아라도 찧어야 에너지가 발산되고 스트레스가 풀릴 거 아닙니까?

밖에서 입방아를 찧고 집으로 돌아오면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질지, 가족 간의 대화가 줄어들어 집안 분위기가 삭막해 질지는 모를 일입니다. 또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존경받는다는 얘기도 있지요. 책에는 있지만 현실에서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은퇴한 남자들은 어디에서 놀까? 주위를 둘러보면 장년 남자들은 다양한 놀이터를 배회하는 것 같습니다. 도서관, 당구장, 골프장, 영화관, 술집, 카페, 산, 산책로... 어쩌면 이 공간들이 바로 남자들의 참새방앗간일 겁니다.

요새 들어 내 나름대로의 놀이 루틴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전용 방앗간이 생긴 셈이지요.
블로그, 스크린골프장, 당구장, 도서관, 헬스클럽은 나만의 놀이터이고 방앗간입니다.
요새 들어 내 나름대로의 놀이 루틴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전용 방앗간이 생긴 셈이지요. 스크린골프장, 당구장, 도서관, 헬스클럽은 나만의 놀이터이고 방앗간입니다.




놀이에만 탐닉하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가끔 동네 도서관과 헬스장도 다니지만 이내 졸리고 금방 지칩니다. 솔직이 말해 도서관에는 한 시간도 앉아있기 힘듭니다. 사십 대 때부터 온 노안 때문에 글자도 가물거리고 집중도 안 되어서 책을 빌려서 금방 돌아오게 됩니다.

넷플릭스 영화 시리즈에 빠져서 책은 거의 안 읽는 편이지만 그나마 일본 추리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읽는 재미는 꽤 쏠쏠합니다. 동갑내기 작가라는 것에도 더 끌렸던 것 같습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나 <블랙 쇼맨> <아름다운 흉기> 같은 소설책이 최근에 도서관을 떠나 우리 집에 다녀갔습니다.




스크린골프는 객지생활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버텨내는 '생존의 무기'였기에 새삼스러운 취미도 아니지요. 하지만 당구는 새롭게 빠져든 마약 같습니다. 우연히 들른 집 근처 당구장에서 동호회원 모집을 한다길래 덜컥 가입해 버렸지요. 한 달에 5만 원만 회비로 내면 일주일에 사흘 오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구청 복지과와 당구장이 협약해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라더군요.

장년들 사이에서 당구와 골프는 특히 인기 있는 스포츠 취미인 거 같습니다. 신체적 운동과 함께 사회적 교류를 촉진하고 전략적 사고와 집중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정신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확신이 듭니다.


당구장은 가장 대중적이고 흔한 장년들의 참새 방앗간입니다. 당구는 몸을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신체 활동이 됩니다.
여기서는 손보다 입이 더 바쁘기도 합니다. 큐를 잡고 있는 손보다 다른 사람들의 플레이에 참견하는 입이 더 열일을 하는 하는 사람들 꼭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당구장에서도 이런 대화가 흔하더군요.

"거, 김 사장. 치수 제대로 놓은 거 맞아? 아무리 봐도 이백은 너무 짠 거 같아."
"자세 더 낮추고 역회전을 더 먹였어야지. 당점이 높으니까 자꾸 큐미스도 나고 방향이 틀어지잖아."




손보다 입이 더 바쁜 건 골프장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필드에서도 그렇고 스크린 골프장에서도 남의 플레이에 일일이 레슨 하는 오지라퍼가 꽤 있습니다. 특히 스크린 골프장은 이런 참견꾼들이 살기 좋은 참새들의 천국 같습니다.

"몸을 오른쪽으로 더 틀어놓고 벙커 왼쪽을 에이밍해 봐."
"샷이 너무 빨라. 백스윙도 충분히 되기 전에 급하게 내려오니까 자꾸 뒤땅이 나는 거지."

물론 진짜 고수님의 금과옥조 같은 지도말씀은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거의 티칭 프로와 같은 완벽한 스윙과 샷, 어프로치와 퍼팅을 직관하면서 같이 게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공부지요.
실력차가 너무 커서 긴장감도 없고 엉성한 플레이를 참아내면서 보는 것이 스트레스일 텐데도 내색 않고 같이 놀아주는 것만도 황송한 일이지요. 그런 고수일수록 겸손과 예의도 남다릅니다.

"저도 잘 못하지만 한 가지만 팁을 드려도 될까요?"라고  양해를 구하고 원포인트만 정확하게 지적을 합니다. 변변하게 레슨 받을 기회도 없이 닥치고 게임만 하면서 겨우 백돌이를 면한 저 같은 하수에게는 그야말로 꿀팁이고 개이득이지요.




드에 나가면 이런 스승도 꼭 있습니다. 정작 캐디는 입을 다물고 있고 사이비 티칭프로들의 입방아가 18홀 내내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집니다.
가끔은 그 참견러의 스코어가 나보다 더 안 좋은 것을 알았을 때는 황당하고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얼마나 어설프게 보였으면 이럴까 하는 생각에 짜증도 나고 자괴감이 점점 더 커집니다.
 
당구든 골프든 지나친 참견은 선수의 자신감을 떨어뜨릴 수 있고 스트레스를 유발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한두 번은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참견이 지나치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더군요.




생각해 보면 그런 입방아는 내가 더 많이 찧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고 오지랖이 넓어지는 꼰대가 되어가는 것이지요.

그래도 집에서 가족들과 덜 부딪히려면 참새방앗간에라도 들락거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삼식이처럼 집밥만 축내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입방아로 쭉정이라도 찧으면서 재미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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