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남자일수록 여자 말을 잘 들어야 된다. 마누라와 네비 아가씨, 캐디님 말은 특히 잘 들어야 한다. 안 그랬다간 가정 파탄이 나거나 길을 잃거나 골프가 망한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뜻으로 쓰였던 남존여비(男尊女卑)는 뜻풀이가 달라져야 한다. 이제 남자의 생존은 여자의 비위를 맞추기에 달려 있다. 여성의 파워가 압도하는 세상, 신 남존여비의 시대다.
남자의 위세가 떨어졌다는 증거는 또 있다. ‘불혹’이 지난 남자는 어느새 여자의 인생에서 ‘부록’으로 전락하고 만다. 남편은 원수이고 애물단지고 효력 없는 보험이다. 아들은 애인이고 장난감이고 신종 보험이다. 적어도 엄마들에게 아들은 이 세상 최고의 존재다. 우리 아내 핸드폰에는 출가외인이 된 아들이 아직도 ‘나의 희망’으로 되어 있다.
세상은 온통 우먼파워가 압도하는 듯하다. 특히 이 시대의 상품광고들은 여성들을 설득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그들의 환심을 사지 못하면 절대로 지갑은 열리지 않는다는 절박감으로 온통 여자마음 사로잡기에 매달리고 있는 듯하다. 페미니즘을 부추기는 전위대에는 항상 패션광고가 서 있다.
쿠카이(Kookai)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캐주얼 브랜드이다. 프랑스의 한 일간지에 따르면 이 브랜드의 파워는 그 나라의 여성부 장관을 능가한다고 한다. 여성의 권익향상에 그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브랜드라는 얘기다. 부적절한 롤리타(Lolita impertinente) 이미지를 표방하면서 비주얼 스캔들을 일으켰던 문제적 광고. 쿠카이 브랜드광고는 세기를 바꾸어 가면서도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더욱 확실하게 구축해 가고 있다.
상식을 뒤집는 표현, 난해한 기호적 묘사로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쿠카이가 고집스럽게 들고 가는 광고콘셉트는 '여자 기살리기'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그런 메시지는 일관성을 지켜가고 있다. 이렇듯, 집요한 자세로 남성의 권위와 힘에 맞서서 여성우월을 부르짖은 덕분에 이제 쿠카이는 페미니즘의 전사로 우뚝 서 있다.
남자의 자존심에 침을 뱉으마!
남자들의 알량한 자존심의 두께를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 함부로 내팽개쳐진 음료수 캔에 남자의 이미지를 구겨 넣었다. 마법의 램프에 갇혀버린 거인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낄낄대는 지니처럼 가학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 이 시대 남자들의 생사여탈권은 여성의 손아귀에 있음을 풍자하는 기호적인 그림이다.
패션광고는 더 이상 마케팅 목적을 향해 직격탄을 쏘진 않는다. 의상의 특징이나 디자인, 색상을 파는 대신 시대정신이나 문화를 앞세워 상표이미지를 끼워 팔기 하는 것 같다. 코카콜라가 미국의 풍요를 팔고 나이키가 NBA의 스포츠 제국주의를 팔고 볼보 자동차가 안전지상주의를 팔듯이 말이다.
'입기 위해' 구매하는 시대에서 '즐기기 위해' 사는 시대로 변했다. 기분전환을 위해 패션 카탈로그를 넘기다 우연히 눈에 띈 브랜드를 위해 지갑을 톡톡 터는 것은 적어도 소비자들에게는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 거기에 광고 하나에서 여성상위시대임을 확인하는 짜릿함까지 얻을 수 있다면 패션광고는 단순한 상표값 이상의 보상을 하는 것 아닐까?
할로겐램프에 꼬이는 나방처럼 여자들에게 기생하는 존재로 비하되는 남자. 그리고 네일 파일 끝에 매달려 구명을 애걸하는 남자는 말 그대로 손톱밑의 때처럼 귀찮은 존재로 묘사되는 광고 이미지도 있다.
아슬아슬하게 드러나는 여자의 비키니라인을 마치 잔디밭을 손질하듯이 충직하게 보살피는 남자. 한 움큼의 머리카락과 함께 개수구에 빨려 들기 직전 여자에 의해서 목숨이 구해지는 남자 이미지. 선탠을 하는 여자의 등에 오일과 크림을 발라주는 남자들. 이 모든 광고 이미지들은 이 시대 여성들의 우월감과 가학적 쾌감을 자극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언뜻 보기엔 단순무식해 보이는 사진이지만 이 그림에는 수천 년의 성대결 역사가 담겨 있다. 여자를 억압해 온 온갖 굴레와 차별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 웅변으로 뿜어지고 있는 듯하다. 표현의 관점에서는 패션광고가 이래야 된다고 하는 인식의 굴레들이 박살 나고 있다.
감성과 무드, 터치, 스타일, 매너가 송두리째 부정되고 있다. 한편 한편이 마치 패션광고의 성역에 도전하는 듯한 반항이요 실험이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브랜드의 인지강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과 은밀한 계산을 들춰낼 수 있음 직하다.
여자는 왜 굽높이 구두를 신는가?
독일의 여성구두 브랜드 리카르도 카틸로네 (Riccardo Cartillone) 광고는 한술 더 뜨고 있다. 요런조런 남자들의 정수리를 탑뷰(top-view)로 보여주면서 굽 높은 구두를 신는 여자의 쾌감을 풍자하고 있다. 장난기가 도를 넘는다 싶다. 도대체 사람들 꼴이 저게 뭔가? 왜 저렇게 망가뜨려 놓고 있는 건가? 멀쩡한 남자들이 보기에도 민망한 모양들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다는 것은 여자의 자존심을 끌어올리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구두에는 신분상승의 코드가 담겨 있다. 왕자가 애타게 찾는 유리구두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평민에서 왕족으로의 변신을 의미했다.
필리핀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이멜다는 구두수집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구두를 소유하려는 욕망은 본능이라고 둘러댔다. ‘미스 필리핀’ 시절에서부터 영부인시절까지 모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3000켤레의 구두를 전시하면서 다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었다.
그가 그토록 구두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구두박물관 개관 연설에서 그녀의 심경은 드러난다. “나는 구두를 신을 때마다 아직 남편이 대통령이란 느낌을 받는다” 그녀에게 있어 구두는 자신이 영원한 스타임을 증명하는 훈장쯤으로 여겨졌을 게다.
꼭 구두뿐만이 아니다. 탐나는 물건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도발정신이 소비사회에서는 근사한 풍경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