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탈 下
그날은 마치 전투를 준비하듯 시작됐다. 이진석은 이른 아침부터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 단백질 파우더와 영양제를 두 배로 타 마셨다. 몸은 무겁고 둔탁했지만, 그 무게감이 그를 안심시켰다.
‘이건 내 몸이다.’라고 자신에게 되뇌며, 거울 앞에서 간단한 펌핑 운동을 했다. 근육은 여전히 도드라졌고, 핏줄은 살아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가짜 같은 감각. 자신이 자신의 근육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착용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날 헬스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일부러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들어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 남자는 이미 와 있었다. 이번엔 랫풀다운을 하고 있었는데, 자세와 각도는 완벽에 가까웠다. 그는 이진석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주 미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진석이 늘 그러했듯이.
‘이 새끼… 나 따라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날 무시해?’
그는 이를 악물고 바로 덤벨 구역으로 향했다. 데드리프트부터 시작해, 체스트 프레스, 랫풀다운까지. 무게를 올리고, 세트를 늘렸다. 하지만 이상했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펌핑감도 오지 않았다. 트레이너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몸이 많이 경직돼 있으세요. 어깨 쪽이 좀 막힌 느낌인데, 스트레칭 더 하시죠?”
이진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가볍게 풀고 다시 밀어붙일게요.”
거울 속의 그는 점점 초췌해져 갔다. 힘이 빠지고, 근육이 꺼지는 느낌. 반면, 그 남자는 오늘따라 더 강해 보였다. 가슴근은 볼록 솟았고, 팔뚝에는 핏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이진석이 새긴 문신과 비슷한 문양의 문신이 그의 팔 안쪽에 분명히 있었다.
‘저건?!. 저게 왜…’
이진석은 식은땀을 흘리며 운동을 마쳤다. 그의 다리는 후들거렸고, 손은 떨렸다. 온몸이 무거웠고, 이두와 삼두는 가벼운 통증을 넘어 무기력한 감각만 남아 있었다. 마지막 세트를 마친 후, 그는 물 한 모금 없이 숨을 몰아쉬며 락커룸으로 향했다.
샤워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안쪽 한 칸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바깥쪽 샤워기로 걸음을 옮겨 수도를 틀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부터 내리 꽂혔다. 갑작스러운 냉기에 피부가 얼얼해졌지만, 정신은 오히려 뜨거워졌다. 열이 난다는 뜻이 아니라, 어디선가 불길이 피어오르는 듯한 감각이었다.
‘아 진짜 왜 이렇게 내 몸 같지 않지? 근육 하나하나가 왜 이렇게 낯설지…? 근육이 내 말대로 움직이지 않아…’
그는 샴푸도 바디워시도 쓰지 않고 그냥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물줄기 아래에서, 그는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문신이… 흐려져 있었다. 선명하던 잉크가 마치 지워지는 듯했다. 피부에 남은 건 그저 회색의 희미한 그림자였다. 마치 그 문신이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샤워실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어깨를 돌리며 안으로 들어오는 실루엣.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였다. 그토록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 남자.
이번엔 이진석을 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진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샤워기를 틀고 천천히 어깨를 풀며 거울을 응시했다. 그리고, 웃었다. 바로 이진석이 매번 했던 그 만족의 미소였다. 그러나 이진석의 눈에는 그 미소가 달리 보였다.
그건 분명 만족이 아닌 전장에서 패자의 목을 베고 피 묻은 검을 닦으며 짓는 자비도 없고 연민도 없는 승자의 미소. 이진석은 소름이 끼쳤다. '네 것은 이제 내 것이다'라는 무언의 선언, 더 이상의 싸움은 없고 결과는 이미 정해졌다는 걸 조용히 들이밀듯이 이진석은 그 웃음이 무서웠다.
이진석은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삼두근은 예전처럼 볼록하지 않았고, 팔뚝엔 핏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복근은 흐릿했고, 목덜미에 있던 작은 흉터조차도 사라져 있었다. 반면, 샤워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그 남자의 몸은 완벽했다. 마치 잡지 속 피트니스 모델처럼.
그때였다. 거울 옆에서 스쳐 지나가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락커 앞 거울을 응시하며 수건으로 목을 닦고 있는 그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의 팔뚝, 어깨, 가슴 그 모든 라인이 익숙했다. 아니, 익숙함을 넘어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았다. 이진석만 알고 있던 오른쪽 광배근의 옅은 흉터 자국, 어깨 위 미세한 점, 팔뚝에서 이어지는 힘줄의 방향까지.
그리고, 그의 팔 안쪽에는 이진석이 얼마 전 새겼던 이니셜 타투가 있었다. 잉크의 번짐이나 굴곡마저도 완벽하게 같았다.
그건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다. 복제였다. 아니, 강탈이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이진석을 쳐다보지 않았다.
‘저건 내 몸이야… 저건… 내 거라고…’
이진석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거울 속의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었다.
이진석은 며칠 밤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잠이 들어도 금세 깼고, 거울 없는 공간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 벽지에 은은히 비치는 조명, TV에 꺼진 화면, 그는 더 이상 어디에도 숨을 수 없었다. 아침에 얼굴을 씻다가 무심코 마주친 거울 속 자신은, 점점 ‘남’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다시 피트니스 클럽으로 향했다. 자신의 몸이 그리워서였을까, 아니면 그저 익숙했던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일까. 어쩌면 그 몸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기대였는지도 모른다.
센터의 조명은 그대로였고,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묵직한 비트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눈빛, 무심한 듯 정확한 동작, 도드라진 근육과 핏줄. 이진석은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짐볼 옆 벤치에 앉았다.
‘이젠 내가 저 몸을 동경하게 된 건가…’
그는 조용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이두가 당겼고, 햄스트링이 굳었다. 무거운 덤벨을 들자 팔목이 흔들렸다. 첫 세트부터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예전의 이진석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은, 딱 그 남자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모습이었다.
위치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거울 앞 중앙에는 이제 ‘그 남자’가 서 있었고, 이진석은 주변에서 조용히 운동을 따라 하는 익명의 회원처럼 구석에 있었다. 누가 봐도 중심은 그 남자였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시선도, 트레이너가 자주 다가가 말을 거는 대상도 그였다.
그때였다. 새로운 얼굴들이 나타났다. 탄탄한 몸매의 피트니스 선수들이 해외 대회를 마치고 복귀한 것이다. 그들은 짐 안에 들어설 때부터 분위기를 바꾸었다. 걸음걸이 하나, 워밍업 하나에도 자신감이 넘쳤고, 다져진 몸의 밀도는 일반 회원들과는 결이 달랐다.
센터 안에 흐르던 공기조차 달라졌다. 그동안 눈에 띄던 기존의 강자들이 조금씩 자신들의 위치를 조정했다. 거울 앞 중심부에 있던 자들이 한 걸음씩 옆으로 비켜섰고, 자신만만하던 트레이너들도 약간은 움츠린 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마치 이곳의 '주인'이 바뀐 듯한 기류였다.
그들 중 한 명은 특히 눈에 띄었다.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듯한 움직임, 매끈하면서도 선이 깊은 근육, 마치 고대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대흉근과 균형 잡힌 복근선은 센터 안의 시선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사람들이 은근슬쩍 기구 위치를 바꾸거나, 스트레칭을 길게 하며 그들을 흘끗 보는 횟수도 많아졌다.
그리고 그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땀을 닦던 손을 멈춘 채, 눈빛이 정확히 그 선수 한 명에게 고정됐다. 전과 달리 길고 집요한 시선이었다. 마치, 다음 목표를 고르는 포식자의 눈빛 같았다.
그 남자의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이진석은 어딘가에서 본 그 표정을 기억했다. 바로, 자신이 거울 앞에서 ‘완성된 몸’을 처음 보았을 때의 미소였다. 압도적인 만족감과 확신. 누군가를 무너뜨려 얻은 것이 아니라, 완전한 승복을 강요하는 침묵의 선언 같은 미소.
그는 무겁게 바벨을 내려놓았다. 이제 땀이 아니라, 뼛속 깊은 허무감이 온몸을 적셨다.
그러다 문득, 이진석은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 그 남자는 방금 눈을 깜빡이며, 이쪽을 힐끔 본 듯했다. 그리고, 다시 그 특유의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번엔 이진석도 작게 웃었다.
그 미소에는 체념도, 희망도 없었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가볍고, 어딘지 모르게 비틀린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이진석은 거울 속 그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문득 깨달았다. 이제 그 남자는 더 이상 자신에게 흥미가 없었다. 그는 새로운 대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는 다른 놈이 당하겠구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이진석은 희미하게 웃었다.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것이 되어버린 자기 몸이 더는 유일한 희생이 아니라는 안도. 아주 비열하고, 아주 인간적인 안도였다.
이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이며,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단체는 실제와 무관합니다.
혹여 현실과 유사하더라도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헬스장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시선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사실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괜히 남을 의식하고 불편해지는 순간이 있지요.
그 사소한 감각을 극단으로 밀어붙였을 때 생겨나는 불안을 이야기로 만들어보았습니다.